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영목사 (부천제일교회)

신학대학에서 후배를 양육하며, 교회를 잘 섬기는 한 노(老)목사님께서 2000년 5월 29일 간암이라는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동년 10월 29일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까지 그 아름다운 여정을 적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그 책의 이름은 ''빛, 색깔 그리고 또한 공기''라고 하는 이름의 책입니다. 그 책에 이러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에도 무엇인가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흔히 스쳐 가는 빛, 색깔, 공기마저도 새롭게 느끼고 계셨습니다. 내가 언제쯤 평범한 햇살 하나, 색깔 하나, 공기하나를 감사하는 눈빛으로 바로 본 적이 있었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넓고 크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랑을 경험하고 살지만, 그것을 진정 값어치만큼 느끼고 누리고 감사하며 산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초우주적 상관관계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늘이라고 하는 말은 무한, 측량할 수 없는, 우리의 이해로서는 불가능한 차원을 하늘이라고 말합니다. 그 하늘을 만드시고, 그 하늘을 다스리시고, 그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상관관계에 의한 자기 정체,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초우주적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우리는 지금 그 경험을 알고 있으며, 체감하고 있으며, 또한 그 가치만큼의 어떤 희열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물음을 묻고 싶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다.'' 이것은 사람이 더듬어 연구한 결과가 아닙니다. 어떠한 사람의 상상에 의한 일도 아닙니다. 어떤 신화의 자락을 잡고,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위임받은 축복입니다. 하늘에서 온 사람, 단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참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본문을 통해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르고, 그 분과 관계를 맺고, 그 분에게 기도하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였고, 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위임권을 우리에게 위임해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내가 아들 될 자격이 있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들 될 만한 공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이 일을 증거 하시는 은혜에 의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부성을 상실하고 살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스러움을 상실하여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스러움을 상실하고 산다는 말은 아버지적 사랑을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적 사랑은 아예 수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사랑, 즉 하나님 아버지의 부성적 사랑의 속성은 공의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들을 봅니다. 열심히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고 해봐야 생리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먹는 일에, 입는 일에, 그리고 집을 짓고, 장가가는 일에만 열심히 몰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의 영혼은 다 하나님의 영을 저버린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죽은 자로 보시고 있습니다. 급기야 하나님은 물로 심판하시기로 마음으로 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6장에 기록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는데 만드신 목적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10절 말씀에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하는 말씀으로 시작하셔서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한다.''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어긋나는 인간들은 결국은 존재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40주야로 물을 퍼부어서 그들을 모두 심판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받고 하나님의 영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아의 가정이었습니다. 이 여덟 사람은 햇빛이 쨍쨍 비치는 한 낮에 동산 위에서 열심히 방주를 건축했습니다. 의의 사람입니다. 의의 사람이 의의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불의를 심판하여야 합니다. 그런고로 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와 닿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심판을 미움, 저주로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하나님의 택정하신 사람에게는 사랑이라는 사실이 완연히 계시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의인이 열 사람 있으면, 용서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는 그러한 하나님은 아니다. 나는 공의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의인 열 사람만 있으면, 그 성의 모든 사람을 모두 용서하리라.'' 하나님께서는 황급히 소돔과 고모라로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러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의인을 찾아서 나섰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의인 열이 없었습니다. 유황불로 심판했습니다. 그 심판의 사적은 오늘 사는 하나님의 자녀, 우리 위해서 그 심판은 사랑으로 와서 역사로 주어진 것입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들이 의롭게 살고, 악한 자를 심판함이 내가 너희에게 사랑을 증거 하노라.''
여러분,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은 우리에게 또한 시험으로 다가오게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100세에 얻은 아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물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번민했을 것입니다. 엄청난 갈등도 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관계를 끊고, 내 분신인 아들과 함께 도망하고 싶은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모리아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은 번제물을 미리 준비하시고,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한 연고는 아브라함에게 더 풍성한 언약과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축복을 담을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은 시험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중에 시험을 당하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시험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분이 있다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40주야를 주린 후에 하나님이 예수님의 손을 잡고, 사단에로 끌어갔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시험을 받도록 했습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식욕, 젊은이에게 가장 중요한 부귀영화, 인간사에서 가장 추구되는 권력, 이 모든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이겼습니다. 이 때에 예수 그리스도에게 역사 하는 성삼위의 역사와 그는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험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시험이 나에게 다가왔다고 하거든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시험하심을 감사합니다. 나는 이 시험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겠습니다. 아버지적 사랑으로 다가오는 이 시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용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될 때에 성숙한 신앙의 사람으로 자라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은 우리에게 인격적 결단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구하라 주실 것이요, 두드리라 열릴 것이라, 찾으라 얻을 것이요.''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놓고, 한 젊은이가 이렇게 질문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사랑이신데 꼭 기도해야 주시겠는 심보는 뭐요? 그냥 주면 되잖아요. 다 아시는데 굳이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가 뭐가 있나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꼭 기도를 하게 하시고,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는 중요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으로 보십니다. 만약 필요하면 채워준다면 이것은 기계적 사랑입니다. 만약 구치 않는 것을 일방적으로 주시면 이것은 군주적 사랑입니다. 인격적 사랑은 그로 하여금 스스로 원하도록 말하고, 또 하나님에게 말해서 얻어야 그래야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주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사건 이후에 광야에서 시내산 아래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인격적 관계를 만들어 가는 기초였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대로 살라.'' 여러분, 계명 하나를 예를 들어볼까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부모를 공경해야 행복합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부모 공경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치 아니하면, 행복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행복을 느끼는 것은 마음입니다. 육신적으로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경제적으로도 부담이 된다 하더라도 경제와 육신의 노고를 투자하고, 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것을 탐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왜 이웃의 것을 탐합니까? 주어진 것을 귀중한 줄로 모르고, 주어진 것을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웃의 것을 탐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의 것을 탐하는 자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값어치 없이 여기는 우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여러분, 내 아내가 아름답지 않아서 내가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줄로 아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 심령이 비뚤어져서, 내 심령이 아름답지 못하기 때문에 내 아내가 아름답지 않게 보일 뿐입니다. 내 자녀가 무능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 욕심의 눈이 어두워 내 아들이 아들로서 할 수 없는 것을 아들에게 요구함으로 무능합니다. 수능 고사가 끝났습니다. 자녀가 받은 점수는 자녀의 능력만큼 받은 것이예요. 절대적인 점수예요. 다른 아이와 비교하지 마세요. ''김 과장 아들은 몇 백 점 받았다는데 너는 왜 이 따위이냐?'' 그 아이가 김 과장 아들인가요? 내 아들이예요. 내 딸이예요. ''너는 그만큼 받음이 너로서는 족하다.'' 그대로 인정하세요. 그래야 되는 것이예요. ''나에게 주어진 자녀, 너는 최선을 다하여 받은 것이니 하나님께 감사하라.'' 내 자녀, 절대적인 존재예요. 절대적 존재가 딴 점수도 절대적 점수요.
또 말씀하기를 ''간음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이제는 종용이 된 줄로 압니다만 아침에 방영되는 홈 드라마 ''외출''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드라마를 보면, 남편이 재미롭지 못한 행동을 합니다. ''너 그렇게 한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 부인이 그만 또 가정을 박차가 나갑니다. 나갔더니 남편보다 젊은 남자가 있어서 그래서 그와 사랑을 했더니 행복해지더라는 드라마입니다. 이것은 망조가 든 드라마입니다. 이것은 불행으로 가는 열차를 탄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현재 나에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면 그대로 지켜야 합니다. 간음은 불행이요, 간음은 죄요, 간음은 멸망입니다. 육체를 불태워서 영혼을 완전히 소사하는 무서운 죄가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하기를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않아야 행복해 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명을 주셨는데 계명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장 쉬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쉬운 계명의 길로 들어가면, 행복의 열쇠가 손에 쥐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적 사랑, 그것이 바로 계명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지킬 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온 부성적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계명은 번거로운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고마운 우리의 삶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은 징계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을 사는 사람들을 보면, 징계를 미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 징계는 저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여성적 사회, 여성적 가정, 여성적 교회는 징계란, 불필요한 수고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징계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징계하지 않는 자녀는 사생아다.'' 그랬습니다. 사생아는 사랑 받지 못할 존재가 바로 사생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필시 적절한 징계를 하시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두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건은 출애굽 사건, 한 사건은 바벨론에서 귀환하는 사건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이제 너희들이 회개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못하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드디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 바벨론으로 모두 포로로 잡아가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자기를 징계하십니다. 느브갓네살을 통한 군사들이 들어와서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상징인 그 거룩한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완전히 훼파시킵니다. 하나님의 불명예입니다. 하나님의 패배입니다. 하나님의 수치입니다. 어쩜 하나님 자신이 그야말로 부끄러운 사건을 하나님 스스로 허락하고 있습니다. 징계하는 아들을 보면서 기뻐하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성적 사랑이기에 징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신이 먼저 징계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하게 됩니다. 그 귀환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우리의 영적 성화를 의미합니다. 채찍, 징계 없이는 영적 성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징계로 육신을 쳐서 영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징계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징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참 우리를 부성적으로 품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또한 징계를 받을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차원에서, 우리의 이기심으로, 우리의 기준에서, 현재 중심으로 판단하기에, 육적으로 모든 것을 구분하기에 하나님의 징계를 그렇게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부성적 사랑은 침묵하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침묵하면, 없음, 혹은 불가, 혹은 무관심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침묵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침묵은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시간을 침묵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창조하심의 역사가 되기 이전 시간은 침묵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긴 침묵을 창세기 1장 2절 말씀에는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더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이루시기 위해서 무한한 시간 동안 홀로 일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창조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 이후에 400년 동안 하나님의 종들이 출현하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메시지가 없습니다. 계시가 없습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이 400년 동안 침묵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광야에 한 증거자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하는 말이 ''세상 죄를 지고 어린양을 보라.'' 400년 동안 침묵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높이셔서 차원을 달리 하셔서 하나님이 사람되어 우리와 함께 있게 하는 역사를 창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되어 이 땅에 왔으니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십자가를 면케 하옵소서.'' 하나님은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의 기도를 들으시면서 하나님은 한 마디도 아니하셨습니다.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십자가를 면케 하옵소서.'' 하나님은 그 때도 말씀이 없으십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기도의 제목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겠지요?'' 이 때도 하나님은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는 행패하는 자들에게 붙잡혔고, 말없이 문초를 당하고, 빌라도 앞에 그야말로 불공평한 심판을 받고,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아가며, 십자가에 높이 달려 가시 면류관을 쓰고, 피를 흘려도 하나님은 말씀 한번 하시지 않았습니다. 결국 죽음이라 하는 어두움으로 내려갔을 때, 거기는 벌써 하나님이 혼자 준비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에로 올리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기록하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만유를 그 발아래 두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버림 것 같고, 하나님은 예수를 완전히 포기한 것 같고,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있지 않은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침묵으로 사랑하시사 그로 하여금 모든 만유를 그의 발아래 두는 은총을 입게 하셨던 것입니다. 한국의 아버지는 본래 침묵적 사랑을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일찍이 논밭에 일하러 가실 때에도 말씀이 없으세요. 언제 새벽에 일하러 가셨는지 자녀는 알 수 없어요. 하루 종일 땀흘리며, 수고하고, 노력하고 집에 들어오시는데 그 때도 말씀 없이 들어오세요. 그리고 조용히 사랑방에 계세요. 아이들이 서로 치고 박고 온 집이 북새통이 나도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조용히 계세요. 어머니가 하도 견딜 수 없어서 ''제발 애들을 좀 어떻게 해보세요.'' 그래도 말씀이 없으세요. 그 이후에 아버지의 높은 뜻을 압니다. 형제가 서로 싸우고, 서로 치고, 서로 빼앗고, 서로 화해하기도 하고, 같이 울기도 하고, 이러는 사이에 사회성을 배우는 것이지요. 형제간의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길러져 보내는 것이예요. 아버지는 침묵하셨지만, 훌륭한 교육을 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너무 말이 많아요. 자기를 변명하는 말,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거짓말하는 말, 자기를 미워하는 말, 지나치게 자기 이기적인 말들이 너무 많아요. 오늘의 사회는 너무나 치우쳐 모성적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미시적인 것을 좋아하고, 주관적인 이익을 좋아하고, 당장 편한 것을 좋아하고, 그리고 지금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회, 이것은 지나친 모성적 성격을 지닌 사회입니다. 오늘 교회도 그래요.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아요. ''내가 이러 이러한 것을 기도했더니 즉각 이루어주셨다.'' 그 기도는 거의 썩어질 현세적인 것들입니다. ''내가 바랬더니 하나님이 이루어주셨다.'' 이것을 사랑으로 여기지,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면, 사랑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소위 부성성이 상실된 오늘의 은총론과 사랑의 이해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예 어머니가 교육을 전담하고 있지만, 지금 자녀들이 공의롭거나 의지가 강하거나 그리고 포괄적인 이해나 거시적인 어떤 자기에 대한 평가나 계획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합리성이 없는 자녀가 자라고 있어요. 이것은 매우 미래에 불행스러운 사건을 만들어갈 뿌리가 되는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침묵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참으시는 것이예요. 당장 심판하셔야 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야겠지만,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때까지 침묵하시면서 참으세요. 우리는 다음 주일날 더불어 예배를 통해서 침묵하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명 구원의 책임을 완수해야 할 그 책임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부성적 사랑, 초우적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여러분, 실제를 체험하시고, 실제의 상관성을 통한 자기 정체를 귀히 여기시면서 하루 하루를 그 온전한 사랑, 부성적 사랑과 모성적 사랑을 함께 받으면서 건강한 영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