이병각목사 (예담교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

텔레비전 프로 중에는 웃고 즐기는 코미디 프로가 많지만 이와는 반대로 슬프고 가슴 찡한 것도 있습니다. 인생극장, 이것이 인생이다, 느낌표, 만나고 싶은 사람을 찾아주는 프로그램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 프로는 실재 주인공의 이야기이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슬픈 이야기들이라 언제나 진한 감동을 줍니다.

세상에 슬픈 일이 많습니다. 가족 중의 사별한 경우입니다. 자식을 앞세운 부모는 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부부의 사별도 큰 충격입니다. 형제가 헤어져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형제들이 만나서 눈물로 포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경우입니다. 영국의 다이애나 왕자비의 죽음은 온 세계를 슬프게 했습니다.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경우입니다. 인기와 물질과 건강과 명예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몰락할 때 비통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가족이 여러 가지 형편으로 한 지붕 아래 살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길거리 노숙자의 소원은 한 지붕 아래서 같이 사는 것입니다.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하고 이별하는 경우입니다. 요즘 드라마라 같으면 시청자들의 거센 압력에 대본을 해피엔딩으로 바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슬픈 일이 있었습니까? 누구나 슬픈 이야기 한가지쯤은 있을 것인데 우리에게는 어떤 슬픈 일이 있었습니까?

성경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여러 사건이 있고 많은 인물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도 하나님의 버림을 받는 것이 가장 슬픈 일입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면 우주의 고아가 되고 물 떠난 고기가 됩니다. 사막의 떨기나무가 됩니다. 하나님의 버림을 받으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사람 삼손을 소개합니다.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신을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이 삼손에게서 떠났습니다. 그 결과 삼손에게 있던 힘은 사라졌고,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능욕을 당했습니다. 두 눈이 뽑히고 놋줄에 묶여서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삼손의 힘

삼손은 하나님이 함께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특별한 힘을 가진 이스라엘의 사사였습니다. 그는 맨 주먹으로 사자의 입을 찢기도 하고, 블레셋 사람들 수백 명을 죽이기도 했고, 블레셋 사람이 사는 성문의 문설주를 어깨에 메고 옮기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다른 사람에게 없는 큰 힘을 주셨습니다.

삼손의 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삼손은 다른 사람보다 긴 머리카락을 가졌습니다. 과연 삼손의 긴 머리카락에서 힘이 나왔습니까? 사람들은 지금도 긴 머리카락을 특별한 재능이나 힘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긴 머리카락은 나실인의 표시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바쳐진 사람입니다. 나실인은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기 때문에 긴 머리카락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삼손에게 힘을 주신 것은 그의 긴 머리카락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께 헌신된 나실인이었기에 때문입니다.

왜 삼손에게서 힘이 떠났습니까? 그의 긴 머리카락이 잘라진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머리카락 이전에 삼손이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약속한 삶을 포기한 때문입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계속된 간청에 자신의 머리카락이 잘리면 힘을 잃을 것이라는 나실인의 비밀을 토설했습니다. 나실인의 삶을 포기하는 순간 곧, 삼손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떠난 순간 삼손은 힘을 잃었습니다. 성도들의 힘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힘을 얻고, 하나님이 떠나시면 힘을 잃습니다. 우리의 힘은 영적 생활에 달려 있습니다. 영혼이 얼마나 잘 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비극

삼손은 하나님이 자기를 떠난 후에도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신을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얼마나 어리석고 우둔합니까? 이미 하나님이 떠났지만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러 올 때도 전과 같은 힘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영적으로 소경과 같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혀서 두 눈이 뽑히고 맷돌을 돌리는 고통을 받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자기를 떠난 것을 알았습니다. 비극입니다. “블레셋 사람이 그를 잡아 그 눈을 빼고 가사에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로 옥중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21절).” 눈을 빼는 것은 승자가 패자에게 행하는 잔인한 형벌입니다. 맷돌은 노예의 일입니다. 작은 맷돌은 여인들이 돌리는 것이지만 큰 것은 가축을 이용하거나 노예들이 돌렸습니다. 노예에게 가장 고된 일이 짐승처럼 맷돌을 돌리는 것입니다. 삼손은 노예처럼 능욕을 받았습니다.

지난날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조롱거리입니다. 놋줄로 결박을 당한 채 승리의 잔치를 벌이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맨 주먹으로 블레셋 사람들 수백 명을 죽인 용사가 노예 신세가 되어서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떠나면 이렇게 비참해집니다.

베트남 전쟁에 참가해서 포로로 잡힌 한 미국 공군 조종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몇 년을 포로로 비참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 갇혀서야 자신이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왔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수용소에는 목사님도 주일학교 교사도 성경도 찬송가도 나에 사랑과 관심을 베풀어줄 어떤 믿음의 형제들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영적인 생활이 없었다는 것을 감옥에 갇힌 후에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우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맙시다. 포로가 되기 전에, 감옥에 갇히기 전에, 두 눈이 뽑혀서 원수들에게 조롱당하기 전에 하나님을 바로 알고 영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영혼의 정원 가꾸기

우리의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영혼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영혼이 중요합니다. 영혼이 정신을 지배하고, 영혼이 육체를 지배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의 기본 원리입니다.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여미지 식물원에 가보셨습니까? 세계 각 나라의 식물도 볼만하지만, 야외에 꾸며 놓은 각 나라의 정원도 볼만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정원은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고, 일본의 정원은 깔끔하고 아기자기 하며, 이태리 정원은 시원하게 탁 트였습니다. 정원 하나를 보면 그 나라의 문화와 풍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영적인 정원입니다. 영적인 정원을 아십니까? 아름다운 꽃도 있고 예쁜 새도 있습니다. 잔잔한 물도 있고 시원한 바람도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철마다 모습을 새롭게 하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영혼의 정원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돌과 자갈과 잡초가 우거지면 정원이 아닙니다. 습지가 생기거나 모래만 있다면 아름다운 정원이 아닙니다. 가지도 쳐주고 물도 주고 거름도 주어야 아름다운 정원이 될 수 있습니다.

회개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영적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할 것이 있습니다. 회개입니다. 영적인 축복이 어디서 떨어진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얻어맞은 상처뿐인데 그것을 몰라서 되겠습니까?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블레셋 사람을 이기는데 쓸 힘을 기생의 집이나 출입하고 들릴라의 침실에서 허비했습니다.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야곱은 세겜성에서 큰 화를 당한 후에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세겜성이 아니라 벧엘인 것을 알았습니다. 지난날 형 에서를 피해 도망갈 때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을 생각했습니다. 가족들에게 벧엘로 올라가자고 호소했습니다. 만일 무사하게 가나안으로 돌아오면 벧엘에서 하나님의 집을 짓겠다고 서원한 것을 기억했습니다.

베드로는 새벽 닭 우는 소리에 자신이 주님을 배신한 것을 알고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른 사람은 주님을 버릴지언정 자기를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소리친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예수님을 모르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차라리 도망이나 할 것인지 왜 배신을 합니까?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받아서 세상으로 나간 둘째 아들은 허랑방탕해서 재산을 다 탕진했습니다. 남의 집에서 종살이하면서 돼지 쥐엄 열매를 먹을 때 깨달았습니다. 남의 집에서 종살이하느니 차라리 아버지 집에 돌아가서 종살이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돌아갔습니다. 회개하는 심정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정원에 돌과 자갈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잡초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힘도 들고 아프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새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회개는 수술과 같습니다. 아프지만 회복만 하면 건강과 생명을 되찾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깨져야 합니다.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시다. “어둔 밤 쉬 되리니 네 직분 지켜서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라!”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깊이 가지지 못한 것을 회개합시다.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먼저 네 영혼이 잘되라고 하셨는데, 육체를 위하고 세상을 위하느라 영혼을 돌보지 못한 것을 회개합시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침묵과 고독의 시간

어느 부부가 이혼할 단계까지 왔습니다. 둘 다 믿음이 있는 사람인데 대화가 안 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급기야 이혼 직전에까지 왔습니다. 목사님이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불러서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무슨 말을 했겠습니까?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면 이 부부가 듣고 순종하겠습니까? 목사님은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고리타분하게 옛날처럼 이혼 금지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십니까? 성경해석을 신식으로 해야 합니다 하고 반발했을지도 모릅니다. 목사님은 우리 부부의 불행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런 결혼을 계속 유지하라고 하십니까? 하고 항변했을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은 두 사람에게 각각 한적한 곳으로 가서 일정 기간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갖도록 권면했답니다. 부부는 목사님 말씀대로 실행했고, 그 결과 가정이 회복되었습니다.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하나님과 영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두 사람이 마음이 시끄러우면 해결이 안 됩니다. 조용한 곳으로 가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침묵의 친구입니다. 자연을 보십시오. 나무와 꽃과 풀이 조용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에 침묵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끄럽고 요란합니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소음과 잡담과 바쁜 일정으로 숨 가쁘게 돌아갑니다. 혼자 있는 시간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맙시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수님도 자주 한적한 곳으로 나가셨습니다. 시끄러운 도시가 좋을 것이 없습니다. 소돔성과 바벨탑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통해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교역자들 제자훈련 시간에 우리의 생활 중에 고칠 것과 해야 안 될 일이 무엇인가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고칠 것이 무엇입니까? 많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많이 보고 생각하지도 말고, 많이 말하지도 말자는 것입니다. 목사는 남의 속을 들여다보고 남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것이 병입니다. 적당히 듣고 적당히 보아야 합니다. 말하는 것은 더욱 줄여야 합니다. 분주한 일을 줄여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고독하고 침묵해야 합니다. 대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침묵과 고독의 시간은 영적인 삶을 회복하는데 유익합니다.

말씀의 양식

우리의 영혼은 양식을 필요로 합니다. 광야 길을 가던 이스라엘 백성은 새벽이슬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습니다. 우리가 먹을 양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먹어야 합니다. 은혜 중에 은혜가 말씀의 은혜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곁에서 말씀을 듣는데 열중했고,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는데 열중했습니다. 누가 주님의 칭찬을 더 받았습니까? 마리아입니다. 영혼의 회복은 말씀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써야 합니다. 신년에는 성경 읽기에 더 힘쓰기 바랍니다. 개인적으로는 성경읽기표를 사용하고, 성경 통독 그룹에서 함께 성경을 읽는 것도 좋겠습니다. 성경 쓰기에 동참하기 바랍니다.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훈련하기 바랍니다. 새로 시작하는 제자훈련에 꼭 참여해서 말씀의 사람으로 훈련되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을 마쳐야 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훈련을 받아야 합니까? 말씀이 내면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과 생각과 행동을 바꾸어 놓을 때까지 말씀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는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이 받아주신다.” 이 말씀이 뼈가 되고 살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소리내서 말하고 외치고 기도로 주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시인해야 합니다. 말씀의 적용을 기록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고 좋은 습관입니다. 말씀을 기록하고 소감을 기록하는 노트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배와 기도의 무릎

영혼의 회복을 위해서 예배만큼 은혜롭고 능력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한 주간의 삶에서 가장 귀하고 권세 있는 시간이 무엇입니까? 예배드리는 한 시간입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있습니다.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빛나고 높은 보좌에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 얼굴 영광이 해 같이 빛나네.” 예배에는 하나님께 찬양이 있습니다. “지극히 높은 위엄과 한없는 자비를 뭇 천사소리 모아서 늘 찬송드리네.” 예배에는 기쁨과 헌신이 있습니다. “나 이제 생명 있음을 주님의 은사요 저 사망 권세 이기니 큰 기쁨 넘치네.”

영적으로 회복되기 원하십니까? 예배의 삶을 회복합시다. 준비된 예배,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은 영혼이 잘 되는 축복을 주십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예배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허겁지겁 드리거나 무성의로 일관되거나 육신의 소욕으로 가득 찬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인간의 야망과 망상이 가득한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엎드립시다.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는 영혼의 갈급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입니다.
기도의 무릎을 꿇을 때 영적으로 회복됩니다. 기도가 잠자리에 들기 전의 마지막 행동이 되고 일어났을 때 첫 번째 행동이 되도록 합시다. 그리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을 것이고, 자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합시다. 내 안에 얼마나 마귀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자주 들어오는지 모릅니다.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포기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합시다. 부귀와 건강과 명예를 구하기 전에 지혜를 구합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릅시다. 배우자와 자녀를 위해 기도합시다. 친구와 이웃과 교회의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교회와 목사님과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합시다. 기독교 지도자들과 기관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세계선교를 위해 기도합시다. 사람들이 우리를 찾을 때 눈에 띄는 곳에 없다면 아마 기도골방에 있을 것이라는 인정을 받도록 합니다. 다니엘은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기도의 골방에 들어갔습니다.

삼손은 두 눈이 뽑히고 원수들에게 결박을 당해서 조롱을 받았습니다. 이대로 비극의 주인공으로 끝날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리운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22절).”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회복될 것은 암시합니다. 희망의 싹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새로운 힘을 주셨습니다. 머리털이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나실인의 삶을 회복할 때 자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영적으로 회복되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에게 영혼의 힘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갈 길이 남았습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믿음을 지켰으니.” 영적으로 힘을 회복합시다. 아직 낮입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영적인 힘을 새롭게 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사는 동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기 원하십니다. 육체의 힘도 필요하고, 지식의 힘도 필요하지만, 영혼의 힘은 더욱 필요합니다. 독수리 같은 새 힘을 얻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