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순목사 (그리스도사랑의교회)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기적과 이사를 행할 때 많은 유대인들은 혹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자가 아닐까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잔디밭이 있는 산으로 가셨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움집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시고 예수님은 모여 있는 무리들에게 바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시면서 모여있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첫 말씀이 무슨 말씀인고 하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심령이 가난한 자가 어떤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한 것은 모여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 유대인들의 마음도 알고 유대인들의 신앙도 알고 그들의 심령을 꿰뚫어 보는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심령이 어떤 심령 상태인지 아시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한 예수님의 의도는 바로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육적 구원을 기다리는 유대주의적 교육에 물들어 있지 않고 영혼 구원자 그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을 가리켜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오신 메시야를 바로 볼 수 있고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유대주의적 교육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 영혼 구원자를 기다리는 이 메시야 사상을 가진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에게 천국을 소유하게 합니까? 바로 이런 자들에게 천국으로 비유한 메시야의 만남과 그 메시야를 통한 죄 사함을 받아 의에 이른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복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 육신의 삶에 윤택한 것을 복이라고 알고 있지만 예수님이 말씀한 복은 우리 삶의 윤택한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곧 그 영혼에 생명을 얻는 영적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을 복이라는 말씀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교훈으로 교육을 받고, 또한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다면 이 말씀을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사고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버러지 형상과 우상으로 바꿔버리는 바로 육적으로 바꿔버리는 이러한 죄에 빠져 버리는 것이 우리의 잘못된 신앙의 결과인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인의 신앙의 실패가 어디 있었습니까? 유대인의 신앙의 실패는 우리에게 철저한 거울이 되어야 됩니다. 그들의 신앙의 실패는 그렇게도 염원하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음에도 메시야를 알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 메시야를 육적 이스라엘의 구원자로만 알았기 때문에 영혼 구원자로 온 그 메시야를 알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많은 능력과 기사와 이적과 권능으로 저희들에게 보여주었지만 저들은 예수를 나사렛 목수의 아들 요셉의 아들 마리아의 아들, 이것으로 밖에 알지 못했던 것이 바로 저들의 시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이 구약의 예언의 말씀이 저들에게 이루어짐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린 예수님이 말씀한 말씀을 참으로 그분의 말씀한 의도대로 알고 있습니까? 만약에 그분의 말씀한 의도대로 알지 못하고 또 우리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윤리나 도덕적 개념으로 알고 가르치고 있다면 과거에 유대인들이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르침같이 우리도 또 다시 전처를 밟게 되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팔복의 말씀 가운데 맨 처음 말씀한 이 말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하는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바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것을 확실히 알고 영혼 구원자임을 알고 기다리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보통 애통하다라면 교회에 나와서 자기의 죄를 자복하고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 것을 애통이라고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애통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애통하는 자들이 어떤 자일까? 바로 당시 대속에 유대 율법의 엄한 교육 속에서도 예수가 구원자임을 확실히 믿고 그를 통한 영혼의 구원을 바라는 그들을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 당하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저들이야 말로 애통했던 것입니다. 저들은 참으로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바로 그 애통하던 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고, 또 그들에게 약속한 성령을 주어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참되 위로를 받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고 무엇으로 가르치고 무엇으로 배웠겠습니까? 마치 우리는 내 잘못을 통회하면서 내 잘못을 자복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애통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면 자기 중심적이요, 윤리적인 것이요, 또한 도덕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행위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하신 의도대로 이 말씀을 이해하고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말씀을 믿을 때에 바로 주께로부터 주시는 참된 복을 얻고 주께로부터 주신 참된 위로를 받는 이런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또 다른 말씀으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이 온유한 자가 누구겠습니까? 우리가 대체 온유한 자라고 하면 그 성품이 과격하지 않고 누가 뭐래도 성내지 않고 이러한 윤리적 시각에서 참 온유한 사람을 이렇게 압니다. 이렇게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온유해 지기를 원합니다. 물론 우리가 온유해져야겠지요. 그러나 이 말씀을 우리의 사람의 성품적 개념으로 온유라고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한 것은 이 온유한 사람의 성품을 들고 바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한 복이 무엇이냐 하면 누구의 관계 속에서 온유해야 되느냐, 바로 이것은 그리스도와 관계 속에서 온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가 구원자임을 알 수 없는 심령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 저들은 메시야에 대한 이해와 성경적 이해가 육신적으로 구원하는 이스라엘의 국가 구원으로 알고 있는 것이 당대 신앙인들의 신앙 수준이기에 예수님께서 당시에 복음을 증거할 때 바로 그 복음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이 사람을 온유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 온유한 사람에게는 무엇을 주시겠다고 했습니까? 바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땅을 한 평 받은 사실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이요 라고 한 땅은 무엇을 의미한 것이겠습니까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바로 지파별로 땅을 분깃으로 받았습니다. 바로 유업을 받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바로 유업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유업이 어떤 유업입니까? 바로 영생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을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땅을 말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영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것을 이와 같이 설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온유하다라고 하는 이 말씀 때문에 사람의 성품이나 사람의 그 모든 외모적으로 알고 가르치고 있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할 때는 내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없던 것이 당대 유대인들처럼 바로 바로 오늘 우리에게 그 역사와 사건이 교훈이 되어서 우리는 참으로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온유한 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고 예수에 대한 가치와 예수에 대한 존재와 예수께서 우리를 향하여 역사한 그 역사의 의미를 바로 안 자만이 진정으로 온유한 자입니다. 예수님은 이 팔복의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는 이 팔복 말씀의 복의 개념을 확실히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팔복의 복은 우리가 아는 오복이 아닙니다. 이 팔복은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기 위해서 바로 복이라는 말씀을 들어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일까요? 바로 예수가 구원자임을 바르게 안자가 당대에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복된 사람일까요? 예수님이 말씀한 그 말씀을 육적인 말씀이 아니라 영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 영적인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 우리의 신앙이 바로 적립되어서 바로 하늘의 신령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주의 말씀대로 바로 그 역사에 기여하는 신앙인들이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긍휼히 여겨야 됩니까? 분명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때문에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긍휼히 여깁니다. 또 이 말씀대로 지키기 위해서 소외된 사람을 바로 긍휼히 여기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가난하고 긍휼히 여겨야 할 자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늘 말씀한 이 긍휼히 여긴다는 말씀을 사람의 관계에 긍휼을 말한 것이 아니고 모여있는 유대인들의 심령을 보시고 이제 누구를 긍휼히 여기라고 하고 있습니까? 바로 긍휼히 여기라고 한 것은 우리 대인관계의 긍휼을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구원자임을 외칠 때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 곧 이것이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할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의 어마어마한 핍박이 가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를 따르는 자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시인할 것이요 너희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부인하리라'' 하셨습니다.

오늘 이 본문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은 동일한 맥락적 말씀인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 누구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긍휼히 여길 때에 그리스도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긍휼을 받는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 사함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이 놀라운 은혜의 축복을 받는 다는 말씀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한 이 말씀은 우리의 대인 관계나 도덕 관계나 윤리 관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시기 위해서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증거했던 말씀인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이 청결한 말씀은 마음이 깨끗한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이 깨끗한 자이겠습니까? 잘못된 교리로 잘못된 교육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해서 배웠지만 그러나 그 잘못 가르친 그들의 교육이 마음에 탐탁하지 않고 오직 참된 구원자 우리의 영혼 구원자를 기다리는 메시야 사상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이것이 청결한 자인 것입니다. 깨끗한 자라는 것입니다. 더럽힘을 받지 아니한 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곧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바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고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설명할 때에 유대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너희가 내가 선한 일을 행했는데 어찌하여 돌로 치려 하느냐라고 물을 때 네가 선한 일을 하므로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서 네가 하나님이라고 하므로 우리가 돌로 치려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분명히 유대인들이 반발했던 것을 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라고 한 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시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관계 이것을 복이라는 것으로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이제 누구와 화평케 해야 됩니까? 인간 관계에 화평케 해야 됩니까? 아닙니다. 곧 이것은 그리스도와 관계 속에서 예수님을 적대시하지 않고 그를 성경에 기록한 구원자임으로 받아들이는 것, 예수님과의 관계에 화평하는 것이 바로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화평은 우리의 친화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 관계의 친화로 알고 배우고 가르치고 있다 라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사람의 생각으로 교훈을 삼아서 가르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누구와 화평해야 되겠습니까? 모여 있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와 화평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와 화평해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