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원목사 (지구촌교회)

여러분은 그 인간도 동물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인간 존재 안에 우리가 동물성 혹은 동물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의에서 인간도 동물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기독교적 전망 또한 성경적 가치관에서 볼 때 우리 사람은 분명히 동물과 차별화 되는 존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동물과 차별화 되는 존재일까요?
저는 두 가지의 특별히 영역을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인간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문화와 종교야말로 인간을 다른 동물과 차별화 시키는 독특성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기능 사고하는 기능이 우리에게 문화를 발전시켜 온 것이지요.
그래서 예술도 하고 과학도 발전시키고 이 생각하는 기능이 우리에게 문화생활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가 종교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동물에게는 문화생활이 있다든지 또 동물에게 종교생활이 있다는 흔적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인간다움의 증거가 무엇이냐?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줄 알고 기도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인간다움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생각하지 않고 인생을 살고 있다면 이 사람은 사람답지 않은 사람, 인간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다음 똑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기도하지 않고 산다면 사람이 아니다, 인간다운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한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 보십시오. “기도하고 사십니까?” 이렇게 한번 질문하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옆에 사람에게. “기도하고 사십니까?” 아이 질문을 좀 해봐요! 네, 그리고 대답을 들어보세요 대답을, 기도하고 사십니까? 한 번 대답을 들어보세요.
네, 대답이 시원치 않다든지 괜히 침묵 지키고 있는 사람, 이건 자신이 없다는 얘기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그런 사람을 다시 쳐다보시면서 인간이 아니시로군요? 하하하~~ 이렇게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 하하하~~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산마루턱에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일어서시는 주님에게서 어떤 영광스러움 거룩함 신비로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기도하고 일어난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기도하고 싶다라는 기도의 갈증이 기도의 목마름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1장에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달려가요. 달려가서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선생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이 그때 정말 기도를 배우고 싶니? 그러면서 주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기도가 아니예요. 우리의 기도예요. 어떤 사람은 정확하게 말하면 제자들의 기도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것은 예수님에게 적용이 안되거든요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 그러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을 면밀하게 분석하고자 할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이 주기도문을 분석적으로 접근하기보다도 개괄적으로 포괄적으로 접근하면서 이 주 기도문 속에 나타난 기도의 의미,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을 같이 살펴보고자 합니다. 기도의 의미, 무엇일까요?

이 주기도문에 의하면 첫째로 기도란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서 하십시다. “기도는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다”
자, 이 주기도문이 어떤 말로 시작됩니까? 주기도문 시작이 어떻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다시 말하면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하나님이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것으로 이 기도가 시작됩니다.
제가 미국 있을 때 한 번 어떤 미국교회에 갔다가 청년 한 사람이 모노드라마를 혼자서 드라마를 하는 것을 보았어요. 그런데 제목이 주기도문이예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누군가 언제 한번 시도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자, 혼자서 모노 드라마를 하는데, 주기도문을 하는데 이렇게 나와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그러니까 마이크로 녹음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왜 불러?” 그러니까
“아이 나 지금 주기도문 하고있어요 나를 방해하지 마세요”
“어, 너 나 부르지 않았니?”
“그러면 다시 하죠.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이름이…”
“너 나 또 불렀니?”
“아이, 나 주 기도문 하는데 왜 자꾸 방해하십니까?
“아, 너 그러면 정말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니로구나?” 이러면서 시작이 돼요.
우리가 이 주기도문을 너무나 외우는 것, 암송하는 어떤 종교 의식적인 무엇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암송하는 일에 급급하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고 계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여. 그래서 기도라는 것은 단순히 어떤 종교 의식적인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또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필요한 무엇을 구하여 얻기만 하는 행위이기 전에 앞서서 본질적으로 기도라는 것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지하게 불렀고 그분이 살아 계시다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그 분은 나에게 다가오시고 나를 만나주시고 나는 그 분과의 만남 속에 그분과의 대화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본질적 경험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우리가, 저와 여러분이 어느 날 기도생활 다운 기도생활을 갖지 못할까요? 뭐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아마도 중요한 원인은 우리들의 조급함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것은 어쩌면 현대 문화적인 경향, 우리문화가 자꾸만 우리를 급하게 만들잖아요? 그러니까 기도하는 시간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또 특별히 현대문화의 특성가운데 하나가 이런 컴퓨터의 클릭시대, 우리는 한 번 딱 클릭을 하면 내가 원했던 정보가 튀어나와야 합니다. 이런 시대적인 경향, 거기다가 이러한 시대적 정신이 끼쳐준 기도에 대한 오해, 우리는 마치 컴퓨터의 클릭처럼 기도란 것도 내가 딱 기도하면 즉각적으로 응답이 와야 하는데 기도해 보아도 응답이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 살아 계실까? 기도가 정말 필요한 것일까? 이런 본질적인 기도에 대한 회의를 갖습니다. 이것은 바로 이런 급해지는, 또 컴퓨터의 클릭시대의 영향도 적지 않게 기도생활에 영향을 끼친다고 저는 생각을 해요.
요즘 컴퓨터식 주기도문이 나와있는 것 여러분 아십니까? 컴퓨터식 주기도문. 제가 한 번 소개 해 드리지요.
하드디스크에 계신 우리 프로그램이시여.
패스워드를 거룩하게 하옵시고 운영체계에 임하옵시며
명령이 키보드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모니터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데이터를 주시옵고
우리가 프로그램의 오류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오타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바이러스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불시의 정전에서 구하옵소서. 엔트. 하하하~~

네, 여러분 기도가 컴퓨터와 차별화 되는 특성이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의 본질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정보의 획득이 아니라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격의 대화입니다. 그리고 이 대화의 깊이는 기다림의 그 과정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충분한 시간을 통해서 나는 기도하는 대상인 인격자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관계를 개발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저 뱅크웨어에 리젼트라는 유명한 신학교가 있는데 신학교의 학장이신 제임스 휴스턴 박사는 기도를 정의를 하면서 이런 독특한 정의를 했어요. 기도란 뭐냐? 기도는 하나님과의 우정이다. “friendship with God” 하나님과의 우정이다.
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주 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을 때 이 첫마디가 딱 끝나고 나서 아마도 제자들은 굉장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자, 다시 한번 주기도문이 어떻게 시작이 돼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가장 많이 보편적으로 사용한 칭호가 있다면 “여호와, 야훼” 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너무 거룩한 이름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도나이, 뭐 주님, 이러한 표현을 많이 썼어요.
어쨌든 구약의 하나님은 굉장히 멀리 계신 하나님,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 거룩하신 하나님, 이런 이미지가 있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우리가 예수님이 실제로 그의 공생애 가운데 복음서에 보시면 예수님이 하나님을 향한 호칭 속에서 그는 마지막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꼭 한번 엘리 엘리, 나의 하나님 하나님! 그 표현을 써셨을 뿐 예수님은 주로 사용하신 표현이 뭐냐하면 “아버지” 이렇게 써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떤 나라 언어를 써셨을까? 학자들은 예수님이 아라믹 랭기지, 아람어를 써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아람어에 의하면 이 아버지라는 거창한 존칭이 없습니다. 대신 아주 간단한 애칭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우리말의 아빠와 같아요. 그래서 아람어로도 “아바” 입니다. 아바, 아바. 그래서 아빠란 뜻이예요. 그러면 이렇게 가르쳐 주신 거예요.
야, 너희들 앞으로는 기도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시여!”
아니 아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단순하게 아버지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나는 아빠 같은 분이야 하나님은 말이야,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아빠, 그러면서 그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라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늘이란 말이 복수입니다. 하늘들, 이것은 하늘들을 만드시고 만유를 만드시고 만유를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 아빠다 우리 아빠다.
우리 부모들은 특별히 아버지들은 어린아이들이 아빠하고 부를 때 어떤 행복을 느끼잖아요 아빠 된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데 한 신학자가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그의 자녀들이 아빠하고 부르며 나올 때 그는 행복해 하시며 기뻐하시며 우리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래서 오늘 그 하나님에 관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왜 우리가 기도 속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현대 실존주의 작가 가운데 커다란 영향을 끼친 프란츠 카프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현대인을 그의 작중 인물들을 통해서 묘사하면서 자주 이 단어를 썼어요.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마치 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다. 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와 같다.
이것은 프란츠 카프카 자신의 경험을 사실은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분의 아버지가 있었어요. 그런데 한 저널에서 일기 가운데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자기 아버지가 있었지만 그는 단 한번도 아버지와 의미 있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어본 경험이 없다. 자기는 고아처럼 느끼고 있었다.
오늘 현대인들의 문제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가 믿고 부를 수 있는 아버지를 갖지 못한 현대인들, 요즘 현대 와서 이 동성연애자들이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 증가되는 원인을 여러 가지 이유로 진단하고 설명하지만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여러분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소위 그 게이, 호모, 동성연애자가 되는 것 아세요? 아버지를 잃어버린 고아들, 고아들.
프란츠 카프카의 그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가 성(城) “The castle” 이라는 작품이죠. 이 작품에 보면 케이라는 주인공이 나오는데 척량사예요. 그래서 자기가 어떤 계약문서를 가지고 성을 찾아갑니다. 어떤 마을을 통과하면서 성을 찾아가서 성에 들어 갈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성에 들어가지 못해요. 작품의 마지막에 그는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마을 주변에서 배회하는 것으로 이 작품은 막을 내립니다.
기독교 문화 평론가들은 그것이 카프카가 어떤 신앙을 그리워하고 하나님을 그리워했지마는 그러나 하나님을 소유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땅의 아버지도 아버지다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카프카의 소외된 외로움이 이 작품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성은 신의 존재, 영혼의 고향이 되시는 하나님의 품과 같은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끝내 그 성에 들어가지 못한단 말이지요.
우리는 아~ 뭐 기도해보겠다는 마음을 감히 갖지마는 그 하나님 속에 들어가지 못해요. 하나님 임재 속에 들어가지 못해요. 하나님이 어려워 보이고 멀리 있는 분으로 보이고.
그런데 예수님은 이 주기도문을 가르치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 아빠!
단순한 마음을 가진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있는 어린 아이들이 아빠하고 부르면 왜? 하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처럼,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고백한다면 내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 부를 때마다 내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기도란 그 하나님과 만남이요 그 하나님과의 교제요 그 하나님과의 대화요 그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감이 바로 기도의 본질이라는 사실입니다.
기도란 무엇일까요? 기도란 것은 하나님의 그 임재를 구하는 사건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이 주기도문에 의하면 기도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입니다. 한 번 따라서 하세요. “기도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로 하나님의 사역을 이룰 수가 있을까요? 세 가지 차원이 있어요.
우리가 기도함으로 할 수 있는 것, 또 우리가 기도함으로 마땅히 해야 할 것,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예요.
첫째는 뭐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넓힐 수가 있어야 합니다.
세번째, 하나님의 섭리를 펼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로 할 수가 있는 것, 그리고 기도로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기도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주기도문의 어떤 부분이예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또 하나님의 나라를 기도로 확장시키고 넓힐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떤 부분이예요?
“나라이 임하옵소며”
또 기도로 하나님의 섭리를 펼쳐갈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어떤 부분입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의 전반부를 여러분이 면밀하게 관찰해 보면 이 전반부에 특별히 강조된 단어하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에서는 그 단어가 의도적으로 생략되어 있어요. 그것이 “당신” 이라는 단어예요 당신, 당신.
왜 생략되었을까? 저는 이해는 돼요. 왜냐하면 우리 한국어에서는 당신이라는 그 표현이 상당히 비하적인, 사람을 낮추는 뜻을 갖고있기 때문에 당신! 뭐 이러잖아요?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께 써는 것은 불경하다, 우리의 선배들이 그렇게 느꼈을지 몰라요. 그러나 영어나 외국어 권에서는 당신이라는 말이 결코 사람을 낮추는 표현이 아니죠. 그래서 본래는 이렇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 다음에 뭐예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이름이 아니예요. “당신의 이름이” Thy name., Thy name, Your name.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그 다음에 그냥 나라이 임하옵시며가 아니라 당신의 나라가 “Thy kingdom, Your kingdom” 당신의 나라가 임하여 주옵시고, 그 다음에 뜻이, 그냥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이” Thy will be done 당신의 뜻이 Your will, 당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당신의 뜻.
그래서 이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그 초점이 어디에 있나 하면 나에게 있지 않아요.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필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에 있어요.
기도란 본질적으로 단순히 내 소원을 만족시키고 내 욕심을 채워 가는 것이 아니라 기도란 것은 하나님의 관심, 또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필요에 일차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기도이여야 한다,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
그래서 산상수훈의 다른 부분에서는 주님이 또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너희는 먼저 뭘 구하라고 그랬어요? 그의 나라와 그 다음에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렇게 가르치셨단 말이죠.

여러분 기독교가 다른 종교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사람들도 기도하잖아요?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타종교의 기도가 차별화 되는 특성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이 대목이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 하나님의 일, 거기에 일차적 관심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만약 그것을 무시하고 그것을 망각하고 우리의 필요, 소원에만 몰두하는 기도를 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기복적 수준의 기도로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그때 기독교인의 신앙이 기복적 신앙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러면 우리의 소원을 기도하는 것이 잘못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의 소원, 우리가 구하고 싶은 것, 구해야지요. 기도해야지요. 마땅히 해야 돼요. 그러나 우리의 소원만 기도하면 안 된다는 말이죠. 우리의 소원을 기도해야 되지마는 우리의 기도 속에 관심이 오직 나의 필요 밖에는 없다, 우리의 필요 밖에는 없다, 우리의 소원 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기독교적 기도가 아니란 말이예요. 그게 바로 기복적인 기도예요.
우리가 내 필요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앞서서 정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일에 관심을 가질 수가 있느냐?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으시고 그의 통치의 영광이 이 땅에 모든 영역 속에서 드러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일에 내가 정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느냐? 그래서 기도에 관한 본질적 정의 하나는 기도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역을 실현하는 혹은 하나님의 사역을 성취하는 방편이 된다는 사실이예요.
여러분이 우리교회에 와서 성경공부를 하시다 보면 기도를 배우는데 그때마다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는 성경구절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이야말로 기도의 정의를 가장 아름답고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스겔 36장에 나오는 말인데요. 36장 37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에스겔 36장을 펼쳐보시면 1절부터 36절까지 시온의 회복의 약속입니다.
자, 저 바벨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시온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시온의 땅에 다시 강이 흐를 것이고, 백합화가 피어날 것이고, 사막이 다시 새로운 땅으로 개간 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내가 반드시 그것을 이루겠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고요. 에스겔 36장 37절에 보시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그래도 내 백성 이스라엘 백성이 이와 같이 이루어 달라고 나에게 “구하여야” 할지라. 할 수 있는 말이예요.
하나님이 시온의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내가 이루겠다, 그러면 이루시면 될 것 아니예요? 하나님 혼자 하시면 될 것 아니예요? 그런데 시온의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래도 내 백성이 나에게 이렇게 이루어 달라고 구하여야 한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기도가 뭔 줄 알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시온의 회복을 약속해 놓으시고 성경은 약속의 책이예요. 놀라운 약속들이 있단 말이죠. 하나님은 그 약속을 해 놓으시고 기다리신다는 거예요. 뭘 기다리실까요? 저와 여러분이 기도하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의 액션이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가 약속하신 바를 그가 계획하신 바를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 주신다는 것이예요.
그렇다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란 단순히 내 생각과 소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기도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방편입니다. 내가 기도할 때 나는 하나님의 일에 파트너가 되어, 동참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의 기도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펼쳐 가십니다.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까?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 간다. 여기에 Christian prayer, 기독교 기도에 아주 중요한 정곡의 핵심이 있는 것이예요.
기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자, 기도의 의미 무엇일까요? 첫째로 저는 기도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라고,
자 기도란 무엇일까요? 둘째로 기도는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이라고.

세 번째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오늘 주기도문에서 배울 수 있는 기도의 의미, 기도는 셋째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자, 주기도문의 전반부는 당신, 즉 하나님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마는 후반부는 다시 우리의 필요로 돌아옵니다. 우리의 필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또 그것에 대해서 도움을 구하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물론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의 뜻이 펼쳐져 가고 이루어져 간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중요한 사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의 일상적인 필요에도 관심이 있어요. 그것에 대해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 어떤 영역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할까요? 세 가지 영역에서, 세 가지 영역.
첫째, 일상적 생존을 위해서 우리의 일상적 생존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둘째로, 관계적인 평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영적전쟁 신령한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자, 어떤 면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돼요?
첫째 일상적 생존을 위해서, 그것이 어떤 대목입니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자,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뿐만 아니라 우리는 관계적 평화를 위해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대목입니까?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또 뿐만 아니라 우리가 영적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또 어떤 대목입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저는 이 세 가지 영역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가장 필수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일상적 생존, 우리가 육체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죠. 하나님께 양식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에 대해서 냉소적인 어떤 사람은 이렇게 비판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한다고 양식이 하늘에서 떨어지니? 물론 기도하는 그 순간 하늘에서 양식이 떨어지지 않을지는 몰라요. 우리가 기도란 것은 곧 기도한 그대로 어떤 사건이 내 눈앞에 어떤 제품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기도가 하나님이 약속한 그대로 진지한 하나님 앞에서 약속의 사건이라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가 양식을 얻을 수 있는 에너지 주시고 상황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기도는, 성경이 가르치는 성서적 기도는 우리의 기도에서 책임 있는 노력을 그 다음에 요청해요.
그러니까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상식적 기도가 아니지요.
얼마 전에 우리가 수해가 있었는데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수해를 입었어요. 그래서 지붕으로 대피했습니다. 물이 막 차 올라요. 그런데 이 사람이 크리스천인데 상당히 엉뚱한 생각을 가진 크리스천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붕에 올라가자 말자 기도를 시작합니다. “하나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낼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왔사오니 기적을 일으키시사 이 지붕에 서 있는 저를 구출해 주시옵소서”
자, 그 마을이 거의 물에 잠기면서 이제 구명 보트들이 당도합니다. 그래서 여기 저기 사람들이 구명보트를 타고 나갑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에게 구명보트가 네 번씩이나 왔는데 거절하면서 나는 괜찮다고, 내가 기도했으니까 하나님이 기적을 주실 것이라고,
자,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이 계속 차 오르면서 이 사람은 물 속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좀 억울했겠죠? 그래서 돌아가시자 마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 앞에 이렇게 질문을 했답니다.
“하나님! 제가 기적을 일으켜서 저를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나타내어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 왜 기적을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기적을 안 주었니? 네 번씩이나 기적을 베풀었는데”
“뭐가요?”
“내가 네 번씩이나 네 기도를 응답하고 너에게 구명보트를 보내지 않았더냐?”
기도라는 것은 기도에 따르는 상식적인 우리의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는 것이예요. 다시 말하면 예를 들어서 우리가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 나타나게 해 달라고, 그러면 그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가치가 나타날 수 있도록 우리는 책임 있는 노력을 해야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기도했다면 그 기도에 합당한 노력을 이제 하나님이 주시는 에너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장에서 땀 흘리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도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신실하게 응답하신다! 이것을 믿어야 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일상적 생존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아주 중요한데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요.

또 하나,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고 주님은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관계의 평화예요. 우리가 먹을 것이 있어도 아무리 배불러도 여러분이 인간관계의 상처와 갈등을 경험할 때 얼마나 아프세요 살맛이 안 나잖아요? 인간관계가 왜곡되고 갈등과 미움과 분쟁과 어려움이 생길 때 우리는 얼마나 아픔을 겪어야 합니까? 그래서 주님은 관계의 평화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못지 않게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하나님 우리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나님 내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요 그리고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하여 주신 것처럼 저에게서 상처를 입혀준 사람도 내가 용서할 수 있게끔 해달라고, 내가 용서를 받고 또 용서를 하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또 사람을 향하여 누릴 수 있는 마음의 당당한 평화, 이것은 행복을 위해서 얼마나 필요한 것입니까? 만약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간단할 것입니다.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요. 기도해 보세요. 아무리 그 상처가 아파도, 예리해도, 그 사람을 품고 기도해 보세요. 그를 용서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어요. 영적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예요. 우리가 정말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영적 전쟁에서 승리가 필요합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죄 짖고 있다면 시험 속에 빠져있다면 우리가 악함 속에 빠져있다면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아, 나는 괜찮은데?” 거짓된 평안이예요. 거짓된 행복이예요. 우리가 죄의 악에서 탈출함이 없이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누가 우리를 악 속에 빠트립니까? 성경은 그것이 악한자의 계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어떤 번역에는 그냥 악에서 구하옵소서가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구하옵소서” 어떤 사본에는 그렇게 되어있어요. 악한 자에게서, 우리로 악을 경험하게 만들고 악에 빠지게 만드는 악한자의 공격에서 나를 지키고 죄악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이 싸움에 승리의 비밀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우리는 결코 악한 자와의 싸움에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고 산다는 것, 이것은 얼마나 인생에 대해서 위태로운 모험인지요. 우리가 기도 없이 산다는 것, 하나님의 도움을 거절하고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수년 전에 세상을 떠나간 그 스위스의 라브리를 중심으로 해서 공동체 운동을 했던 프랜치 쉐이프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그의 책 가운데서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오늘 우리 시대에 사람들을 죄와 악 속에 물들게 하는 가장 강력한 기독교의, 반 기독교적인 이단 운동이 하나 있다. 나는 그래서 이게 뭐 여호와 증인을 얘기하나? 몰몬을 얘기하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그 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 기독교 신앙을 본질적으로부터 위협하는, 그리고 많은 사람의 진정한 행복과 경건을 빼앗아 가는 무서운 이단 사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속적인 인본주의다, 소위secular humanism이다. 세속적인 인본주의. 오늘날 문화와 철학, 삶의 모든 영역 속에 이 세속적 인본주의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고 그는 경고합니다.
지나간 6월인가요? 티모시 맥베이 라는 사람, 미국의 오클라호마시티에 그 주 청사를 폭발물로 습격해서 168명인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사람이 독극물 주사로 사형을 당하는 뉴스가 전 세계에 보도되었죠. 끝까지 자기는 뉘우치지 않는다고,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그러면서 그가 죽기 직전에 할 말이 있는가? 라는 말 앞에 영국의 윌리암 어네스티 헨리의 시를 인용하면서 죽어갔다는 사실이 전세계에 보도되었습니다. 그 시의 내용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내 운명의 주인, 그리고 내 영혼의 선장”
얼른 겉으로 들으면 굉장히 멋있는 소리 같지요? 그런데 이것이 바로 여러분, 세속적 인본주의의 모토라는 것을 아세요? 나는 내 운명의 주인, 그리고 내 영혼의 선장.
이것은 철저하게 반 기독교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예요 하나님이십니다. 내 영혼의 선장도 하나님이십니다. 세속적 인본주의의 사고는 우리의 생각의 틀 안에서 하나님을 추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런 세속적 인본주의 사상의 결과로서 그런 일까지 저지를 수가 있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필립 얀시가 “크리스챤 잇 투 데이” 라는 잡지에 기고를 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 티모스 맥배이의 사건, 그의 불행은 단순히 인생을 잘못 살아왔던 한 청년의 비극이 아니라 바로 세속적 인본주의에 고무된, 그 이단사상의 피해자로 우리는 이 사람을 보아야 한다고.
그러면서 얀시는 이런 글을 남깁니다. 당신이 불행해 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신을 추방하십시오. 신을 거절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거절하십시오. 그러나 정말 행복해 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당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복귀시키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것을 배우십시오. 나의 연약성을 내가 안다면, 내가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깨닫는다면 나는 그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호흡할 수도 없는 존재 생존이 불가능한 존재, 따라서 그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며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쓰임을 받아 하나님의 역사를 펼쳐 가는 그 보람 속에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기도를 배우십시오. 기도란 바로 나의 도움에 대해서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할 뿐만 아니라 내 인생이 하나님께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는 설레이는 모험, 그것이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모험이요 기도의 의미인 것입니다.
중세기에 그 유럽의 어떤 수도원에 수도사들이 기도하고 있었든 프레어 챔버, 기도방이 있었는데 기도 방에 현판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그것이 요즘 많이 소개가 되고 있어요. 그런데 굉장히 소개되면서 변질이 되었어요. 아마 제가 번역한 것이 오리지널에 굉장히 가까운 내용일 것입니다.
본래 그 제목은 이런 제목입니다.

“네 삶이 가난해도 나를 원망치 말라”
네 삶이 가난해도 나를 원망치 말라
너는 나를 주라고 부르면서 나를 주인 삼지 않았고
너는 나를 진리라고 하면서 내게 배우지 않았고
너는 나를 빛이라고 하면서 나를 바라보지 않았고
너는 나를 길이라고 하면서 나를 따라오지 않았고
너는 나를 능력이라 하면서 나를 의지하지 않았고
너는 나를 응답이라고 하면서 기도하지 않았나니.

제목이 뭐예요 제목이? “네 삶이 가난해도 나를 원망치 말라”
오늘 삶의 창백함은 바로 기도의 상실에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기도를 배우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무더위 속에서 다시 한번 사랑하는 우리의 아빠 되시는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 그리고 우리를 섭리하시는 그분 앞에 나와서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저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기도를 배우는 그 위대한 연습 속에 들어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다 일어나셔서 우리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주기도문을 찬양하시겠습니다.
우리 가사의 뜻을 깊이 기억하면서 기도하시면서 주기도문을 찬양하시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하사
주님 나라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 지이다
일용할 양식 주시고 우리들의 큰 죄 다 용서 하옵시고
또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구원하소서
주여 주의 나라 주의 권세 주의 영광 영원히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전능하시고 또 사랑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한평생을 살 것을 기대하시며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초청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한결같은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총과 성령님의 우리와 함께 하심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기도 속에 한평생을 당당하게 건강하게 살 것을 기대하시는 성령님의 평안케 하심과 기도로 인도하심이 오늘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의 일생을 살기를 작정하며 삶의 자리로 떠나가는 당신의 백성들의 걸음마다 삶의 장마다 기도의 거룩한 사역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복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