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환목사 (명성교회)06  

선지자 가운데 대표적으로 잘못한 이가 있습니다. 발람을 첫번째로 꼽을 수 있습니다. 발람은 모압 왕이었던 ''발락''이라는, 이름도 비슷한 발락왕에게 초대를 받습니다. 이 사람은 바로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의 대적이었고 이스라엘을 넘어뜨리려는 나라에 선지자 발람이 물질과 명예에 눈이 어두워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초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따라갑니다.

두번째로 아합시대의 사백명의 선지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기도로 백성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의 그늘에 붙어서 권력자를 위해서 충성하고 권력자가 잘 되도록 권력자를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또 다른 선지자는 요나입니다. 니느웨에 가서 마음을 돌이키라는 사명을 받으나, 다른 섬으로, 다시스란 곳으로 갑니다. 니느웨와 다시스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요나는 동쪽으로 티그리스강 근처의 앗수르의 수도로 가야 하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말씀을 떠나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선지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 종류의 선지자는 다 잘못 된 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지자가 과거에 마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도 이 선지자의 요소가 있어서 이렇게 나를 위험하게 한다고 생각하고 우리 는 이런 경우를 통해서 실수하지 않도록 배우고 고쳐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발람 선지자가 물질의 유혹을 받은 것처럼 우리 교인들도 많은 유혹을 받습니다. 수레에 가득 싣고 온 보물에 유혹을 받습니다. 어떤 나라의 왕이 나를 초대하려고 하면서 애를 쓰면 우리에게도 이러한 유혹 받을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권력을 위해서 붙어 있고, 권력의 그늘 밑에 있고, 보호와 사랑을 받아 영광을 누리려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이기심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우리는 발람이나 요나가 성경에 있다고 남의 사건으로 보지말고 나의 일로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 선지자는 요 너! 가 아니고 요 나! 라고 생각하고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요 당신아! 가 아니고 요, 나! 이고, 요 아버지! 가 아니고 요, 나! 입니다.
우리가 뉴스를 볼 때면 잘못한 남을 향하여 나쁘다라고 하지만 ''그 것이 다 나다'' 라고 생각하면 회개하고, 겸손히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 요나의 잘못된 것은 하나님 낯을 피하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하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을 떠나 멀리 가서 행복하려고 하는 탕자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직분 없이 편하게 세상의 쾌락을 좇아가려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씀, 교회, 성령, 은혜를 떠나서 살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떠나, 말씀을 떠나 어찌 살 수 있을까마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수 없다는 이 법칙과 원칙은 변함이 없습니다.

요나는 많은 학자들이 말하기를, 요나는 하나님 종이었으나 생각하기를 ''니느웨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도 잘 사는 도시이니까 이런 민족들과 이 수도는 망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다, 고소하다'' 라는 생각이 꽉 차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망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는 분이십니다. 다 용서하시고, 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믿으면서 도 마음이 좁고 열리지 않아서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고쳐야 하는 부분입니다. 마음을 좁게 가지고 고집을 갖고 이기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있고 강팍한 마음, 나쁜 생각이 많습니다.
나를 욕하는 사람이 안 되기를 원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잘 되면 괴롭고 한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부터 아직까지 하나님 자녀다운 마음의 천국을 건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몇 년 전에 내 자신의 못된 모습을 바라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상일동 근처에서 오르막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에서 몇 분의 장로님들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즉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 분 중에서 한 분이 나를 늘 괴롭히고 늘 시기하던 장로분이 있었는데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내 마음에 ''시원하다'' 라는 마음이 들고 ''싸다''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하며 하나님 종으로서 덜 거듭나고 나는 아직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지 못한 나쁜 놈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사람이 손해보고 안되었다 라는 소리를 들으면 기뻐하는 것은 바로 요나의 마음과 같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 사이가 가장 가까운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풀지 못하고 서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큰 은혜를 받은 우리가 오른손 하나도 풀지 못하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시기, 질투, 미움은 없어야 합니다.

옛말에 ''개 꼴아지 미워서 낙지 산다'' 는 말이 있습니다. 개에게 생선 가시도 주기 싫어서 나만 먹으려고 낙지를 사려는 마음인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인기 얻고, 잘 되면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해서 양보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만 양보하여도 가정 천국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시골의 외나무 길에서 ''여봐라 비켜라, 비켜라'' 하면서 서로 양보하지 않다가 결혼식 못하고 돌아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도 자존심 때문에 ''나와 너''와의 관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좁은 마음, 여유 없는 마음을 제하고 융통성을 갖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동리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 끌고 와서 돌을 들고 온 동리 사람들이 모여 돌로 때려죽이려고 하면서 주님께 물었습니다. ''율법에는 돌로 죽이라고 하였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했을 때 만일 예수님이 율법을 거스르면 당신이 그 돌을 받아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그저 앉아서 글을 쓰셨습니다. 뭐라고 쓰셨을까요? 아마 ''죄 없는 놈은 나와봐라!'' 하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말씀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죄 있으면서 남을 정죄하고 내 눈의 들보를 갖고도 남의 티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 요나가 순종하지 못했습니까? 자신의 마음의 잘못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다시스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배는 큰 풍랑, 시험이 들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피함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언제나 기쁨으로, 순종으로 감당할 때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감당해야 하 는 것은 감당하고, 넘어야 할 산이면 산, 강이면 강을 넘고 건너야 합니다.

적극적인 믿음으로 이겨낸 에스더, 모르드개, 야곱도 정면으로 만나서 이겼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피할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사람의 일생에 왜 어려운 일이 없겠습니까? 이 어려움을 넘어야 합니다. 넘지 않고는 앞으로 갈 수 없습니다. 피하면 안되고 하나하나 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령과 수단을 부리며 요행을 바라고 어떻게 하더라도 고생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러나 내게 오는 일을 감당코자 할 때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사 감당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정면으로 가야 합니다.
저는 군에 있을 때 휴가를 와도 이틀 먼저 귀대했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휴가 왔으니 더 있고 싶지 만은 집이 이렇게 멀리 부대에서 떨어져 있는데 ''혹시 홍수나 눈이 와서 귀대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할까'' 하고 언제나 먼저 갔습니다. 왜냐하면 늦게 귀대하면 군 생활을 더 오래 해야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견디나 하면서 군대에 있어야 할 그 기간을 빨리 채우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먼저 가냐'' 고 말릴 때 저는 이 옷을 빨리 벗으려면 빨리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어려움을 통하여 축복하시려 는 주의 뜻을 믿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지난번에 충무에 갔을 때 어떤 목사님이 본인 소개를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교회에서 초대하여서 배를 타고 한시간 갔는데 그 섬 마을에서 이 목사님이 22년을 목회하셨습니다. 22년 전에 목사님이 학교 졸업 후 그 마을로 갔을 때는 전기도 없었고 의원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버스도, 차도 없는 마을입니다. 그 마을에 들어가 22년 간 전도하면서 섬 복음화를 하였습니다. 온 성도가 백퍼센트가 다 성도입니다.
신문에도 많이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이 마을을 술을 팔고 먹는 사람이 없고 우상숭배 하던 마을이 한 사람도 없이 다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 외에는 다른 곳에는 교회가 비어 있는데 교회가 교인 장년이 몇 백 명이 모인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다 배를 타고 예배를 보러 온다고 합니다.
배를 타고 충무까지 가려면 배가 자주 안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다가 육지라면'' 그 노래를 거기서 깨달았다고 합니다. 바다가 육지라면, 육지를 밟고 논도 한 평 없는 그 마을이 지금은 지상의 낙원처럼 복을 받고, 그 전에 도박하고 술을 하고 우상숭배 하던 분들이 다 장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곳을 가고, 기쁨으로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의 축복을 받을 줄 믿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얼굴을 찾고 구할 때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역대하 7장 14절에 ''내 백성이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내 얼굴을 구하면 그 죄를 사하고 병을 고칠 것이고 땅을 고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탕자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찾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 가서 ''내가 아들 됨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고 해야 합니다. 아버지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고 외쳐야 합니다.

아버지가 된 분들은 다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저의 군에 간 아들이 편지를 보냈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오던지요.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계속 읽었습니다. 군에서 전화로도 ''아버지, 아버지''라고 할 때 얼마나 마음이 움직여지는지 모릅니다.
범죄한 우리가 고집을 버리고 강팍한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떠나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나를 불쌍히 여기사 용서해 주옵소서. ''제가 불의에 매어 있나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시고 나를 맞이하러 나오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좁은 마음도 자식을 사랑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넓고 넓은, 우주보다 더 넓은 하나님의 사랑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나는 멀리 보지 못했습니다. 떠나면 다인 줄 알았습니다. 그랬을 때 험한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기도는 멀리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멀리 보려고 나옵니다. 우리가 앞만 보면 섭섭하고 낙심되고 맙니다. 멀리 보면 이웃도 부모도 자식도 좋게 보입니다. 우리가 멀 리, 넓게 보면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게 됩니다.

며칠 전에 보니까 부부가 결혼한 지 며칠 안되었는데 남자가 과거를 자꾸 캐물었습니다. 자꾸 그러니까 부인이 14층에서 떨어졌는데 다행히 차 위에 떨어졌습니다.
과거를 묻는 것이 뭐가 중요하고, 얼마나 유익을 된다고 그랬습니까? 사랑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경주에 가면 아들 칠 형제가 과부된 어머니에게 효도를 하는데, 저녁마다 군불을 때 드리는데도 어머니는 자꾸 춥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하룻밤에는 맏아들이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춥지 않으실까 생각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냇가를 건너가 거기 있는 홀아비 집으로 건너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계세요?'' 하면서 들어가 피차 외로운 신세끼리인지라 서로 등을 긁어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가야겠다''면서 그 차가운 냇물을 하루에 두 번씩이나 건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군불을 때 주어도 춥지 않겠어요? 그 사실을 알고 아들들이 그 냇물에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아들들이 이렇게 한 것을 알고 엄마가 ''아들들이 땅에서도 잘 되고 죽어서는 별이 되게 해 주소서'' 라고 기도하여서 그 아들들이 북두칠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모에게는 따지면 안됩니다. 부모가 하시는 일을 자식들이 휘여 잡아서 부모를 이기려고 해요?
뭐든지 마음을 넓히고 양보하고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 천국이 이루어지고, 나와 너와의 만남이 이뤄지게 되어 있습니다.
대나무가 부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나무는 항상 바람부는 대로 여유를 가집니다. 그런데도 대나무가 얼마나 강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은 자기 고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무너뜨리지 않는 강팍함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무너뜨리고 회개할 때 하나님 은혜가 임할 줄 믿습니다.

요나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잠들은 요나를 하나님께서 깨우셨습니다.
이번에 우리 교회가 전 교회적으로 하는 벧엘 작전은 이렇게 잠에서 깨는 것입니다. 1998년이 이제 한 달 있으면 끝납니다. 천 년만에 오는 2000년이 일년만 있으면 다가옵니다. 우리는 이 때 회개하고 다시 니느웨로 가야합니다.
기도하지 못한 분들은 다시 기도하고, 성전을 떠난 분은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새벽 제단을 쌓고 저녁예배도 다시 드리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죽지 않고 살고, 버림받지 않고 축복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면 은혜 주시고, 우리가 돌아오면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풍랑도 잔잔케 하시고 다시 일할 기회를 요 나에게 주신 것처럼, 온 교회도 벧엘을 향하여 다시 올라가는 기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찾고 찾았으나 그래도 길을 못 찾았으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다시 구하고 찾으면 마침내 잘 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