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희목사 (연동교회)

발자국지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발 사이즈나 발의 건강 척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지배하는 공간의 지수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서양인들은 침대를 사용합니다. 침대는 자고나도 공간을 점유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부자리는 아침에 개면 공간을 원점으로 환원합니다. 의자는 앉고 일어나도 공간을 점유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방석은 앉았다가 치우면 공간을 절약합니다. 가방은 아무 것도 들어 있지 않아도 공간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적 보자기는 물건을 쌌다가 풀어놓으면 공간을 돌려줍니다. 서양의 양복은 입체수납하기 때문에 공간을 유지합니다. 우리네 한복은 접어서 장롱에 평면수납하기 때문에 공간을 절약합니다. 병풍이나 부채도 사용한 다음에는 다시 접어놓으면 공간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색종이 공작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양 사람들은 주로 오려 붙이기를 하지만 우리는 접어서 치마저고리를 만들고 배를 만듭니다. 우리나라는 공간경제가 발달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작은 공간에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것은 환경 파괴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발자국 지수가 낮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선진국이라고 하는 OECD 가입국 가운데 하위 다섯 번째라고 합니다. 브라질은 아시는 대로 국토가 굉장히 넓은 나라입니다. 발자국지수가 상당히 높은 나라입니다. 특히 아마존 유역에는 얼마나 많은 열대림이 있는지 ‘세계의 허파’라고 일컬어집니다. 브라질은 세계에서 가장 외채가 많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얼마 전에 브라질에 갔을 때에 들은 얘기입니다. 브라질이 미국에 약 200억 달러의 외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브라질이 미국에게 부채를 갚지 못하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모라토리엄을 선포한 것이지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부채를 당장 상환하라고 하였답니다. 그랬더니 브라질은 돈이 없으니 아마존의 나무 200억 달러 치를 베어가라고 하였답니다. 아마존의 나무가 사라지면 미국은 당장 심각한 기상의 변화가 온다고 합니다. 가장 큰 피해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이 200억 달러를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브라질에 가서 안내원들과 교민들에게 여러 번 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볼 때 이건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이건 폭력배가 하는 억지지 이게 무슨 정당하고 신의 있는 국가간의 대화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들은 자랑스럽게 이 이야기를 합디다. 지구의 환경을 담보로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은 지구적 폭력이며 인류에 대한 또 다른 신종 테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간지수를 낮추어야 합니다. 환경에 대한 관심을 최대화해야 합니다. 이런 관심은 생태적 관심에서 성경적 신적 명령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환경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환경보존은 하나님이 주신 신적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게레트 하딘이란 분이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 책을 썼습니다. 공유지의 자유사용권을 신봉하는 사회에서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면 끝내 모두 파멸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환경이란 인류 모두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자연은 각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올해 지구 표면의 온도는 1961년부터 1990년까지의 평균 온도보다 0.45도가 높아졌습니다. 얼마 안 높아진 것 같지만 이 온도는 대단한 환경변화를 가지고 옵니다. 지구상에 폭설이 내리고,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불고, 한발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비옥한 땅들이 급속하게 사막화가 진행됩니다. 지난 주간의 신문에는 알프스에도 황사가 와서 눈이 누렇게 변했습니다 사하라 사막의 모래 먼지가 그곳까지 간 것입니다.
지구의 온난화의 직접적 피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태평양의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나라 투발루는 인구가 15,000명밖에 되지 않는 9개의 산호섬으로 된 나라입니다. 산호섬의 높이가 해발 4.5미터 이하입니다. 바로 이 작은 섬나라가 지구 온난화의 첫 희생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투발루 기상청은 지난 2월 19일 오후 조수가 평균 해수면보다 3.07미터 높아지고 20일 오후에는 3.1미터에 달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섬 대부분 지역이 1시간 정도 바닷물에 침수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였습니다. 나우루, 키리바시, 사모아, 투발루는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나라들인데 이 나라의 교회들이 ‘세계선교협의회’(CWM)의 회원 교회들로서 저도 그 곳의 교회 지도자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들이 물에 잠겨 어떻게 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그 곳의 교회들이 다 바닷물에 잠겼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동식물은 50년 내 30%가 멸종한다고 합니다. 어떤 영국의 과학자는 2100년에는 지구의 온도가 5.8도 상승한다고 합니다. 그 분은 별 걱정 다 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온도가 5.8도 상승해서는 지구가 견디지 못하고 그 때까지 지구가 생존하지 못할 것입니다. 환경보전론자들은 지구상에 서식하는 동식물이 약 1400만 종이고 약 1만2000종이 멸종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수천 종은 이미 멸종에 다가가고 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다른 나라가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의 환경지속지수는 전 세계 142개 국가 중 136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환경에 대하여는 우리나라가 꼴찌나 다름없습니다. 수출입 물량이 세계 12위인 나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환경문제는 이제 어떤 나라의 지엽적 문제가 아닙니다. 지구적 과제이며 온 인류가 함께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입니다. 배부른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서 할 얘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생활에서 실천해야 할 문제입니다.
요즘의 환경용어로 말하면, 에덴은 완벽한 생태계였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창조가 완벽하고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땅이 저주를 받고,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범죄는 생태계의 파괴로 이어집니다. 깨끗한 환경은 깨끗한 양심, 올곧은 인간성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한 환경이란 어떤 상태입니까?

첫째, 창조의 원리를 보존하는 상태입니다.

창세기 1:1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일이었고, 이 세상의 시작이었습니다. 히브리서 3:4에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 신앙 고백의 주체입니다. 지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한번도 인간이 주인이 된 적이 없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에는 “종류대로”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생물을 종류대로, 육축을 종류대로, 기는 것을 종류대로,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모두를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모든 것을 종류대로 만드신 그 다음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채소와 나무를 사람의 식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질서 있게 진행되었습니다. 질서란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질서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질서 있게 세계를 운행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그 질서를 하나님은 한번도 파괴하신 적이 없습니다.
욥기 38:25에는 말합니다. “누가 폭우를 위하여 길을 내었으며 우뢰의 번개 길을 내었으며” 비도 우뢰도 번개도 다 길이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의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동물과 식물의 모든 성장과 번식과 이동이 길이 있습니다. 작은 기러기도 그 날으는 길이 있어 자기 길로 날아갑니다. 아무렇게나 자라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길이 있고 성장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이고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와 원리와 길을 잘 보전해야 깨끗한 환경이 됩니다. 길을 파괴하면 진흙탕이 되고 무질서가 됩니다. 환경파괴는 제 얼굴에 침 뱉기가 아니라 제 손가락으로 제 눈 찌르기입니다. 모든 피해가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부메랑의 원리는 여기에서도 진리입니다. 파괴된 창조질서는 완벽하게 회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환경의 파괴는 파괴자 스스로에게 그 대가가 돌아옵니다.
최근 서울대학교의 황우석 교수가 사람의 체세포와 난자만으로 인간 배아(胚芽) 줄기세포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세계 최초라고 하여 세계 유명대학교에서 그를 모셔가려고 하고 있지만 그는 한국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주간에는 그가 “당분간 인간 난자를 가지고 복제 연구하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신이 시킨다고 하더라도 인간복제 실험은 거부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그 분은 지식과 더불어 지혜가 있는 분 같아 보입니다.
이사야 55:8에는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라고 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가늠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인간적으로 조작하면 낭패를 당합니다. 곧 파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을 판단해야 합니다.
가장 깨끗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하나님의 손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도 하나님의 생각과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되어야 가장 깨끗한 환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 가운데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란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라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땅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깨끗한 환경을 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다스리는 깨끗한 나라가 되어야 이 기도는 이루어집니다.

둘째, 피조물을 바르게 다스리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신적 명령이 있습니다.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인간에게는 황송한 하나님의 명령입니까?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은 유용하게 활용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그릇된 사고는 지배하고, 파괴하고, 오용하고, 마구 사용하였습니다. 동물이나 식물 할 것 없이 바르게 다스려야 합니다. 바르게 다스리지 못하면 오히려 화를 자초하게 됩니다.
동물이 인간에 대하여 공격적이 됩니다. 식물도 점점 못 먹게 됩니다. 땅을 얼마나 더럽혔는지 땅이 곡식을 내지 못합니다. 북한에도 그렇습니다. 땅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부지런히 일하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너무 그 동안 서로 경쟁하느라 화학 비료를 많이 줘서 이제는 땅이 생산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땅이 지치고 신음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동물의 병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병들이 동물만의 병이 아니라 인간의 병입니다. 이 병이 동물의 잘못으로 생긴 병이 아니라 인간이 잘못하여 생긴 병입니다. 광우병, 돼지콜레라, 조류독감, 장출혈성급성감염증(O-157),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이 잘못 다스린 결과입니다.
다스린다는 말을 영어로 ‘govern’이라고 하지요. 이 말의 뜻을 가진 헬라어는 ‘쿠베르네시스’(kupernesis)란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은 지도자가 별과 바람이 지나가는 길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땅도, 동식물도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지 지배할 대상이 아닙니다.
“다스리다”의 히브리어는 통치권 행사를 의미하는 어근을 가졌습니다. 통치는 지배가 아니라 섬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통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8에는 다스리는 은사을 이렇게 말합니다.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고린도전서 12:8의 말씀을 보면 “다스리는 것”은 분명히 은사입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것,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로 활용해야 합니다. 은사가 되어야 다스리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피조물이고 다른 모든 것도 우리와 같은 피조물인 것을 알 때에 깨끗한 환경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자가 아니라는 겸허한 자세가 환경을 깨끗하게 보존하게 합니다. “인간은 환경의 정복자가 아니고 환경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자의식이 있을 때에 환경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본래의 모습을 보전해 나가며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구 환경의 변화가 갈수록 큽니다. 홍수, 한발, 기근, 따뜻한 겨울, 추운 여름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잘못 다스리니까 발생하는 것입니다. 러더 위트락이 쓴 ‘영적 성숙’이란 책에는 “부럽게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창조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타락의 결과로 그들은 세상과 자신에 대해서도 그릇된 지식을 갖게 되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인간의 타락은 창조에 대한 지식을 상실하게 하였습니다. 상실할 뿐만 아니라 그릇된 지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릇된 지식이란 무엇일까요? 파괴하는 지식입니다. 지배하는 지식입니다. 훼손하는 지식입니다. 그리고 군림하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아니라 원래의 지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원래의 환경으로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지막 31절에는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합니다. “좋았더라”는 말은 “토브”라는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좋고 아름다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창조의 완벽성,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심히 좋았더라”고 하신 것은 모든 창조를 다 끝내셨고 인류를 창조하셨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을 다스릴 인간을 만드셨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원리대로 다스렸다면 가장 좋은 상태일 텐데 그렇지 못하니 좋지 못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파괴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깨끗한 환경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상태입니다. 이 상태는 우리가 보기에도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C. S. 루이스는 “창조주께서는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즐길 수 있는 아름다움을 만드셨다. 아름다운 것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반응한다”고 하였습니다. 루이스는 이것을 ‘일상적인 반응’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보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이 그가 말한 일상적 반응입니다. 그런데 더러워진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보고 반응하지 못합니다. 더러운 것을 보아도 더럽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창세기 2:18에는 “좋지 못하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던 하나님이 2장에는 좋지 못한 것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불만족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의 관계적 본성에 확실한 강조를 하십니다. 창세기 6:6에는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사”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상서 15:11에는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좋아하셨던 하나님이 한탄하시고 후회하십니다. 피조물의 타락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지 않은 상태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루소는 말했습니다. “창조자의 손을 떠날 때 모든 것이 좋았다. 그러나 인간 손에 들어와서 모든 것이 나빠졌다”. 사람의 손은 만지면 만질수록 점점 더 나빠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손이 타락한 손이기에 그렇습니다.

결론

어떤 분이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내가 좋아하는 일을 주시지 않으시려면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게 만들어주겠습니까?” 우리의 절실한 관심과 요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무얼 좋아하실까? 이것이 우리의 최대의 관심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좋은 상태가 나쁜 상태가 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좋은 자녀는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애를 씁니다. 보통 자녀는 자기의 좋은 것을 합니다. 보통 이하의 자녀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나쁜 자녀는 부모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골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녀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해 드리는 자녀가 됩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본래 상태를 깨끗하게 유지하고 보전하여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이 되게 합시다. 이 일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며 만드신 모든 환경을 깨끗하게 잘 보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