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목사 (기쁜소식교회)

제가 1980년대 중반에 뉴욕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할 때의 부푼 가슴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다리 위에 서서 뉴욕시를 바라볼 때 뭔가 좋은 일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가 훌륭한 변호사가 되어 뉴욕 시에서 성공적인 미래를 펼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제가 기대하지 못했던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거의 20년이 지난 오늘, 저는 법조인이 아닌 목사로서 뉴욕이 아닌 서울에서 기쁜 소식 교회를 담임하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은 처음 시작할 때의 기대와 소망이 큽니다. 그래서 첫 번째 선택이 끝까지 갈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러나 살다보면 원점에서 시작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제가 법조인의 꿈을 접고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정한 이후로 옛날 친구와의 연락을 끊고 새로운 목적과 가치관을 쫓아야 했습니다. 이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제가 캐나다 국적을 포기하고 한국에서 목회를 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원래의 모국이 이국이 되었다가 다시 모국이 되는 진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대형교회 부목사의 생활을 끝내고 교회를 개척하기로 했을 때에도 상대적으로 평안한 삶을 버리고 불확실한 길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제 친구들 중에는 더 큰 진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첫 번째 결혼에 실패하고 아픔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가 새로운 배필을 만나서 새 가정을 이룬 사람이 있습니다. 결혼 사진도 새로 찍고 폐백도 다시 했지만 아무래도 처음처럼 흥분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더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새로운 선택이라는 것이 우리가 선택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우리에게 요구된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실 때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반문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요 3:4)"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직장을 새로 시작하는 것은 아주 부담스럽습니다. 아직도 우리 문화는 평생 직장 문화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교회를 옮기는 일도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특별히 전에 다니던 교회에 친분이 깊었던 사람이 많거나 직분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필요하다면 해야합니다. 성경을 보면 많은 경우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시작을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가 되어, 남들은 은퇴할 나이에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장차 주실 땅을 향해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모세는 나이가 80이 되었을 때 민족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아 새로운 사역의 길을 열어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이들의 경험을 통해서 발견하는 것은 새로운 시작이 첫 시작보다도 더 풍성한 열매를 허락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미성년자가 이런 구절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다윗이 남의 아내를 탐하는 구절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구절이 그러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존경하는 믿음의 어른들에게 이러한 도덕적인 실패가 있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쉬쉬하며 그것을 은폐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미칠 파장에 대해 우려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력한 믿음의 사람들의 도덕적 실패를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고유문화는 존경하는 사람이 사람 이상의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되고, 목회자는 화장실도 가지 않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조적으로 성경은 아무리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라도 결국은 사람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진흙으로 빚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들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I am what I am by grace of God.)(고전 15:10)."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1960년대에서 80년대에 유명했던 미국의 캐서린 쿨만이라는 여자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처녀 시절부터 촉망받는 부흥사였습니다. 그러나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유부남은 자기 아내를 버리고 캐서린과 결혼했습니다. 서로 지극히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캐서린은 처음부터 이 결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둘 다 기독교인이지만 식사기도도 함께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캐서린은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를 원래 부인에게 돌려보내고 일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그녀의 경력에 큰 오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이후부터 캐서린이 집회를 인도할 때마다 전에 없었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병자들이 낫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목회는 이전보다 훨씬 커지게 되었고 세계적인 부흥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요나도 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첫 번째 사명에서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니느웨로 가서 나의 말을 전하라"고 하셨지만 요나는 거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과 하나님의 뜻을 파악할 수 있는 지혜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순종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와 은사와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결국 우리가 순종하느냐, 순종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인격의 문제이고 충성의 문제이지, 개인의 재능이나 능력이나 은사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은혜를 받고 많은 능력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실족할 때 더 크게 실족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러므로 능력과 은사를 사모하는 분들은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인격적인 차원에서 먼저 내 삶을 하나님께 드리고 내 고집대로 행하지 않고 주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같은 근본적인 믿음의 결단 없이 능력을 받고 신령한 체험을 하고 은사를 소유한다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않으면서 무조건 더 큰 능력을 달라고만 기도합니다. "나에게 더 큰 은사를 주시고 더 큰 도구를 주셔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대문짝 같은 은사를 주옵소서." 대문짝 같은 은사를 받으면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그것을 지고 다닙니까, 이고 다닙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큰 일을 맡겨도 충성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세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세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요나도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캐서린 쿨만의 실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큰 사역을 하는 사람도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사랑 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누군가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진흙으로 빚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수록 인간을 이해하여 인간을 너무 의지하지 말고, 인간의 실수로 인해 실망하지 말고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성경구절은 미성년자가 납득하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인생 경험이 많을 수록 깨달음도 많아집니다. 이전에는 이론적으로만 생각하고 이상적으로만 생각하여 사람의 실패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사람이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이 삭개오같은 사람을 받아 주실 수 있을까, 어찌하여 하나님이 막달라 마리아같은 여인으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가?'' 이해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이해할 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도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죄인들을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모순 중에 모순입니다. 하나님과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을 저버리고 부인했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는 것을 거부한 이유는 니느웨를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나는 의인이고 그들은 죄인인데 어찌하여 하나님이 의인으로 살아온 나와 똑같은 은혜를 죄인들에게도 주시려는가''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로 요나는 풍랑을 만나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사흘을 고생합니다.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서 비로소 깨어지고 회개했습니다. 다시 하나님께 헌신하게 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물고기를 명하여 요나를 육지에 토해내게 하셨습니다. 그 후에 오늘 본문의 1절 말씀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니라(욘 3:1)."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주시는 말씀의 내용은 같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말씀의 지시사항은 똑같습니다. 차이점은 요나가 첫 번째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내용을 두 번째로 그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통과시켜야 할 것은 건너뛸 수도, 단축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통과하게 하시는 것은 반드시 통과해야만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만약에 우리가 거부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과정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내가 순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내가 아직 배우지 못한 부분이 있습니까? 건너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방법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내가 통과하여 받아들일 때까지 그 과정을 걷게 하십니다. 다만 첫 번째로 요구하실 때 그것을 잘 통과하면 영광과 기쁨과 축복이 있지만, 두 번째 할 때는 부끄럽습니다. 마치 학생이 유급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1년을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된다면 후배들과 같이 학교에 다녀야 하기 때문에 부끄러울 것입니다. 내가 다시 학교에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작년에 낙제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범죄한 후 하나님이 그를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온 백성에게 소문이 퍼졌습니다. 얼굴에 먹칠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자랑할 것이 많이 있었지만 이제는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제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두 번째 시작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얼굴의 먹칠을 했음에도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믿음과 겸손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요나가 하나님에게 "No!"라고 했을 때 하나님도 요나에게 "No!"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요나를 못 잊어 하시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로서의 은사를 테스트하는 설문조사중에 이런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옛날 친구들과 친분을 오랫동안 유지하느냐?" 이 질문이 은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아주 결정적인 질문입니다. 목자의 마음은 옛날 사람을 잊지 못하고 그 사람과 계속 연락하고, 관심을 갖고,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인이라도, 하나님을 실망시킨 사람이라도 마음속에 지워버리지 않으시며 기억하고 잊지 못해 하십니다. 다시 그를 찾아가서 부르십니다. 우리가 실수했을지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잊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어느 은퇴하신 목사님의 설교집을 보다가 ''천국의 방언''이란 글이 제 맘에 와 닿았습니다. 천국의 방언이란,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잘 했습니다. 믿겠습니다. 얘야, 괜찮다, 내가 잘못했다. 모르고 그랬는걸 뭐. 얘야, 괜찮다. 너 나와 같이 살자." 마지막 말이 제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집에 가셔서 이 말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불러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얘야, 괜찮다. 그래도 너는 내 아들이다, 내 딸이다."라고 말해보십시오. 배우자에게 "여보, 괜찮아요. 우리 같이 삽시다."라고 말해보십시오. 눈이 휘둥그래질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아버님, 어머님 저희가 모실게요. 우리 같이 살아요."라고 말해보십시오. 직장의 직원들에게 "괜찮소. 당신 나와 같이 일합시다."라고 말해보십시오. 여기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지켜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이 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지켜야 할 자리를 어머니가 대신할 수 없고, 남편이 지켜야 할 자리를 아내가 대신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하나 빠진들 대수랴''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이 맡아야 할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없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피콜로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피콜로는 피리같은 악기인데 크기도 작고 소리도 작습니다. 그래서 이 연주자는 스스로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나 한 사람 빠진들 무슨 차이가 있을까''하고 생각하고 피콜로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지휘자가 그 사실을 알고 지휘를 멈추고 "피콜로는 어디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주님은 지휘자 같은 분입니다. 요나가 직분을 버렸을 때 아무도 그 직분을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요나를 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맡은 직분이 트럼펫과 같은 직분일수도 있고 피콜로와 같이 작은 직분일수도 있지만, 우리가 그 직분을 감당하지 못했을 때 주님이 찾으십니다. 저는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분들이 ''나 하나 빠진들 무슨 상관이랴''하면서 빠지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빈자리를 채울 수 없습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차량안내위원, 무엇이든 간에 주님이 그 일을 작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을 극복해야 합니다. 세상 적으로는 비하하지 않으면서 영적으로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주님은 땅 끝까지 도망가더라도 찾으십니다. 오늘도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다시 믿을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