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목사 (오륜교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의 주변에 모여들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던 베드로에 대하여서 생각을 했습니다. 베드로는 순종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갈릴리 바다에 대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부로서의 상식과 경험과 이성에 비추어볼 때에 주님의 말씀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동료들과의 문제를 생각할 때, 경제적인 손실을 고려할 때, 또 자신의 육체적 피곤을 고려할 때 도저히 순종할 수 없었지만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여 나아가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두 척의 배가 물에 잠길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는 자를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자기의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 자기의 명철을 의지하는 사람은 책임져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자기의 경험과 상식과 이성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는 자를 책임져주십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는 오늘 내가 붙들고 선포하고 외칠 수 있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붙들고 씨름할 수 있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책임지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순종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지만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자기 생각을 버리고 나아가 순종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한다는 것이 말로는 쉽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베드로가 어떻게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베드로에게 그런 믿음이 있었을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언제 봤다고 깊은데 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니까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가 던졌을까?
우리는 당연히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이니까? 아니 그것도 수제자였으니까 순종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그렇게 보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됩니다. 베드로니까, 모세니까, 다니엘이니까 바울이니까 그렇게 순종하였고 충성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니까 그렇게 살아야 되고 나는 보통 사람이니까 죄를 짓고 불순종하며 살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언제 성경이 그렇게 가르친 적이 있습니까?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을 잘 모릅니다. 학자들의 견해가 다릅니다만 어떤 분은 오늘 만남이 처음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두 번째 만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두 번 만난 분이 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니까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렇게 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올라가서 전하시던 배의 주인으로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하여 자신의 육체는 피곤했지만 주님의 말씀이 자신을 사로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베드로에게 믿음이 생겼습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기 때문이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순종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순종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성도는 말씀을 가장 가까이에서 듣기를 원합니다. 믿음이 자라기를 원하는 사람은 말씀을 듣기를 사모합니다.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순종할 수 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8절은 기적을 경험하고 난 다음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8절)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습니다. 두 척의 배가 물에 잠길 정도로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베드로만이 9절에 보면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10절에 보면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지만 이렇게 많은 고기가 잡히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되자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무릎 아래 엎드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무릎 아래 엎드리는 것은 자기의 자존심을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상대방을 공경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 속에는 아주 놀라운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먼저 그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이다"(5절)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몰고 바다를 향하여 나아갈 때에도 그는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불렀습니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릴 때에도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순한 선생님이었습니다. 당시 선생은 다른 사람보다 신분이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부를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다른 사람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선생님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는 선생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습니다. 주여라는 말은 신적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주여는 하나님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여!라고 불렀다는 말은 예수님을 한 인간이 아니라 신적인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 알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인간이 아닙니다. 당신은 전지하신 주님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뭍에 서서 저 깊은 바다 한 가운데 물고기 떼가 있다는 것을 아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주여! 라는 말은 이제 당신은 나의 선생이 아니라 나의 주인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의 이 고백 속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금 자기 앞에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지는 순간 베드로는 자신의 죄인됨을 발견했습니다. 주님! 저는 전능하신 주님 앞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떠나주십시오. 저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축복을 향유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죄인입니다. 어두운 곳에 있으면 내 몸에 무엇이 묻어 있는지 잘 모릅니다. 머리에 왕 비듬이 있어도 잘 모릅니다. 그런데 밝은 곳으로 나오면 금방 드러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된 우리가 죄악된 세상에 살고 있다보면 자신의 죄인됨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영광의 주님을 만나게 되면 그 영광의 빛이 우리 가운데 비추이기 시작하면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되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이사야 선지가 웃시야왕이 죽던 해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보좌에 앉아 계시고 보좌 주변에는 천사들이 있는데 그 천사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우고, 또 두 날개로는 날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삼중 거룩송을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노래하는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이사야 선지자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면 그 발 앞에 엎드러질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만나면 "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말씀의 순종을 통해서 예수가 선생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말씀의 순종을 통해서 자신의 죄인됨을 깨달았습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베드로는 주님을 만난 다음 무서워 떨고 있었습니다. 깊은 바다 속의 물고기를 아시는 주님이 자기의 마음 속의 죄를 알고 계시리라 생각하니 더욱 무서워 떨렸습니다. 이렇게 놀라고 무서워 떠는 시몬에게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은 겁내지 말라는 말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취하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은 예언인 동시에 명령이었습니다. 이 예언이 베드로에게 어떻게 성취되었습니까? 오순절날 성령의 충만을 받은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에 그 설교를 듣고 삼천명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삼천명의 영혼이 영생을 얻었습니다. 정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이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이 마지막 날에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그의 형제들만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를 이 시대에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세상의 어부는 살아 있는 고기를 잡아 죽게 만드는 것이라면 사람을 낚는 어부는 죽어 있는 영혼을 살리는 사람입니다. 영혼을 살리는 어부로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죽어 있는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까?
주님이 왜 베드로를 부르셨습니까? 주님이 왜 이런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많은 물고기를 잡아 부자가 되게 하려고 이런 기적을 베푸셨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하여 주님이 부르신 소명에 응답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왜 주님이 우리의 기도 가운데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은사와 능력을 주실까요?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 살아야 하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죽은 영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내 마음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는 내가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겠습니까?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면 언제 성령님이 역사하십니까? 우리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릴 때입니다. 우리가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여 나아가 복음을 전할 때 성령님이 죽은 영혼을 살리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관심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궁극적인 목적도 노아의 방주가 죽은 영혼을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을 "이제 이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후로는

그런데 주님은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이제 후로는"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아무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는 자만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만난 자만이 사람의 영혼을 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서 만난 자가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악됨을 철저히 느끼고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철저하게 느낀 자만이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죄를 용서받은 심령이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11절)
"이제 후로는 사람을 취하리라!"는 주님의 예언과 부르심을 받고 그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일행이란?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와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을 말합니다. 기적을 보고 경험한 사람은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오직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만이 주님의 소명에 응답하며 자기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의 일행이 배를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다고 하니까 그 잡은 고기가 어떻게 되었을까?에 대하여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잡은 고기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의 부르심에 그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입니다.

실패는 기회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정말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실패는 바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항상 성공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도 보십시오.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5절)
밤새도록 수고를 했지마는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어부로서 실패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갈릴리 바다에 고기가 얼마나 많은데 세상에 한 마리도 못 잡습니까? 밤새도록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았다는 것은 어부로서 수치스럽고 창피한 일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그 실패한 아침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가 밤새도록 많은 고기를 잡았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로 나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어부로서 고기를 잡는 일에 실패했기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었고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실패는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실패가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너무나 많습니다. 실패했기에 겸손을 배우게 되고 실패를 경험했기에 성숙해지고 실패했기에 주님을 만나게 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실패가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야구 경기를 할 때 배트에 잘 맞아야 꼭 안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잘 맞아도 야수 정면으로 가면 잡힙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잘못 맞아도 안타가 될 수 있습니다. 배트가 부러져도 안타가 될 수 있습니다. 야구에서 강타자 불리우는 선수가 스트라이크 아웃을 가장 많이 당한다고 합니다. 홈런타자치고 타율이 높은 선수는 별로 없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신화적인 홈런 타자로 714개의 홈런을 날렸는데 스트라이크 아웃도 무려 1330회나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실패란 당신이 남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실패했다고 낙망하지 말고 새롭게 도전하십시오.

뉴욕 브루클린에 윌리언 리바인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달 사이에 강도가 4번이나 가게에 들어와 돈을 털렸습니다. 그래서 방탄조끼를 사 입었습니다. 이웃에 있는 점포 경영자들이 그의 방탄조끼를 보고 어디서 샀느냐? 자신도 하나 사 입겠다고 주문을 해서 받기 시작한 것이 그만 본업이 되어 본래의 직업인 정육점을 그만두고 방탄옷 제조회사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오늘날 국제적으로 이름난 큰 회사인 Body Armor International을 세웠습니다. 그는 40개 도시에 판매대행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강도 4번 맞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인간의 성취란 실패의 열매입니다.

2001년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못한 인생을 사셨습니까? 스스로 한 해를 돌이켜 볼 때에 실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이 실패를 인하여 더욱 겸손해지시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발견하시고 주님을 만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당신을 도우십니다. 일어나 다시 시작하십시오. 다시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 걸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