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다윗과 미갈은 서로 사랑했을까?

‘미갈’이란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딸이었는데 다윗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사무엘상 18:20).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답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한 일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느낌표까지 동원하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분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것이 상당히 놀라운 일입니다. 성경에도 결혼하는 얘기가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결혼 당사자들의 애정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물며(!) 여자가 남자를 사랑했다는 말은 더욱 찾아보기 힘듭니다. 형편이 이러니 미갈이 다윗을 사랑했다는 사무엘상 18장의 말씀은 극히 예외적인 말씀입니다. 미갈은 다윗과 결혼하기 전부터 그를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사랑은 매우 비극적이었습니다.

미갈의 비극은 아버지 사울이 딸의 사랑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기로 한 데서 시작됐습니다. 그는 다윗에게 블레셋 군인 1백 명을 죽여 그들의 남근 1백 개를 가져오면 미갈을 다윗에게 시집보내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사울은 자기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랑을 이용하려 했으니 그는 좋은 아버지였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사실 사울은 다윗에게 딸을 줄 생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 1백 명을 죽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제안은 본래부터 다윗을 죽이려는 계략에 불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정말 블레셋 군인 1백 명을 죽여서 그들의 남근을 가져왔습니다. 사울은 어쩔 수 없이 미갈을 그에게 아내로 줄 수밖에 없었겠지요.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다고 했지만 다윗은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다윗도 미갈을 사랑했을까요? 매우 궁금한 이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다윗도 미갈을 사랑했는지, 아니면 그에게 결혼은 사랑과는 무관한 정략결혼이었는지에 대해 성경은 일언반구 말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궁금한 점은, 만일 다윗이 미갈을 사랑하지 않고 단순히 그녀와 정략결혼을 했다면 그런 다윗을 미갈이 여전히 사랑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장인인 사울과 사위 다윗의 사이가 점점 나빠지더니 급기야 서로 죽이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사이가 됐습니다. 이 와중에 힘없는 다윗은 도망자의 신세가 되고 말았지요. 도망가면서 아내 미갈을 데려갈 수는 없었을 겁니다. 물론 목숨처럼 사랑했다면 그랬겠지만 다윗은 미갈을 남겨두고 혼자 도망자의 길에 올랐습니다. 미갈과는 그렇게 헤어졌지요. 다윗이 도망간 후에 사울은 미갈을 발티엘이란 사람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이 결혼은 아마 그녀의 발티엘에 대한 애정, 또는 발티엘의 미갈에 대한 애정 여부와 상관없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사울이 죽고 나서 다윗이 남쪽 유다의 왕이 됐습니다. 다윗은 아직 전체 이스라엘의 왕에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습니다. 북쪽 열 지파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다스리고 있었는데 사실 그는 허수아비에 불과했고 군사령관 아브넬이 실권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 사이가 나빠져서 아브넬이 다윗을 찾아가 두 나라를 통합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때 다윗은 통합에 합의하면서 조건을 하나 내걸었습니다. 사울의 딸이요 과거 자기 아내였던 미갈을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 그 조건이었습니다. 이때 미갈은 발티엘의 아내로 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 사실을 몰랐는지, 알면서도 그녀를 데려오라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하 3장에는 이렇게 해서 발티엘과 미갈에 헤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발티엘은 미갈과 헤어지기 싫어서 바후림까지 울면서 따라왔다고 했습니다. 발티엘은 미갈을 진정 사랑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헤어지기 싫어서 먼 길을 따라왔겠지요. 그는 아브넬이 돌아가라고 하자 할 수 없이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아브넬이 곱게 돌아가라고 했을 것 같지는 않네요. 그는 칼을 빼들고 발티엘을 위협했겠지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다윗은 왜 미갈을 데려오라고 했을까요? 나라를 통합할 때는 통합을 요청해온 쪽에 대고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많았을 텐데 왜 그는 하필 미갈을 데려오라 했을까요? 많은 요구 사항들 중 하나도 아니었습니다. 유일한 요구사항이 그것이었지요. 다윗이 미갈을 죽도록 사랑했기 때문일까요? 글쎄, 과연 그랬을까요? 한편 미갈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녀는 여전히 다윗을 사랑했을까요? 빼앗겼던 사랑을 되찾게 됐다고 좋아했을까요? 그래서 울면서 따라오는 발티엘은 안중에도 없었을까요? 어쨌든 그녀는 다윗에게 가서 그의 아내가 됐습니다.

미갈은 사무엘하 6장에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올 때 다윗은 너무 좋아서 거리에 나가 거의 벌거벗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고 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미갈이 아낙네들 앞에서 왕이 체통 없이 벌거벗고 춤을 췄다고 다윗을 핀잔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자기는 야훼 앞에서라면 그보다 더한 일도 얼마든지 하겠다고 대꾸했지요. 그 뒤로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미 두 사람의 사랑은 식어버렸던지, 아니면 애초부터 사랑이 없었던 지도 모르지요. 그저 단순한 정략결혼이었던 모양입니다. 다윗이 미갈을 달라고 아브넬에게 요구한 이유도 그녀가 사울의 딸이니 그녀를 자기 아내로 데려와야 자기가 사울의 사위가 되어 왕좌를 이을 자격을 갖추게 됐으므로 그랬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서는 안 된다!

지난 주일에도 팔자 사나운 ‘신여성’ 얘기를 했지만 오늘 얘기한 미갈은 정말로 팔자가 사나운 여자였다 하겠습니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사랑과 무관하게 결혼하는 사람이 대다수였을 텐데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에 성공했으니 행복한 여자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결혼은 사랑과는 무관한 정략결혼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미갈은 자신의 의지와 달리 그와 헤어져서 다른 남자와 살다가 정치상황이 바뀌자 첫 남편에게 돌아가서 살았지만 이미 둘 사이에서 애정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녀의 생은 비극적으로 끝났습니다.

이와 같은 미갈의 결혼생활을 보면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다른 세계의 얘기처럼 들립니다. 여자가 상황에 따라 탁구공처럼 왔다 갔다 하는 판에, 부모의 의지나 정치상황에 따라서 이 남자의 아내가 됐다가 저 남자의 아내가 됐다가 하는 판에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날에도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이 말씀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결혼식 때 성혼선포 순서에서 주례 목사가 이 말씀을 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때문에 이혼하려다 못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만일 이 말씀을 교리나 원칙으로 받아들이면 이혼은 절대 불가합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부부는 하나님께서 친히 맺어주신 것이므로 일단 부부가 됐으면 좋으나 싫으나 죽을 때까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 같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원칙이나 교리처럼 들립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사람이 많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말씀이 얘기된 맥락에 비추어서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떠보려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이들에게도 결혼은 하나님께서 짝지어준 사람과 하는 것이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뜻과 인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란 믿음을 이들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계명과 현실 사이의 괴리 또한 이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면 안 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현실은 그 원칙을 지킬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실 율법에도 ‘예외’가 늘 있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야 할 경우가 있다는 사실은 자기들도 알고 있는데 과연 그때가 언제냐고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물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일렀느냐?” 예수님은 이 질문에 질문으로 응대하셨습니다. 모세의 말이라고 했지만 모세가 자기 마음대로 전한 말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가리키는 말임을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곧 “하나님의 계명은 뭐라고 일렀느냐?”라고 예수께서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모세는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왜’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어떻게’에 대한 대답입니다. 절차와 이유가 완전히 분리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두 문제는 엄연히 따로 생각해야 할 문제들입니다. 사실 중요한 문제는 왜 아내를 버리려 하는가, 왜 이혼하려 하는가, 이것이 아닙니까? 이혼의 절차야 시대와 문화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혼장을 써주고 이혼하라 했다고 대답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너희의 마음이 굳을 대로 굳어져서 이 법을 제정해 준 것이다.” ‘마음이 굳어지다’는 뜻의 희랍어 ‘스크렐로카르디아’라는 말은 말 그대로 마음이,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졌다는 뜻입니다. 간경화 환자의 간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어떤 계명을 주든지 이 현실을 감안하지 않으면 효율성이 없으므로 원칙은 그렇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이혼장을 써주고 이혼하라는 계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본래는 어땠는지, 원칙은 무엇이었는지를 말씀합니다. “천지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므로 할 수 없이 주신 계명을 원칙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본래로 돌아가라고, 근원에서부터 생각해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근원은 창세기 1장 2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이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어떤 특별한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성별이나 피부색,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해석을 남겼습니다. 그것을 자유의지라고 해석한 사람이 있었고, 언어능력이라고 해석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반면 청지기 직분이라 이해한 사람이 있었고 인간만이 갖고 있는 종교성이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성품이라고 해석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잘 표현한 말씀은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이해한 고린도전서 6장 19절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신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인간의 어떤 부분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인간의 어느 구석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거룩한 집(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거룩을 향해 열려 있는 창문

사랑은 매우 소중한 가치입니다. 사랑은 부부 사이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소중하게 보듬고 가꿔나가야 할 보물 같은 가치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은, 사랑은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늘 한결같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사랑은 변합니다. 뜨겁게 불타오르는 순간이 있는 반면 차갑게 식어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뜨겁게 불타는 사랑에 감격할 때도 있지만 식어버린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는 순간도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사랑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한결같지는 않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부부 사이에 중요한 가치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신뢰는 사랑만큼 뜨겁지는 않아도, 사랑만큼 불타오르지는 않아도 부부 사이를 굳건하게 떠받치고 있는 토대라고 하겠습니다. 신뢰는 사랑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둘은 함께 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화끈하게 타오르는 불꽃이라면 신뢰는 은은하게 타오르는 숯불 같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쉽게 타오르지도 않지만 쉽게 꺼지지도 않는 것이 신뢰입니다. 신뢰는 믿을만하기에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믿어주기에 믿을만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부부 사이에는 상대방이 거룩한 것, 또는 성스러운 것을 향해 열려 있는 창문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본질적으로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습니다. 거룩한 것, 성스러운 것을 향해 열려 있는 창문을 하나씩 갖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은 각자의 창문을 통해 거룩한 것을 보고 성스러움을 경험합니다. 부부가 처음 결혼하면 각자 자기의 창문을 통해 거룩을 바라보고 성스러움을 경험하다가 함께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자기들의 창문이 겹쳐짐을 경험합니다. 같은 창문을 통해 바라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것을 보는 눈이 비슷해지고 성스러움을 느끼는 경험이 닮아갑니다. 물론 조금씩 오랜 시간이 걸린 후에 비로소 닮아가는 것이므로 처음에는 잘 인식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에 둘이 바라보는 창문이 많이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분이 자기 반려자에 대해 불평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무 맞지 않아서 다투면서 살아온 지난 세월이 후회된다고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상대방이 이 말을 듣고 “이젠 너무 늦었어!” (Too late!)이라고 말해서 듣던 사람들이 모두 웃었습니다. 저는 어제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 ‘too late’이란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너무 늦지 않았습니다! It is not too late! It may be too early! 오히려 너무 이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거룩을 내다보는 창문, 성스러움을 경험하는 창문을 일치시키기에는 지난 세월이 너무 짧았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난날을 후회하기에는 상대방의 창문을 궁금해 하는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상대방이 내다보고 있는 창문을 기웃거린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그래서 부부 사이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부 생활을 하면서 날마다 사랑과 신뢰를 쌓아가는 부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어차피 변하게 되어 있으니 믿을 것이 못 된다고 지레 결론내리지 말고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리고 서로 신뢰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신뢰가 그 사람을 신뢰받을만한 사람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남편/아내가 어떤 창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만나는지 호기심을 갖고 부지런히 엿보면서 비슷한 점이 발견되면 마음껏 기뻐하시고 감사하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