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요셉목사 (예수소망교회)

크리스마스를 무척이나 기다리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부모님이 그 날이 되면은 많은 선물을 받을 것이요 특별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부터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마디를 더 추가했어요. 착한 어린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 이제 그 날이 되었습니다. 부모님이 일찍 들어가 자라고 하길래 들어가서 누웠는데 마음이 편치 않아요. 이 아이가 말썽꾸러기거든요. 그래서 주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새해부터는 잘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선물을 듬뿍 주세요”. 누웠는데 잠이 와야죠. 다시 일어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무리 생각해도 별 자격이 없는데 그래도 귀엽게 여기어 50%라도 주세요”. 누웠지만 또 잠이 안 와요. 다시 또 일어나서 “쪼끔만이라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통해서 주세요”하고 누웠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누워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는 벌떡 일어나서 옷을 입고 문밖을 뛰쳐나가 집 앞에 있는 성당으로 가서 무엇인가를 집어 들고 들어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주님 여기에 주님의 어머니가 있습니다. 인질을 잡고 있으니 제게 선물을 많이 주세요”라고 말했답니다.
성공을 쫓고 행복할 거야라고 다짐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 오늘 현대인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무엇을 구하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달라합니다. 성도여러분 인간은 기다림의 존재입니다. 이건 보편적 사실이에요. 스스로 약속을 해놓고 기다리고 스스로 다짐하고 기다리고 또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만들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다리고 더 나아가 종교를 만들고 그 앞에서 우상숭배하며 복을 달라 기원합니다. 그렇게 기다립니다.
누구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도 이런 면에선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초대교회 신앙이 기다림의 신앙 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실 것이다 기다리라 하고 기다림으로 성령의 역사에 감화 감동을 받습니다. 그의 오심처럼 이제 다시 오시리라 하신 말씀을 근거하여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 안에서 성령님의 감화 감동을 바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 기독교의 신앙과 다른 종교나 사람들의 그 기다림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목적이 다르고 동기가 다르고 방법이 다릅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그 다름을 우리는 분명히 생각하고 알아야 합니다.
특별히 고난과 고통 중에 있을 때는 더욱더 막연하게 무엇인가를 향하여 간절히 벗어나기를 기다립니다. 우리 모두는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진정한 기다림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기다려야 바르게 응답 받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겁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적인 심리학자이며 영성신학자였던 헨리 나우웬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가 쓴 책 중에 The Path of Waiting Peace, Power and Freedom이란 책이 있습니다. 번역하면 자유와 능력과 그리고 평화를 구하는 그 길 the path를 나름대로 주장하고 있는 책입니다. 거기서 그 기다림에 대해서 몇 가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먼저 기다림이란 약속을 의지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남녀간에 또는 자녀에게도 약속을 하고 기다립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무에서 유로 이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분명 유에서 유로 움직이며 이동하는 것입니다. 약속입니다. 약속이라는 유에서 유로 이동하는 겁니다. 그것이 기다림입니다. 그런고로 변치 않는 진리의 약속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마 약속하십니다. 그 말씀 변치 않는 말씀이기에 믿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씁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성령의 역사를 주마 그리고 그 약속을 믿는 자에게 기다리는 자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또한 기다림은 능동적이다. 그렇죠. 수동적이 아니죠. 그런데 머무는 그곳 현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으로 기다림을 말합니다. 충실한 삶입니다. 회피하는 게 아니고 저곳에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곳으로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확신 속에 기다리는 것이 능동적인 기다림입니다.
또한 기다림은 인내다 라고 말합니다. 담대하게 현재 있는 곳에서 약속을 믿고 기다립니다. 마치 해산을 기다리는 어머니가 태아에게 현재적 양육을 하는 것처럼 이 기다림은 양육하는 기다림입니다. 현재의 양육적인 기다림입니다.
또한 기다림은 개방적이다 말합니다. 우리가 소유욕이나 욕망으로 인해서 미래를 우리의 잣대로 가둬놨어요. 폐쇄적 이예요. 닫혀있어요. 그래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슬퍼해요. 더 나은 길이 더 후에 있는지도 모르고 단지 그것에 매여서 닫힌, 폐쇄적인 미래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다림은 개방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면 그것에 모든 것을 열어버립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예수님 승천하신 후에도 15년 이상 전하지 못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고넬료에게 가라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증거 하라고... 그는 하나님의 사도지만 마음이 흔들렸어요. no라고 거절까지 합니다. 그러나 결국 순종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봅니다. 그 이방인에게도 성령 충만한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개방적인 기다림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내 것만을 주장하면 결코 그러한 미래를 바라볼 수 없습니다.
또한 기다림은 적극적인 자세다. 우리의 상상과 계획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선 적극성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미래를 통제하는 적극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주께서 우리의 주인 되기를 갈망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드립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Lord!, 주여! 라고 부릅니다. 적극적인 기다림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어떠한 자세로 기다리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에 진정한 기다림의 사람이 나옵니다. 시므온이란 분입니다. 이분은 행복한 분이에요. 분명한 약속의 기다림이 있어요. 또한 행복의 극치를 맛본 분이에요. 그것이 이루어지는 걸 봤거든요. 우리도 언제 기쁩니까? 내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질 때 오랜 수고의 열매가 맺혀지는걸 보면 얼마나 기쁩니까? 그는 그것을 본 사람이에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소망한다는 것이에요. 소망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런고로 믿음은 소망함이요 그 소망함은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거예요. 이 기독교 신앙을 총체적으로 기다림으로 한번 분류해보면 태초부터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심, 메시아의 오심을 기다렸어요. 그것이 구약성경이에요. 그것이 첫 번째 오심입니다. 다시 공생애 사역을 끝마치시고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자가 오늘 우리입니다. 크리스천입니다. 또한 이 현재의 삶을 통해서 성령께서 오셔서 그 약속의 말씀을 믿게 해주십니다.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리로 예수그리스도 향한 삶을 나가도록 해주시는 그 성령의 역사 충만함을 기다립니다. 이 세 가지를 기다리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참 신앙입니다.
이 시므온은 이 기다림의 신앙을 갖고 있었어요. 거기다가 보고, 경험하고, 전망하는 그러한 행복한 삶을 삽니다. 그는 기다린 것뿐만 아니라 그 약속이 이루어짐을 봤어요. 그 promise가 purpose is realized되는 걸 봤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마치 어두운 밤을 지나고 아침이 오는 것처럼 반드시 아침은 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말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I have seen. 현재 봤다 이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다...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그런데 내 노력으로 본 겁니까? 내 의지를 보았습니까? 내가 만든 약속에 대한 기대로 봤습니까? 아네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이 보여주셔서 그는 볼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기에 기쁩니다. 내 소원도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봤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함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오늘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걸 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소수예요. 극소수만 이 약속의 성취를 맛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현대인은 기도의 응답 없는 기도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매일매일 우리의 기도에 응답이 있는데 그것을 못 보는 거죠.
이스라엘 사람들 그 당시에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메시아가 오시기를 무척 기대했어요. 그래서 신학적으로 이것을 메시아대망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정작오시니까 본 사람은 극소수예요. 그게 남의 얘기가 아니 구요 우리의 모습이에요. 우리의 일상적 기도의 모습을 말하는 거예요. 이제 이와 같은 것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똑같이 있을 겁니다. 우린 이점을 분명히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오심을 보고 그것을 알아보고 행복했습니다.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봉사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순교까지 할 수 있는 겁니다.
또한 이것은 현재성이 있어야 돼요. 죽은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 우리 별로 반갑지 않잖아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시므온은 바로 이것을 보았어요. 성취가 없는 기다림은 허무함이요 허망된 거예요. 낙망케 됩니다. 반드시 현재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주십니다.
언젠가 TV에서 어느 리포터가 인터뷰하면서 기록한 내용을 보니까 참 가슴이 아프더라고요. 북한산을 거꾸로 올라가는 사람이 있어요. 50이 넘는 여성분인데 그것도 꼭 반바지 입고 빨간색 티 입고 꼭 거꾸로 올라가는 거예요. 왕복 4시간이 넘은 거리예요. 무슨 사연이 있는가하고 한 10년하고 소문이 났을 꺼 아네요. 그를 찾아갔는데 인터뷰를 안 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기자 분들이 보통 분들입니까? 끝까지 가지고 지하실 단칸방에 계신 것까지 들어가서 인터뷰를 해서 그 답을 들었는데 결론은 그렇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자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어요.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남의 집으로 전전하면서 어렵게 지냈어요. 그리고 그는 스스로 다짐합니다. 나는 결코 저런 부모가 되지 않을 꺼다. 나는 행복할 꺼다. 그리고 결혼했는데 웬걸요. 그 남편이 영 시원찮아요. 거기다가 알코올중독까지 되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결국 자녀 둘을 낳고 후에 헤어질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혼자 열심히 살아갔는데 후에 나이가 들어서 자녀를 찾아서 보니까 어쩌면 똑같이 자기의 모습대로 그대로 대를 이어서 살고 있는 거예요. 나름대로 그 저주가 대를 이어서 계속 나가는 거예요. 그 한을 끊고자, 너무너무 답답해서 세상을 거꾸로 간다고 북한산을 거꾸로 올라갔다 내려오시면서 계속 그 저주를 끊는 주문만을 하고 오는 거예요. 얼마나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까? 그게 그래서 되는 겁니까? 약속이 없어요. 거기에는... 분명한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지 누군가 그분 찾으시면 예수님 전하세요. 예수 믿으시라고...
기다림의 근거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절대 불변한 그 약속을 믿고 바래야 그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자녀교육 요즘 교육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 교육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기다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인간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못 믿더라고요. 끝까지 못 믿어요. 왜? 자기가 약속을 못 지키니까... 그래 성경에 무어라고 기록합니까? “약속한 것은 해로운 것이라도 지켜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 인간이 스스로 약속한 걸 못 지키면 하나님도 믿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 약속을 못 믿는 거예요. 끝내...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약속한 것은 해로운 것이라도 지켜라 말씀하십니다. 약속을 알고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돼요. 그런데 요즘 사회문제 가정문제 모두가 뭐예요? 기다리는 걸 몰라요. 너무 급해요. 그리고 약속의 중요성을 몰라요. 요즘 금융대란입니다. 그 원인은 약속을 기다리는 걸 몰라요. 스스로 무언가 해 보려고 해요. 이게 자녀들에게도 참 효과가 있어요.
이제 크리스마스가 되었으니까 선물도 하나 사줘야할 것 아닙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필요해도 달래는 걸 즉시 주면 안 됩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잘 믿게 하실 려면 “후에 줄게” 꼭 약속하고 그 날 줘야 해요. 그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요.
죄송합니다만 저도 아이들이 뭘 사달라고 하는 걸 크리스마스에 사줄게 하고 며칠 전에 사줬어요.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한마디 더했어요. “내가 백 개도 사줄 수 있는데...” 그랬더니 입이 이만큼 벌어졌어요. 그러면서 한마디했죠. “꼭 필요할 때 하나씩... 기다려라”. 그랬더니 소망을 품는 듯이 기뻐해요. 당장 저녁에 들어가니까 서비스가 달라지더라고요. “아빠 오늘 제가 같이 잘까요?” 이렇게 나오더구먼요.
우리도 하나님께 마찬가지입니다. 그 약속의 확실성만 있다면 그냥 기쁜 거예요. 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다림을 배워야 돼요. 일상생활에서도 이것을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 그 말씀은 reality가 있어요. 사실성입니다. 이 성경 모두는 사건이에요. 실제사건이에요. 거기다가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주기도문에 고백하지 않습니까?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as it is in heaven 하늘에서 현재적 이루어진 것이 이 땅에 오늘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Your will be done.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미 이루어진 성취된 약속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거예요. 기다려야 합니다. 믿어야 합니다. 시므온은 막연히 약속을 믿은 것이 아네요. 바로 그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렸어요. 그래서 오늘 말씀 보면 그를 평하기를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다”말합니다. 이 사람이 경건한 자예요. 뭐 새벽기도 나오고 수요 예배 나오고 하루 종일 교회 살아야 그 안에 약속이 없고 기다림이 없는 자는 경건한 사람이 아네요. 그 의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자에게 붙여지는 호칭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아기 예수를 만나고 안고 하는 첫 고백을 들어보세요. “주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말씀하시는 대로... 성령이 말씀하셨거든요. 죽기 전에 너는 그리스도를 보리라. 그 말씀을 믿었어요. 말씀하신대로 이제 보았다는 거지요. 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는 물질적인 것 이런 세상적인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덤으로 주시는 것이에요. 우리에게 분복이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주세요. 그는 영적인 바로 그것을 구한 거예요. 하나님 마음에 합당했어요. 그래서 그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도 많은 것을 기대하고 오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얻어내는 응답 받는 존재는 매우 소수예요. 소위 이 메시아 대망사상이란 것은 그때나 오늘이나 똑 같아요. 사회 경제 문화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이 땅에 이루어지는 유토피아예요.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죠. 그러한 결핍으로부터 오늘 우리도 그것을 갈망합니다. 그래서 신문에 뭐가 꽝하고 터지면 벌써 그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마음이 어두워져요. 이 땅에 유토피아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흔들리면 답답해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말씀이 오늘 있습니다. 이 시므온은 그 유토피아적 메시아 대망사상을 갖지 않았어요. 성령께서 그에게 인도하시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다가 그분을 바라봅니다. 메시아의 세대, 그 완성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손에 쥐고 있는 그분을, 그 분만을 바랍니다. 신학적으로 이 messiah age를 바란 것이 아니고 메시아 그분 한 분을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인거예요. 다윗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My times are in the Lord''s hand. 하나님의 손에 있나이다. 내 세대가 주의 손에 있습니다. 그 손을 의지해야 되는 거예요. 그가 펼치는 것은 그의 뜻대로 될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이루실 그분을 바라봐야 돼요. 시므온은 그것을 바라보았어요.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 주변적인 걸 바라봐서 아무도 그분이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해요. 오히려 십자가에 못 박게 됩니다. 그분을 만난 하나님의 사람은 변화됩니다. 생명력이 그 복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도 그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 시므온도 또 한번 변화됩니다. 놀라운 사건입니다.
여러분 치유라는 거 요즘 많이 우리 얘기하는데 치유나 치료나 비슷해요. 뭐 아픈 거 낳는 거 회복된 거 비슷해요. 그러나 분명히 다른 게 있어요. 치료는 그걸로 끝이에요. 그런데 치유 받은 사람은 그 삶이 변화돼요. 그 치유하신 자에게 순종합니다. 완전히 다른 거죠. 생명력 있는 복음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시므온이 또다시 변하는 새로운 소망을 갖습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면 그는 처음에 이스라엘의 위로 그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랬어요. 그런데 성령께서 그에게 그 기대가 그분으로 변한 다음에 이제 예수님을 안고 보니 또다시 변해요. 한민족을 위한 자기개인과 자기가 사랑하는 그들로부터의 한 기대가 만민을 위한 이방인을 위한 비전으로 변화됩니다. 이스라엘을 위로하는 그분이 아니라 만민을 비추는 그 빛이요 이스라엘 영광이 그분으로 변화돼요. 얼마나 놀라운 삶의 변화입니까? 가치관이 변하고 생각이 변합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삶이 태동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미래를 봅니다. 아기 예수를 보면서 그 아기 예수일 뿐이에요. 그런데 너무너무 감사하고 또다시 새로운 소망을 안습니다. 아기 예수가 언제 큰 거를 봤다고 주의 구원을 봐요? 그는 말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삽나이다”. 그가 이제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그 역사를 그 몇 십 년 후를 보는 거예요. 나아가서는 세상에 완성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세계를 바라봅니다. 완전히 새로운 역사관을 갖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권능에 사로잡히어 하나님의 역사를 전망해서 봅니다. 그 아기 예수를 만나고 나서...
우리는 십자가와 그 부활까지 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자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자의 삶은 이와 같이 그의 능력으로 변하는 것인데 그러한 삶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나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윗 왕을 무척이나 부러워합니다. 왜? 성경에서 가장 이름이 많이 나오고 복을 받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분의 그 복 받은 거 말고 복 받기 바로 직전의 사건들을 쫙 보면 결코 그와 같은 삶이 기대되지 않습니다. 아주 태어날 때부터 집안에서부터 계속 업신여기고 그렇게 자라나요. 그리고 광야에서 10년 이상 보내죠. 왕이 되고 나서도 전쟁이 한 번 끝난 일이 없어요. 웬걸요. 자녀끼리 죽이지 않나 폭행하지 않나 그리고 결국은 아버지를 죽이고 하는 일까지 계속 봅니다. 평생을 이러한 삶을 겪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건을 겪을 때마다 왕이 분명히 너 감옥 가고 부패척결 하면서 다 집어넣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와 같이 행하지 않아요. 그 많은 문제를 들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위로만을 바라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토로합니다. 그걸 가지고 재판에 걸지도 않고 그걸 가지고 권세를 피지도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하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 기록들이 시편이에요. 우리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만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만나고 그분을 영접하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가운데 그 말씀이 생명력 있어 나의 사고를 바꿉니다. 나의 생각을 바꿉니다. 생각의 패턴, 가치관을 바꿉니다.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서 내가 바라지 않는 더 큰 하나님의 세계를 전망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시므온은 복된 자입니다. 아니 그가 그 나이에 이제 출세 할 겁니까? 돈을 바랍니까? 건강을 바랍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 은혜 그 자체인 예수님을 만나므로 그는 기뻐합니다. 만족합니다. 그러기에 그에게 더 큰 주의 구원의 세계를 펼쳐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자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이름을 아는 자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의 세계를 보여주십니다. 더 큰 미래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오늘 이 하나님의 사람 시므온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메시지를 전해주십니다.
이제 성탄이 다가옵니다. 이미 오신 예수님을 우린 이미 만났습니다. 무엇을 기대하고 계십니까? 다시 오실 예수님을 우리는 갈망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기다림, 어떠한 약속을 근거로 그분을 바라고 계십니까? 이제 성령님께서 오시어 그로 향하게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무엇을 찬송하고 무엇을 기뻐하며 만족하고 계십니까?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접하는 자에게 더 큰 하나님의 위로를 주께서 허락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