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목사 (기쁜소식교회)

만일 어느 교인이 몸이 불편해졌다고 합시다. 이제 교회 목사님을 초청해서 기도를 받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증세가 완화되었다고 합시다. 건강이 좋아졌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기뻐할 것이고 그리고 영적으로 고무될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받았던 사람의 마음속에 은근히 염려가 생깁니다. 이것이 기도의 응답으로 된 것이라고 믿지만, 만일 증세가 도로 나빠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입니다. 건강을 잃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이 나를 고쳐주셔서 나은 줄로 믿고 있는데, 만일 증세가 다시 나빠지면 내 믿음은 또 어떻게 될까하는 믿음에 대한 염려입니다.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고쳐주신 것으로 믿고 있는 그 믿음이 손상되지 않을까 이런 염려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부흥회에서 안수하면 넘어지는 분들이 있잖아요. 어떤 분들은 일부러 넘어집니다. 안 넘어지면 미안하니까, 안 넘어지면 목사님한테 미안하기 때문에.
그런데 여러분 그 의도는 좋지만 이것은 불필요한 올무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만 지키면 되지 하나님을 변호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알아서 당신을 변호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것과 하나님을 변호하는 것은 다른 일입니다. 나는 내 믿음만 지키면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고쳐 주셨으면 나았다고 말하면 되고 아직 안 나았으면 안 나았다고 말하면 됩니다. 내가 기도했는데 기도한데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일만 하면 되고 하나님 염려는 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알아서 당신을 변호하시고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건 그분의 영역이고 나는 내 일만 염려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과학시간에 어느 학생이 어느 질문을 했습니다. 참 희한하죠. 그때는 제가 예수를 제대로 믿지도 않았는데 다른 질문들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나고, 그 질문만이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뭐라고 질문을 했느냐 하면 "부흥회 가면 소경이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걸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과학선생님이 좀 입장이 난처하셨어요. 그 분이 예수를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제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마는 과학 선생님다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병중에는 마음의 문제로 생기는 병이 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해서 마음의 평강을 얻을 수 있다면 마음의 문제에서 비롯된 병이기 때문에 기도의 도움으로 병이 나을 수 있다. 그러나 기도를 한다고 해서 없었던 팔이 생긴다거나 없었던 눈이 생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아주 정성껏 대답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세상이 이해하는 기적입니다. 아주 합리적인 방법으로 기적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서 읽지는 않았지만 누가 복음 1장에 2명의 탄생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 그리고 둘째는 세례 요한입니다. 사실 세례요한이 태어난 것도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 스가랴와 어머니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고 태가 닫혀있었다 그랬습니다. 근데 천사가 스가랴에게 나타나서 이제 네 아내가 아들을 낳으리라 해서 낳은 것이 세례 요한이고 그리고 6개월이 지난 다음에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이제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 하면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는데, 아까 말씀드린 심리적인 방법으로 이해한 기적으로는 엘리사벳과 스가랴가 세례요한을 낳은 것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리적으로 뭔가 막혀 있어서 그 동안에 불임 상태에 있었는데, 뭔가 은혜를 받고 마음의 평강을 얻고 그래서 막힌 게 뚫려서 아이를 낳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으로도 예수님의 탄생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심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합리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고 거부할 수 있는 문제지만, 그러나 받아들인다면 성경의 기록된 그 기록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전무후무한 사건입니다.

여러분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억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빈들에서 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천 명의 남자를 먹이시고 12광주리에 부스러기가 남은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있어 왔습니다. 학자들이 적어도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는 인정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에피소드 자체를 거부하려고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어떤 식으로 이 기적을 이해하느냐 하면은, 사람들이 빈들에 자기 먹을 양식을 다 가져왔다 이거예요. 그런데 숨겨놓고 있었어요. 숨겨놓고 나누려고 하지 않았는데, 어느 한 소년이 자기 가진 양식을 다 예수님에게 드리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서 숨겨놓았던 것을 끄집어내어서 서로 나누어 먹었다. 그럴듯한 설명입니다. 적어도 기적을 이해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니까 기적에다가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아주 민감하고 교묘한 변질이 발생합니다. 이제 초점은 기적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나눔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 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 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든지 착해질 수 있고 얼마든지 마음을 바꾸고 서로 나누고 서로 용서하고 얼마든지 이 세상에 천국을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더라도 인간이 스스로를 자륙구원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메시지가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도하지 않더라도.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복음서에 기적이 기록 될 때 기적을 기록하고 이제 거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하나의 결론으로, 에필로그로 기록하고 있는데 어느 구절에도 그들이 그 결과로 사이좋게 지냈더라라던가, 큰 깨달음을 얻었더라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기적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인지 기이히 여기더라 이렇게 나와요. 예수가 누구관대 바람과 바다도 그에게 순종하는고 하면서 초점이 예수님에게 맞춰집니다. 그러니까 답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질문으로 끝납니다. 그것은 이러한 모든 기적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우리에게 계시하는 사건이라는 것이지, 거기에서 어떤 우리의 인생의 철학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눔의 정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핵심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플러스 알파가 있습니다. 믿음 이외에는 이해할 수 없는 플러스 알파가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다른 모든 종교와 철학과 윤리로부터 구별하는 아주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이 플러스 알파,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일평생 교회를 다녀도 그것이 하나의 철학일 수가 있습니다.

요즘에 우리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서커스를 보려고 줄을 선 가난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서커스 구경을 시켜주려고 줄을 서서 이제 주머니에 있는 돈을 꺼내어서 세어 보니까 입장료가 부족합니다. 순간적으로 아버지의 손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아들에게 서커스를 구경시켜주려고 했는데, 돈이 부족해서 아주 난처한 입장에 있게 됐습니다. 그 순간에 바로 그 앞에 서 있던 사람이 "선생님 돈을 떨어뜨리셨군요." 하면서 돈을 쥐어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간적으로 그 사람이 이 아버지의 난처한 입장을 파악하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도왔다. 얼마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그런데 이제 우리가 질문을 합니다. 왜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좀 더 많지 않을까? 세상에 그런 사람들만 많아지면 세상이 천국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어느 남녀가 차를 타고 KFC에 가서 치킨을 한 봉지를 주문했는데 점원이 봉지를 건네주어서 그것을 싣고 차를 몰고 한참 가서 이제 치킨을 먹으려고 봉지를 열어보니까 치킨 대신에 돈 뭉치가 들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점원이 그 날 수입을 실수로 치킨 대신 준거예요. 그래서 이 남녀가 다시 차를 몰고 KFC로 와서 자초지정을 설명을 하고 지배인에게 이제 돈을 돌려주었어요. 그랬더니 지배인이 너무 고마워하면서 카메라를 꺼내 와 가지고 "내가 당신들의 사진을 찍어서 오늘 신문에 실겠다. 정말 당신같이 정직한 사람은 사람들이 알아야 된다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극구 만류를 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겸손해서 그런 줄 알고 "아닙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필요합니다." 그랬더니 "내가 할말이 있습니다. 내가 처자식이 있는 사람인데 지금 이 여자는 내 아내가 아닙니다."
사람은 착한 순간에도 악합니다. 최상의 순간에도 그에게는 모순이 있고 남에게 들어 나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비유 중에 어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는데 서기관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갑니다. 제사장이 보고도 그냥 비켜가더라. 이건 마땅히 도와줄 사람이 없더라는 얘기예요. 어느 누구도 와서 도와주지 않더라. 그래서 박해받고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와서 도와주더라. 물론 이것은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에 대한 답변이지만 기독론적인 계시가 있는 비유입니다. 결국은 죄 중에 빠져 있는 인간을 도와줄 사람이 없더라는 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다 그랬어요. 이것이 인간의 모습니다. 그래서 기대하지 않았던 분이 와서 우리를 도와주셔야 했던 것이 성탄절의 사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사람이 없는 겁니다. 사람이 많은 것 같죠.
그런데 정작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고 내가 고독할 때 궁극적으로 나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도 없고 내가 시험 당할 때 내 옆에서 같이 그 시험을 이겨줄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나와 같이 가줄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 이외에는 없어요. 예수님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나와 함께 하는 분이요 내가 풀무불과 같은 시험 속에 들어갈 때 그 가운데 함께 계시는 분이요 세상 떠날 때 내 손을 붙들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예수 이외에는 없는 거예요. 우리가 기독교인이 되고 나서도 이 예수님을 모른다면 종교인은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시지 않습니까? 물론 점잖은 방법으로 하시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것이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예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여러분 석가모니라는 인격체를 믿지 않더라도 그 분의 정신을 따르는 사람은 불교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핍박을 받아서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예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존재에 3단계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는 미학적인 단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원초적인 욕구에 이끌리어 사는 삶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원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 욕망, 이것이 충족되면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 대다수의 사람은 미학적인 차원에서 삽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뭔가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옳은 삶, 바른 삶을 추구할 때 이제 그 사람은 윤리적인 단계의 삶을 산다 그랬어요. 철학과 의무와 책임. 진리, 올바른 삶 이것을 추구하는데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그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랬어요. 그래서 예를 들면 오병이어 사건, 이것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것은 아니지만 오병이어 사건은 윤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요. 아무리 사람이 나누어 먹어도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는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것이 없잖아요. 아무리 사람들이 착해도 오병이어 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오천명이 먹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다는 것은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얘기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이건 신앙적으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래서 신비한 부분, 사람의 합리적인 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신앙적인 존재 차원에 있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결론은 ''우리가 죄인이다''가 아니고 죄인이라는 것은 전재하는 것, 시작하는 것이고 결론은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가지 전에 이 세상 떠날 때 마지막 할 말이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그건 필요한 고백 이예요. 그러나 그것이 결론이 되어서는 안되고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예수님이 나를 이제까지 인도하여 주셨사오니 요단강 건너는 일도 예수님을 의지합니다. 이게 예수 믿는 사람 이예요. 이게 신약 이예요. 구약은 요단강을 건너지 못했습니다.

어느 스승이 제자들에게 밑에 구멍이 나있는 항아리를 주고는 그 항아리를 물로 채우라 그랬어요. 자 이 제자들이 별의별 방법을 강구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 밑을 손으로 막고 있는 동안에 위에다 물을 막 부어요. 그런데도 물을 부으면 붓는 대로 세어버립니다. 도대체 이 구멍난 항아리를 어떻게 채우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한 제자가 순간적으로 지혜를 얻어서 아, 이 항아리에다 물을 부으려 하지말고 이 항아리를 물 속에다 집어넣으면 되겠구나 해서 항아리를 연못 속에다 집어넣었어요. 이제 물이 이 항아리를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밑 빠진 항아리와 같아요. 아무리 좋은 것을 배우고 좋은 환경을 만들고 아무리 좋은 것을 주입시켜도 주입하면 주입하는 데로 다 빠져나가더라. 사람은 밑 빠진 항아리예요. 그러므로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개조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민족성을 개조 시켜야 된다고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보세요 안됩니다. 사람은 스스로 변화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의지로 되지 않고 교육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 품에 안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연못 속에 내 삶 전체를 잠기게 하는 방법밖에는 없어요. 주님이 나를 변화시키게 하는 방법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 이예요. 그게 은혜입니다. 여러분 자꾸 물을 부으려고 하세요?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위해서 염려하세요? 그 방법으로 안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의 존재를 그분에게 완전히 맡기고 그분이 내 삶을 주장하게 그 분만을 의지하세요. 그분의 의를 의지하세요. 내 의를 의지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므로 성탄절의 비밀은 사람이 하나님께 갈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니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