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전령자가 되십시오 인쇄  


  
지난 월요일 저의 홈페이지를 보고 한 남자분이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이은경 집사님의 백혈병 치료에 쓰라고 헌혈증서 50여장을 전달하면서 2년 전에 백혈병으로 투병하다가 하늘로 간 아내가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5년 동안 백혈병으로 투병할 때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하나님! 살려만 주시면 교회도 짓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 일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아내를 빨리 하나님 곁에 두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하나님 곁으로 갔을 때 그분은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신앙을 버린 것처럼, 하나님을 버린 것처럼 살았습니다.

누군가 "참된 하나님 신앙은 기적이 사라진 곳에서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기적이 있는 곳에서 신앙이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기적은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오히려 진짜 하나님 신앙, 예수님 신앙은 기적이 사라진 곳에서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잠시 방황하는 것을 누가 욕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잠시 방황했지만 마음속에 있는 신앙의 흐름을 어떻게 거부합니까?
얼마 후에 그분은 정신을 차리고 아내가 평소에 지은 창작성가를 모았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사랑했던 아내를 추모하며 그 창작성가를 CD로 만들었고, 이번에 헌혈증서와 함께 CD 100장을 이은경 집사님을 위해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자동차를 몰고 분당으로 오는데 이런 기도가 나왔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 아내는 데려가셨지만 대신에 이분은 건강을 회복시켜주십시오."
그처럼 전혀 알지 못하는 분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마음이 편해짐을 느낍니다. 남을 위해 긍휼한 마음을 가지니까 그의 마음을 성령께서 위로해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물었습니다. "실례지만 이은경 집사님이 몇 살이죠?" "서른 둘입니다."
그리고 아무 대답도 없었는데, 아마 비슷한 나이에 주님 곁으로 간 것 같았습니다. 그분이 떠나고 CD 안에 수록된 14곡의 성가를 끝까지 다 들어보았습니다. 백혈병과 투병하면서 지은 곡이라서 그런지 마음속에 깊은 감동이 전해졌습니다.

<인내의 기도>라는 곡에서 고(故) 김미희 집사님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여! 인내의 즐거움을 알게 하소서!
내가 당한 일이 고통이어도
내 마음이 칠흑 같을 때
나를 향한 당신의 뜻 알기까지 침묵하게 하소서!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을 때조차도
주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기에
그저 참고 기다리게 하소서!
내가 인내하여 주님 뜻을 이룰 수만 있다면
당신께 순종하게 하소서! 순종하게 하소서! (김미희)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생명이란 정말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 축복입니까?
우리는 한 생명의 가치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생명이 사는 일이라면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일본의 어떤 가정에 소아마비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소아마비 아들이 커 가면서 자신의 생애를 철저히 비관합니다. 견디다 못해 그 아들은 과도를 가지고 스스로 배를 찔러 죽으려고 합니다. 그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어머니가 아들에게 황급히 소리를 지릅니다.
"다다 이끼데 구래!"(다만 살아 다오!)

"아들아! 살아만 달라!"고 애원하는 이 어머니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어머니에게 무슨 소원이 있겠습니까? 아들이 살아 주는 것이 소원입니다.
지금도 그 한 가지 소원을 가지고 외쳐대는 부모들이 지금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에 비해서 우리의 소원은 너무 사치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런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시험에 들어 하나님을 멀리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모습을 보고 "너무 지나치구나!"라고 생각하시지 않겠습니까?
돈을 마구 쓰는 사치도 조심해야 하지만 지나친 영적 사치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이은경 집사님을 놓고 기도하는 것도 바로 그 기도가 아닙니까?
"하나님! 사랑하는 여종을 살려주기만 하세요!"
이렇게 생명을 위해 기도하며 우리는 지난 세월의 영적 사치를 반성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저 건강하게 살아만 주는 것에 대해서 먼저 감사하고, 어떤 경우에도 진급, 출세, 성공, 합격 등으로 감사를 저울질하지 말아야 하며, 정말 어려운 사람들을 향해 이제 우리의 따뜻한 시선을 돌릴 줄 알아야 합니다.

며칠 전에 10년 전 했던 스크랩을 정리하는데 서울 당산동 S 교회에서 있었던 5살 권혜영, 그리고 4살 권용철 남매의 장례식 기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아이들의 아빠는 회사 경비원으로, 엄마는 파출부로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의 엄마는 항상 하던 대로 파출부 일을 나가면서 지하 단칸방 문을 밖에서 잠그고 나가며 말했습니다. "혜영아! 동생 잘 봐! 엄마 금방 갔다 올게."
그러자 애들은 두 손을 싹싹 빌면서 항상 하던 대로 엄마한테 사정을 했습니다.
"엄마! 문 잠그고 가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앞으로 칼 가지고 놀지 않을게요."
마음이 아팠지만 할 수 없이 문을 닫고 갑니다.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지하 셋방에서 심심하니까 성냥을 가지고 불장난을 하다가 불이 나니까 어린 나이에 제대로 피하지도 못한 채 어이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각종 어려움으로 사회의 어둔 곳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어려움의 껍질을 탈출하고 나오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님을 이해하고, 우리는 그들을 이해하고 격려하고 사랑하고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가 사는 길이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관은 공존이라고 생각됩니다.
같이 사는 사회! 공존하는 사회! 서로를 긍휼히 여기면서 도와주며 사는 삶!
우리 모두 하나님이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존재임을 자각하고 사는 삶!
그래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존중하고, 서로 사랑하며 다같이 함께 사는 삶!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시고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아닐까요?

우리는 남을 행복하게 해야 내가 행복해지는 이 가치관을 추구해야 합니다. 사실상 한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에 대해 사랑의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책임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있는 그 처소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전령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따뜻함을 전하는 마음이 정말 잘 믿는 마음이 아닐까요?

아주 추운 겨울날입니다. 애들은 생각합니다. "개들은 어떻게 이 추위를 참을까?"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한 어린아이가 엄마 몰래 안 입는 옷을 들고 나갑니다. 그리고 마당에 있는 개를 꼭 끌어 안아주고 그 옷으로 개를 덮어줍니다. 이런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우리 믿는 사람들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아이들에게 "그 옷이 얼마 짜리인 줄 알고 그래!"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돈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안됩니다.
물론 그 상황에서는 "다음부터 몰래 그러지 말라!"고 따끔하게 혼을 내면서도 그 아이를 대견하게 보고, 그 아이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처럼 우리의 눈은 따뜻한 눈, 사랑과 긍휼이 넘치는 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눈을 가진 실천적 사랑이 영혼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능력이 됩니다.
사랑이 없는 눈, 사랑이 없는 말, 사랑이 없는 정의, 사랑이 없는 운동이 얼마나 많은 모순과 얼마나 많은 상처와 부조리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고위관리의 부인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전쟁이 일어나 왜군에게 잡히면 어떻게 하지?" 대부분의 부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혀를 깨물고 자결해야지"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한 부인만 "그때가 되어 봐야 알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부인은 정조관념도 없고, 애국심도 없는 여인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일이 일어나자 그때 매도당한 부인만 자결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말로만 좋은 일을 혼자 다 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좋은 것, 좋은 마음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힘들게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처럼 긍휼과 사랑이 없는 태도가 교회에서도 종종 목격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에서 누가 다리를 꼰다고 비판하며 교회 다니기를 포기합니다. 어떤 분은 성가대에서 한 분이 찬송을 하면서 지나치게 위를 쳐다보고 하는데 그때 그 흰 눈자위가 교만해 보여서 40일 금식기도를 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은 기고만장하지 않는 것인데 어떤 분은 시선이 너무 차갑고 높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친절과 따뜻함에 굶주려 있습니까?
서로 그런 존재이기에 교회에서만은 우리의 시선이 정말 따뜻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무슨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그 일을 하면서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며 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가 높은 자리에 있는가?"에 관심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졌는가?"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두려운 사람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분입니다. 그처럼 다 아는 것 같은 눈을 하고 얼굴에 찬 기운이 돌지 않게 하십시오.
교회를 향해 세상 사람들이 제일 기대하는 것은 사랑과 긍휼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런 긍휼한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요새 보면 너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고, 눈물도 너무 없습니다. 남자가 울면 "왜 남자가 우느냐?"고 합니다. 남자가 울면 어디 덧납니까? 사랑과 헌신의 눈물은 우리 공동체를 세우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들과 나눌 줄 알아야 합니다. 정말 가족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나눔의 실천이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가족과 이웃에 대해 일정 부분 책임을 지는 책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간디의 제자 중에 비노바 바베라고 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간디 이상의 성인으로 추앙 받는데 어머니의 영향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집에 행색이 초라한 젊은 남자가 집으로 구걸을 왔는데, 어머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 남자에게 약간의 돈을 적선해 주었습니다.

그가 돌아가자 바베가 어머니에게 따지듯 말했습니다.
"엄마! 그 사람은 건강하잖아요. 그렇게 주면 버릇이 되어서 오히려 사람을 망치게 한다는 말도 있어요. 순수한 사랑의 선물은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 아닌가요."
그러자 어머니가 말합니다.
"얘야. 우리가 누구인데 줄 사람, 주지 않을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겠니. 우리가 할 일을 문간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하나님처럼 존중해 주고 그를 최대한 예우해 주며 힘이 닿는 대로 도와주는 일이 아니겠니?"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그처럼 천사처럼 생각하며 대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 회복시키는 자세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기독교의 복의 개념을 다시 한번 새롭게 회복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을 내가 남보다 잘 되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지만 더 소중한 기독교적인 복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말입니다.
복의 근원이 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남을 잘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처럼 남을 잘 되게 하는 것을 진짜 복으로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자기 복만 소중한 줄 아는 기복주의가 성도의 가치를 얼마나 떨어뜨립니까?
인간의 행복은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이 될 때 주어지게 됩니다.

여러분! 정말 남이 잘 되게 하는 복을 받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생각으로만 그렇게 하지 말고, 정말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보세요.
정말 좋은 일이라면 후원단체 하나 정도는 선택해서 정기적으로 후원해 보십시오.
요즘 경제가 너무 어렵다고요? 그래서 내가 쓰기에도 빡빡하다고요?
물론 호주머니는 가벼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의 샘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내가 필요한 존재가 되고, 좋은 일에 동참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처럼 사랑을 아는 동료들이 주위에 많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서로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대리자들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우리를 위해서 피흘리기까지 사랑의 대리자의 길을 친히 가셨던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 주님의 기쁨이 축복의 샘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모두 사랑의 대리자, 사랑의 전령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배우자에 대한 긍휼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서로의 상황을 조금 더 알면 얼마나 서로 이해해야 할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미국에서 결혼 예비학교를 하면 꼭 가르치는 것이 생리 주기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 주기 3일 전쯤 되면 여성은 심리적으로 대단히 날카롭고 예민해지게 됩니다. 그것이 심한 사람도 있고, 덜한 사람도 있지만 대개 그런 현상을 나타냅니다.
그것을 모르면 남편은 아내가 갑자기 짜증을 내는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심지어는 여성들 자신도 자기가 그렇게 침체되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미리 안다면 더욱 아내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아내들도 남편을 긍휼히 여기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은 아버지들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많아지고 있는지 잘 알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시달리다가 집에 돌아와도 아내가 예전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비위에 거슬리면 늘 찬밥신세를 면치 못해 고개 숙인 남편이 되었고, 덩달아 아이들에게까지 천대를 받아 고개 숙인 아버지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한 외과의사가 집에 주로 늦게 오는 편이라서 아내의 성화가 대단합니다. 그러나 의사의 말은 하루 종일 수술하고 피를 만지다가 심신이 피곤하니까 퇴근해서 친구들과 함께 탁구나 당구를 치면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합니다. 자세히 듣고 보면 서로 긍휼히 여기는 눈을 가질 필요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눈을 가지고 서로 화목하게 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런 안목이 없다면 그 교회와 그 교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겠습니까?

가끔 은혜와 한나가 물건을 가지고 다투는데 그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데 역시 언니인 은혜가 가끔 언니다운 행동을 하고 물건을 양보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얼마나 대견하고 얼마나 흐뭇하고 마음이 기쁜지 모릅니다. 그 어린 마음속에도 "내가 언니니까 양보해야지."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에게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니까"라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얼마 전에 유행한 <타타타>라는 노래 중에 아주 의미 있는 가사가 나왔습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라는 가사입니다.
왜 그토록 서로 모르게 되었습니까? 사랑의 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헌신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한 상호관계 속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게 됩니다.

어느 날 영국의 한 시골에서 부잣집 소년이 연못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가난한 집의 수영 잘 하는 소년이 그를 구해 주었습니다. 곧 둘은 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어느 날 부잣집 소년이 겸손하게 부탁합니다.
"플레밍! 소원을 하나만 말해 줄래. 너의 소원을 꼭 듣고 싶어!"
그러자 가난한 집 소년이 아무 생각 없이 자기의 소원을 말했습니다.
"내 꿈? 내 꿈은 런던에 가서 의학 공부를 하는 것이 꿈이야!"
그 꿈을 듣고 부잣집 소년이 가난한 집 소년에게 말합니다.
"플레밍! 나에게 네가 들어 줄 수 있는 소원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어!"
"그럼! 뭔지 말해 봐!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어."
"아빠에게 말해서 네가 의학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내 호의를 받아 줘!"
결국 가난한 집 소년이 그 소원을 들어줘서 그는 런던에서 의학 공부를 하고 유명한 의사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플레밍이었습니다.
페니실린을 발견한 지 얼마 후 플레밍은 부잣집 친구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부잣집 친구가 "지금 폐병으로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들고 급히 달려가 그 친구를 간신히 살려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난 친구가 바로 이차 대전의 영웅 윈스턴 처칠이었습니다.

그처럼 사랑과 헌신이 넘치는 상호관계는 이처럼 무한한 가능성을 가져다줍니다.
그러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욕망이 잡아끄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너풀거리며 그냥 살 것입니까?
우리는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엡 2:10).
그러므로 사랑과 헌신을 통해 스스로의 인생을 귀중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제 인생의 한 점 한 점을 아름답게 찍어가며 최선을 인생 그림을 만들어 보세요.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정말 사랑과 헌신의 손길을 펼친다면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이 보다 성숙하고 아름다운 인생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삶에 맑고 그윽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넘쳐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