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규목사 (광주중앙교회)

누가복음 2장 14절을 읽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고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 충만하며 평화가 넘치는 성탄일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일은 구세주 예수님이 세상에 나신 날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야만 하셨을까요? 당시에 소외당한 사람, 헐벗고 굶주린 사람, 가난과 슬픔과 고통 속에서 버림받은 불쌍한 인생들이 도처에 많았습니다. 성경이 예고한 구세주가 오셔야만 할 때가 이르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같습니다. 억압된 사람, 신음한 사람, 짓눌린 사람, 불쌍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모든 인생들에게 예수님은 임마누엘, 곧 구세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신 배후에는 성경적인 예고가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이 성탄을 예고했고 신약성경이 성탄을 예고했습니다. 예수님의 나심은 성경의 예고대로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본문 말씀에서 세 가지 성탄 예고를 묵상하면서 그 진리를 터득코자 합니다.

첫째, 천사의 예고

2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네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천사가 꿈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당부를 했습니다. 세 가지 내용입니다.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마리아의 잉태는 성령의 된 것이니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요셉은 천사의 지시를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요셉의 인격이 정말 믿음으로 다져진 정말 성숙한 인격임을 볼 수 있습니다. 약혼녀 마리아의 임신을 알았을 때에 분명히 자기가 증인인데 동침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그는 19절에서와 같이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했습니다. 믿음을 떠났더라면 요셉도 마리아의 부정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의 허물을 드러내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지적하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남의 허물을 되도록 덮어주고 감싸주며 이를 위하여 기도해주고 치유해 주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눈 속에 들보를 먼저 깨닫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했습니다. 배가 불렀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 마리아의 사정을 알 수 있습니까? 누구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만일 요셉이 ''여기 부정을 피운 여인을 보라. 배가 부른 것이 그 증거가 아니냐 '' 나팔을 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마리아뿐만 아니라 요셉은 함께 패가망신했을 것입니다. 요셉의 믿음이 우리에게 교훈 했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라" 했는데 깊이 숙고할 때의 의미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를 해보려고 노력한 요셉.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이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깊이가 있어야 하며, 무게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숙한 믿음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요셉의 믿음을 본 받아 네 허물보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달으면서 주께 영광을 돌리는 성탄일이 되어야 할 줄 압니다.

둘째, 이사야의 예고

2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여기 선지지가 누구입니까? 이사야입니다. 이사야가 성탄 예고를 했는데 그 내용은 23절에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은 이사야의 성탄예고대로 동정녀, 곧 처녀의 몸에서 탄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탄생하셔야만 했을까요? 미국의 프린스톤 신학교의 위대한 교수, 그레샴 메이쳔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 관하여 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메이첸 박사가 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의 관하여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작품은 아직 나온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동정녀의 몸에서 나셔야만 하셨을까요?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사야의 성탄 예고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나지 아니하셨더면 이사야의 예고가 얼마나 엉뚱한 예고가 되겠습니까? 22절입니다.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선지자의 예고한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예고한대로 예수님이 세상에 탄생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예수님의 탄생이란 말입니다.
본문 23절은 이사야가 예고한 이사야 7장 14절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만일 이렇게 탄생하지 아니했더라면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꼬집을 것입니다. 누가 선지자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대들 것 아닙니까? 죄인을 구속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했습니다. 거룩하고 죄 없는 자많이 죄인을 대신할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죄인이 죄인의 죄를 구속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무죄성을 증거하기 위해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탄생하셔야만 했습니다. 욥의 증언을 보십시오. 25장 4절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성경이 자주 말씀한대로 의인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죄 많은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이것이 성탄일이요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요셉은 매우 훌륭한 인물입니다. 24절을 보면 요셉은 주의 사자의 분부한 대로 행하였다고 했고 25절을 보면 요셉을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했다 했습니다. 또 25절을 보면 요셉도 천사의 지시대로 아들을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했습니다. 세상에 많은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지시대로, 이사야의 예고대로, 잉태되어 난 아들을 예수라 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님이 빠진 기독교가 있을 수 없고 예수님을 제외한 성탄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신 예수님이 내 마음 가운데, 가정 가운데 모시고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은 육적으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 그리고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모든 죄인들의 가슴속에 오셨습니다. 불신과 가난으로 쪼들린 가정마다에 오셨습니다. "오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시간 속에 나의 삶 속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인카네이션 하신 것입니다. 도성인신 했다는 말입니다. 오실 때 놀라운 방법으로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의 몸에서 나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속성을 잘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살기 위해 오신 것 아닙니다. 죽으시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를 발로 차버리기 위해 오신 것 아닙니다. 십자가를 친히 지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골고다의 언덕을 떠나서는 베들레헴의 의미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오리 모두가 어찌 되었습니까? 죄 씻음 받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이 죄 씻음 받았습니다. 죄 씻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오! 주님이여!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해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송하는 성탄일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여인들의 예고

18절을 함께 읽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나타났더니" 여기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 탄생에 관하여 증거할 수 있는 인물 가운데 가장 유력한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간증이 무엇입니까? 마리아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는 요셉과 동침한 적이 없다는 사실, 또 하나는 성령으로 자신이 잉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뜻은 예수의 탄생은 보통 인간들의 탄생과는 다르다. 부부관계의 탄생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된 초자연적인 탄생이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이 성령으로 탄생해야만 했을까요? 본 절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무죄성을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인간의 이성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사건이지요. 그러나 빛이 있으라 하심이 빛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어찌 예수의 성령잉태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마태복음 1장 1절을 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 세계란 말은 족보라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자세히 보면 다말, 라합, 룻, 밧세바 등의 네 여인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네 여인들은 오실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은 남녀의 장벽을 허물어 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풍습으로 여인들의 위치가 어찌했습니까? 몹시 낮은 형편이었습니다. 족보에 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네 여인이 족보에 들어있습니다. 남녀 동등이 언제부터인가요? 남녀 평등이 언제부터인가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적부터 아닙니까. 교회마다 남성성도보다 여성성도가 많습니다. 더욱 여성 성도님들이 감사해야 되지 아니해야 할까요. 특별히 교회 안에서 여성의 위치는 대단해진 형편입니다. 사실, 여성들이 교회에서 자원봉사를 얼마나 많이 하고 있습니까? 여기 소개된 네 여인이 예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 낮은 위치를 확보할 수 있게 되신 분이라는 것이요. 남녀를 그렇게 유별시켜 지위를 낮게 할 필요가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을 허물어 주신 분이십니다. 당시 이것이 문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얼마나 큰 문제였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족보에 나타난 대로 이방인들이 있었습니다. 여리고에 라합, 모압의 룻, 이방인들입니다. 라합은 가나안 여리고성에 기생으로 이스라엘의 정탐군을 살려줌으로 자기의 가족을 구원시켰습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결혼하여 오실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의 자부입니다. 모압이 고향이지만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미망인으로 왔지만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서 오실 예수님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족보에 들게 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높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개 취급을 했습니다. 이방인들을 지옥의 불을 태우는 데에 땔감이라고까지 혹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그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에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혔던 담을 허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인종과 인종, 계급과 계급, 문화와 문화, 나라와 나라 그 높은 장벽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최근에 우리는 뉴스 보도를 통해서 기쁨을 누린 적이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기도할 적이 많았습니다. 노무현 후보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에 그분이 퇴임하는 동안에 우리 마음속에 한이 되는 동서가 하나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인들이 증언합니다. 소개하고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장벽을 허무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예수님 족보에 등장한 여인들은 마리아를 빼놓고 다 순결성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다말이 그랬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자부입니다. 그는 유다의 장남 엘과 결혼을 했으나 자식이 없이 남편이 죽었습니다. 형수에게 장가드는 법에 의하여 엘의 동생 오난이 다말에게 장가들었습니다. 그런데 또 자식이 없이 오난도 죽고 말았습니다. 오난의 동생과 또 결혼하려 했으나 시부 유다가 허락지 아니하여 다말은 창녀로 가정하여 시아버지를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다말은 베레스를 낳고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드셔서도 그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고 죄인을 통해서도 영광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족보가운데 죄 많은 여인을 끼우고 또 예수님 자신이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가로막은 죄의 장벽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나 예수 믿고 구원받았네" 이것은 예수님의 순전한 은혜가 아닙니까. 예수님을 떠나 어찌 우리가 사모하는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이사야가 예언한대로 그의 이름 "임마누엘"이 답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이 그것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다시 말하면 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크리스마스는 임마누엘의 날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일은 보통의 일이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악된 내 인생과 함께 하시냐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생과 어떻게 함께 하실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장벽을 뚫고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시는 사건이 곧 임마누엘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임마누엘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입니까? 외롭고 슬프고 고독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아직도 허물진 인생이 아닙니까? 그런데 나와함께 하신 주님이 위로하십니다. 만져주십니다. 일으켜 주십니다. 눈물을 닦아주시는 우리 주님이 아니십니까! 이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신 주님을 내 심령가운데 내 가정 가운데 모시고 평화를 누리는 금년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