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성목사 (영도중앙교회)

한 대학 교수가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가 뱃사공에게 물었습니다. "여보게, 자네 철학을 아는가?" "모릅니다." "허허, 자네는 생애의 4분의 1을 잃었군. 그럼 지질학을 아는가?" "전혀 모르는데요." "그럼 생애의 절반을 잃었군. 천문학은 아는가?" "들어보지도 못했습니다." "자네는 생애의 4분의 3을 잃었군." 그 때 갑자기 배가 기울어져서 둘 다 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공이S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헤엄칠 줄 아십니까?" "못 치네." "그럼 교수님은 생애의 전부를 잃었군요!"
이 이야기 속의 교수님은 자신의 지식을 자부했습니다. 분명히 세상에는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차이들이 많이 존재합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과 지식이 적은 사람, 부자와 빈자, 권력자와 보통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비교가 무색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살고 죽는 문제가 생기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에는 지식도, 재산도, 권력도 빛을 잃습니다. 그 때는 살아남는 사람만이 위대합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심각한 순간에도 "누가 더 유식하냐, 부자냐, 높으냐"로 따진다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대부분이 이런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세요.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은 "누가 크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점잖게 질문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누가복음 9장 46절에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라고 되어 있는데, 공동번역 성경에 의하면 "제자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으냐 하는 문제로 그들 사이에서 말다툼이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위대하신 주님 앞에서 누가 크냐고 다투었습니다. 서로 잘난 척 하는 것처럼 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 그런 일로 다투지 말도록 꾸지람을 받았는데도 또 그렇게 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4절을 보면 "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고 했습니다. 9장에서 이 문제로 다투더니, 같은 문제로 또 다투었습니다. 그것도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다툰 자리가 최후의 만찬을 먹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 두 시간 후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실 것이고, 몇 시간 후에는 십자가에서 죽으실 텐데,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다투고만 있으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선생님이신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고자 하시는데, 제자들은 높아질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 보다 조금만 더 나아도 우쭐한 게 우리 마음 아니던가요?

더구나 제자들의 더 심각한 문제는 그 관심사가 이 세상에서의 일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누가 더 크냐"로 다툰 게 아니라, "천국에서 누가 더 크냐"를 가지고 다투었습니다. 이 문제를 천국에까지 가지고 갈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천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천국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경쟁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다른 사람을 밟고 위에 올라서서 우쭐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이 세상과 다릅니다. 천국이 이 세상과 똑같다면 무엇 때문에 천국에 가려고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천국과 이 세상이 완전히 차원이 다름을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누가 크냐"를 두고 다투는 것은 잘못된 관심사입니다. 정말 제자들이 가져야 할 관심이 있다면 "천국에서 누가 크냐"가 아니라,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것인가"입니다. 우선 천국에 들어가는 게 문제입니다. 천국에서 누가 큰지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상주실 때 보면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2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파격입니다. 예수님은 어른을 세우지 않으시고, 당시에 사람 숫자에 계산도 하지 않던 어린아이를 세우셨습니다. 어린이는 변두리 인물입니다. 세상은 어른 중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가운데 세우셨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파격이 여러 군데 나옵니다. 어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그곳에 있던 한 편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세우시고, 그의 손을 치유하셔서 그 날의 주인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또 다윗은 완전히 성숙한 청년이 못되었지만, 골리앗을 이기고 전쟁터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사울 왕도, 그 어떤 장군도 그 날 다윗보다 못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어린이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말씀하심으로써 엘리 제사장 보다 더 존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신 일은 우리 공동체의 질서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영도중앙교회에서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까? 얼마 전에 교우들께서 제게 큰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제게 큰 박수도 보내주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좋은 교회가 되려면 교역자들, 장로님들, 권사님들, 수고 많이 하는 분들을 알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우리 교회가 더 아름다운 교회가 되려면,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한 가운데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자를 가운데 세워야 합니다. 한 편 손 마른 사람처럼 약자를 가운데 세워야 합니다. 어려운 이들을 가운데 세우고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목사를 가운데 세워주고 박수를 쳐주는 여러분들이 교회 안의 약자를 깔보고 돌보지 않는다면 정말 가슴아픈 일입니다. 여러분, 저를 대접하려고 하지 마시고, 교회 안의 어려운 이들을 대접하십시오. 제게 잘 하려고 하지 마시고, 교회 안에 힘들고 인정받지 못하는 분들에게 잘 하십시오. 특히 어린이들에게 잘 하십시오. 그런 모습을 볼 때, 저는 기쁩니다. 그리고 주님이 가장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 구절로 가 봅시다. 어린이를 가운데 세우신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3절을 보세요.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보세요. 주님은 "천국에서 누가 크다"는 식의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지고 말씀하셨지요? 이것은 "큰 자가 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 주님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린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거꾸로 어린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불가능한 세월의 역류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린아이가 어떤 존재이기에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4절을 보면 그 특징 한 가지가 나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어린이의 특징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것", 이것은 제자들의 관심과는 정반대입니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다투었습니다. 큰 자가 되고 싶어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그게 어른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자기를 낮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조건으로 겸손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문제는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겸손해질 수 있습니까? 앞에 나서서 말을 많이 하지 않고 한 구석에 앉아 침묵하고 있으면 됩니까? 아닙니다. 겉으로는 침묵해도 속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책잡는 게 우리 못된 본성입니다. 아니면, 날마다 "나는 못난이야"라고 자책하면 겸손해집니까? 아닙니다. 백 번을 그렇게 해도, 순간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욕망을 잊고 주님을 닮고자 사막에서 묵상하면서 수도했습니다. 사단이 유혹합니다.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으로 유혹합니다. 물질로 유혹합니다.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지쳤습니다. "저 수도사는 진짜 예수쟁이다"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한 악령이 말합니다. "제가 수도사를 타락시키겠습니다" 악령이 수도사에게 다가와 속삭입니다. "네 동생이 이번에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단다" 그러자 그렇게 경건하던 수도사가 갑자기 흥분하더니 "그 형편없는 녀석이 어떻게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될 수 있나? 그 자리는 내 자리야!" 수도사는 동생과 비교하여 교만한 나머지 실패하였습니다.
이게 우리 본성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겸손할 수 있나요? 우리는 여기서 위대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합니다. 어거스틴은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놀라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른이 어린아이가 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된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새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과거의 교만하고 죄에 물든 옛 사람을 죽이고, 갓난아이처럼 순결한 새 영혼으로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가끔 교회 안에 보면 새로 믿는 분들 중에서 어린이처럼 순수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 신앙이 아주 순수합니다. 계산하고 따질 줄을 모릅니다. 신앙에 감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날마다 감격하면서 삽니다. 기뻐서 교회에 옵니다. 찬송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어린아이의 영혼을 가진 분입니다. 육체의 나이는 들었어도, 영혼의 나이는 갓난아이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모세의 누나인 미리암과 이스라엘 여인들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찬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얼마나 순수한 찬양인지 모릅니다. 기쁨에 넘치는 찬송입니다. 이렇게 찬송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다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들은 애굽 군대에게 붙잡혀 다시 노예가 되거나 홍해에 빠져 죽었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홍해가 갈라지면서 생명을 건졌습니다. 그 생명은 다시 얻은 생명이었습니다. 그들은 다시 태어난 것과 같았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그들을 어린아이로 만들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이런 찬송을 진실하게 부르는 사람이 어떻게 교만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 순간 주님 안에서 어린아이가 되었습니다. 겸손해지시려면 예수님 안에서 거듭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과거의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십시오. 새로 태어나면 어린이가 될 것입니다.
300장 찬송을 보세요. 이 찬송을 나이가 어린 아이들만의 찬송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의 영혼을 가진 겸손한 모든 사람들의 찬송입니다.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걱정 근심 없고 정말 즐거워 / 예수께로 가면 맞아 주시고 나를 사랑하사 용서하셔요 / 예수께로 가면 손을 붙잡고 어디서나 나를 인도하셔요 /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나와 같은 아이 부르셨어요" 예수님 안에서 기쁨과 감사가 충만한 찬송입니다. 우리 모두 영적으로 어린이로 다시 태어나길 기원합니다. 모든 교만과 더러운 것을 버리고 어린이의 영혼으로 거듭나서 천국 백성이 되길 원합니다.

이제 다음으로 넘어가 봅시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 후에 어린이들을 실족시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6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어린 아이를 실족케 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를 실족시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장난감 사 주지 않는 것입니까? 야단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필요하면 야단도 쳐야 하고, 잘못된 것은 사 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게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로 우리 자녀들을 실족시키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큰 자가 되는 것" 보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함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을 천국의 자녀로 키우지 못한다면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실족시키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날 이새의 집에 이스라엘의 최고 지도자인 사무엘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사무엘이 찾아온 것은 하나님이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새가 뭘 잘했기에 찾아왔습니까? 이새가 훌륭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자식 잘 둔덕입니다. 자식 잘 둔다는 게 무엇입니까? 똑똑하고 잘 생긴 자식을 둔 것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자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녀가 누구였습니까? 다윗이었습니다. 이새가 일생에서 가장 위대한 성공이 있다면 "다윗"을 낳은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출중한 외모를 가지지 못했고, 막내의 설움을 받았으며, 집안 허드렛일이나 하고, 양떼나 먹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름다운 영혼이 있었습니다. 출중한 영성이 있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는 영안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녀를 어떻게 키우고 있습니까? "누가 크냐의 경쟁에서 이기는 자녀"를 만드는 일에만 치중하지 않습니까? "천국의 자녀"로 키우는 일에 소홀하지는 않습니까?
어거스틴의 "참회록 제2권 제3장"을 보면 부모를 원망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당시 멀리 유학 길을 떠나는 자식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힘에 겹도록 마련해 주는 아버지에 대하여 칭찬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으나, 자식을 위하여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정상적으로 성장해야 하며, 정결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에 관하여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유일한 소망이 있다면 자식이 훌륭히 학업을 마치고 세상적으로 성공하기를 원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나의 마음의 밭을 경작하시는 농부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뿐이었습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자녀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주목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신체가 건강한 자녀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주목을 받을 수 없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방문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혼이 아름다운 천국의 자녀를 만드십시오. 그렇게 키우지 못한다면 우리 자녀들을 실족시키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의 자녀를 키우면 가정에 영광이 옵니다. 다윗으로 말미암아 베들레헴의 보잘 것 없던 이새의 가정은 왕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을 키웠더니, 그것은 큰 자가 되는 복까지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큰 자가 됨으로써 천국 백성이 되는 게 아니라, 겸손한 천국 백성이 됨으로써 큰 자가 되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4절의 말씀처럼 "자기를 낮추는 그가 천국에서 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우리 각자가 거듭난 겸손한 어린아이가 되길 기원합니다. 아울러 우리 자녀들을 천국의 자녀로 키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