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규목사 (광주중앙교회)

계절의 여왕 5월입니다. 산천초목이 푸르러 사람들 마음까지 깨끗하여지는 듯 합니다. 오늘은 유난히 가슴에 단 꽃 때문인지 성도님들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어버이날 꽃을 달게된 이유가 더욱 아름다운데, 미국 웹스터 마을에 쟈비스 부인이 있었는데, 천성이 자애롭고 다정해 동네어린이들을 모르는 아이가 없을 만큼 존경을 받는 부인이었습니다. 마을의 모든 어린이들이 쟈비스 부인을 자기 어머니처럼 따르게 되었습니다. 쟈비스 부인이 병들어 죽게되었을 때 학생들은 추모하기 위해 교회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쟈비스 부인의 딸 안나는 자기 집 뜰에 핀 하얀 카네이션 한아름을 바치게되었고 매년 이런 행사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버이날 꽃을 단 부모님의 마음이 밝지만은 않습니다. 왜일까요? 경제적 어려움일까요? 이보다 어려웠던 시절을 겪으신 분들입니다. 정치적 어두움 때문일까요? 어느 시대나 겪는 문제입니다. 사회적 문제입니다. 이것이 사람 사는 맛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
연이어 들려지는 사건사고들이 우리의 귀를 의심하게 합니다. 몇 해전 전남완도에서 아버지를 양주에 수면제를 타서 살해한 사건이라든지 대학교수 아버지와 할머니를 아들대학생이 무차별적으로 난사한 경우나, 대학생 아들이 아버지 어머니를 살해해 토막을 낸 사건 등은 이 시대가 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우리의 형상을 닮은 아이들을 낳은 것은 축복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사랑의 대상으로 모습을 반영하며 모든 일에 동료, 보조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준을 잡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아버지다운 아버지 되기가 힘든 시대가 되어졌습니다. 아빠의 이름을 아빠라고 부르다가 바빠가 되고, 바빠 라고 계속 불려지다가 나빠가 되어진다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의미를 던져줍니다. 실제로 미국 코넬대학최근조사에 따르면 미국 아버지 자녀와 같이 놀아주는 시간이 하루평균 30초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조사자료입니다.

아버지를 알기 위한 시간이 부족합니다. 어버이인 우리들의 진정한 아버지를 알아야합니다.
천하만국을 다스리시며 통치하시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요즘 일어나는 사건으로만이 아니라 성경에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몰라보는 아들이어서 아버지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하여 군대를 조직하여 대항하고 아버지 군대와 싸우다 나무에 매달려 처참한 죽음을 맞게되었습니다. 지금도 압살롬의 무덤을 지날 때마다 돌을 던집니다.

아버지를 모르는 자는 범죄 하게되고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이십니다.
이사야 64장 8절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 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말라기 2장 10절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의 지으신 바가 아니냐...”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본래 우리는 아버지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범죄이후로 파괴되어 하나님과 우리사이가 단절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은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를 죄로 인하여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라는 말씀과 에베소서 2장 3절에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자들은 그 진노의 자녀이며 아비가 마귀이다 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범죄한 인류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시고 로마서 8장 15절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형상을 잃어버린 진노의 자녀들에 아버지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며, 가르치시며, 사랑하십니다.
부족한 것을 채우시고, 잘못할 때는 징계하시고, 우리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되십니다.

사도들을 통하여 우리가 아버지를 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감각세계 내에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과 매일 매일 생활하였습니다. 주님의 모든 사역을 보았고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들의 모든 생각은 예수님의 실재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 외에는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항상 아버지에 관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말씀이었고, 계속적으로 그가 불렀던 것은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 항상 두 번째 자리로 물러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행위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들 가운데 세워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직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하나님의 거룩하심만을 철저하게 주입시키셨습니다. 그분의 온유, 긍휼, 인자하신 성품은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놀라운 사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손길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위대한 사역들도 소규모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위로하신 예수님은 살아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은 봄철 뿌린 씨앗 몇 알이 그의 모든 자녀가 먹고 살아갈 가을의 풍성한 수확으로 바꾸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능력을 영화롭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최고의 목적은 아버지를 보여주는 것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어떤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은 마음을 읽는다는 것과 공감대를 갖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계속 변해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보는 눈으로 산 속에 웅장한 바람소리를 들으십시오. 호수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보십시오. 흘러가는 은빛 시냇물을 보십시오. 꽃잎으로 뒤덮인 들판을 보십시오. 아름답고 선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알면 세상은 살맛 나는 세상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분이십니다.

왜 하늘에 계신다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늘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을 의미합니다. 시편 115편 3절에는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그리고 역대하 20장 6절에는 “가로되 우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아니시나이까 주의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능히 막을 사람이 없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땅의 것은 모두가 불완전합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은 모든 것이 가능하고 완전하시며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하늘은 하나님이 계시는 대표적인 장소입니다. 안 계시는 곳이 없습니다. 시간도 공간도 받지 않으십니다.
땅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본보기가 되어 인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는 나타내고 모든 것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을 떠올리도록 해야만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돌보심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시는 모든 축복과 기쁨의 좋은 설명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모는 의식적이고 분명하게 목표를 세워야 합니다. 자녀가 자신을 밟고 하늘의 아버지께로 올라갈 계단을 지녀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스럽고, 거룩한 이름으로 자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으면 부모의 밝고 생동적인 행복하며 경건한 모습이 아버지로써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땅에 있는 부모는 누구입니까? 누가 이러한 일을 할 것입니까? 한두 명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웨스트 민스터 요리문답 제 124 문답에는 “가정에서 육친이 아버지이시고, 연령적인 윗사람이 아버지이시고, 은사적으로 윗사람이 아버지이시고, 교회에서 다스리시는 성직자가 아버지이시고, 나라의 관원이 아버지이시고, 가르치시는 교사와 직장 웃어른이 아버지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부모로서 맡겨준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 자녀를 범죄 하게 만들고 하늘의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경찰국의 발표에 있습니다. 내용에 따르면 부모가 자녀를 범죄자로 만드는 9가지 문제점입니다.
1. 어려서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을 사주어라! 그러면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범죄가 싹틀 것이다.
2. 자녀가 나쁜 말을 할 때 웃어넘겨라! 그러면 악한 말을 하는 어른이 될 것이다.
3. 자녀에게 아무런 영적인 훈련과 교육도 주지말고 크면 자신이 스스로 알아서 잘할 것이라고 내버려두어라
4. 자녀가 잘못된 일을 내버려두어라 그러면 자동차를 훔칠 것이다
5. 자녀에게 TV, 책, 아무거나 보게 하라 그러면 마음은 쓰레기통이 될 것이다.
6. 자녀 앞에서 부부싸움을 자주 하라 그러면 자신들이 이혼하면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7. 달라는 대로 용돈을 줘라 썩는 길을 쉽게 터득할 것이다.
8.먹고싶은 것 다 주고, 하고싶은 것 모두 해줘라 그러면 인생의 실패자가 될 것이다.
9. 남과 다툴 때 언제나 자녀편이 되어라 그러면 사회에서 버려진 자가될 것이다.
이 내용을 듣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부분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너무 많아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너무 적어 궁핍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분이 주시는 고난과 어려움은 모두가 나를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자녀에게 가르칠 아버지의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하는 부분을 놓고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것 중 아버지의 영이 이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믿을 수밖에 없고, 믿고있으면 받을 수밖에 없고, 받으면서 성령 안에서 굴복하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에게부터 자녀를 축복할 생명의 샘물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입니다. 하늘에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을 높이기 위해 대사로 보내어진 사람들입니다. 자녀들을 아버지의 말씀으로 훈련하며 가르쳐 성결하게 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의 가정은 하늘의 아버지를 둔 천국의 가정이 될 것입니다. 두 정원이 있습니다. 한쪽정원은 자유롭게 자라도록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 결과 잡초가 무성하고, 풀들이 나고 땅은 굳어져 나무를 형편없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쪽 정원은 곡괭이로 땅을 파고 그곳에 물을 주고 날마다 풀을 매고 부드럽게 땅을 일궜습니다. 그 결과 열매를 많이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정이라는 정원을 주셨습니다. 자녀라는 나무가 잘 자라게끔 하려면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은 자신이 직업상 군인이라는데 긍지를 갖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자신의 아들의 아버지인 것에 더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희망이 있다면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이 전장에서의 자신을 기억하는 것보다 가정에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하고 단순한 기도를 반복하는 아버지로서 기억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기억될 때 하늘의 아버지를 얼마나 잘 보여주었는가를 자신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택하시고 부르셔서 자녀가 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라는 단어는 선교적 언어가 개입되어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을 바라다보는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같이 되지 말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뜻을 받아 빨리 전도해야합니다.

개인의 유익과 공익보다 더욱더 남녀, 빈부, 민족, 귀천 모두 초월하여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만합니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아들이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세상가운데 있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 되돌아왔습니다. 뜻밖에 아버지는 자신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형님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아버지의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큰아들은 오히려 아버지에게 원망의 소리를 내어놓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세상가운데 고통 하다가 찾아 나온 형편없는 모습의 둘째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하신 것입니다.

서울 마포구 신수동에 사는 박종의라는 사람의 글입니다. 깡패생활과 불량배의 삶을 살아가던 그에게 술과 친구이고 노름이 벗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생활의 변화를 마음먹고 해병대에 지원하여 군 생활을 마쳤으나 특별한 기술도 없고 재주도 없어 또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러기를 8여년 가까이 하다가 월남에 가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월남에 자신이 기술이 있다고 속여 가게되었습니다. 그러나 회사마다 기술 없는 청년을 받아줄 일이 만무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게된 것이 여러 번 그러다가 가까스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상하고 아슬아슬한 일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한번은 일하는 미국인회사 사람이 작업장에 떨어져있는 헬멧을 씌워주더라는 것입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꽝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철판이 크레인 작업부주위로 공중에서 떨어져 자기 머리정통으로 부딪혔습니다. 철모가 푹 파여지고 목덜미가 부러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으나 그 뒤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3주일 후 당직일 때 타고있는 배의 갑판에 콘크리트 하라는 명령을 받고 마지막 손질을 하다가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어 다녀왔는데 매끈하게 손질해 놓은 시멘트자리에 조그만 구멍이 뚫려있어 방향과 각도가 놀랍게도 바로 조금전 자기가 일하던 자세로의 가슴 한복판이었습니다. 이때 문뜩 자기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시는 어머님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무릎꿇고 회개하며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찾아 읽은 말씀이 바로 이사야 44장 22절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 개의 사라짐같이 도말 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대신하여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만큼은 모든 것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직 한 영혼도 전도하지 못하고 있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곳이 그곳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슴에 사랑합니다 하는 기도의 꽃을 달 수 있는 시간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묻겠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시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하나님, 다윗을 도와 골리앗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 멸망 받을 인생을 살리기 위해 독생 성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