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익목사 (신촌성결교회)

신앙생활은 참 좋은 생활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잘 조화된 삶이 신앙의 삶입니다. 그래서 가장 이상적으로 성숙한 인간상을 말하라고 하면 이렇게 영육이 잘 조화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인간상에 거의 가까운 인간형이 영육이 조화된 인간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성격적으로 정서적으로 신앙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성품을 타고난 것도 은혜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우선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면 그 신앙이 다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보면 극단으로 치우친 신앙형태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좌편으로 치우친 신앙형태가 있고 우편으로 치우친 신앙형태도 있습니다. 신앙이 이렇게 치우치게 되면 그 생활이나 영적 생활이 불건전하게 됩니다. 우선 생활에 질서가 무너집니다. 일상생활에 질서를 잃게 됩니다. 역사를 보면 이 신앙이 좌우로 치우친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영적인 면만 강조하는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에도 영적인 면만 강조하는 신앙형태가 있습니다. 신앙이 이렇게 영적으로 한편으로 치우치게 되면 현실생활을 무시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초대교회 시대 즉 1세기경에 극성을 부렸던 영지주의가 그랬습니다. 영지주의에서는 육신은 부정했습니다. 세상을 원수시 했습니다. 세상을 부정했고 경원시 했습니다. 그리고 영만 성결하고 깨끗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육신적인 현실의 생활은 무시하고 아주 무질서하게 살았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 영지주의가 큰 해악을 미쳤습니다. 이 영지주의에서는 영과 육을 분리해서 이원법을 적용합니다. 그래서 영은 우월하고 육신은 부정한 것으로 강조했습니다. 육신적인 삶에 무게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육신적인 삶은 무질서했습니다. 한때 기독교가 이 신앙형태에 상당히 영향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신앙생활의 이상형으로 사람들은 디오게네스의 삶을 본 받았습니다.

디오게네스(DiogenesSinope BC 412-323)는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한 개의 옷 보따리와 지팡이만 가지고 걸인 생활을 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알렉산더 대왕이 나라에 공을 세운 디오게네스에게 상을 내리려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부름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대왕이 그가 살고 있는 곳을 직접 찾아갑니다. 가서 보니까 아주 초라한 움막 속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왕은 “내가 상을 내리고 싶으니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습니다. 디어게네스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쳐다보지도 않고 “좀 비켜주십시오. 햇빛이 가립니다”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모습에 이 왕이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시종에게 “내가 왕만 아니었더라면 저 사람처럼 살고 싶다“고 심정을 피력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사람이 정신만 깨끗하면 되지 살아가는 것이 무슨 상관이냐 해서 현실 삶을 부정하고 개처럼 아무 곳에서 잠자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개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후대사람들은 그를 견유파(犬儒派)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신앙인들이 이상적인 신앙의 삶으로 느꼈던 삶이 바로 이런 삶이었습니다. 이들은 현실 삶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생활에 무질서했고 규모가 없었습니다. 이 사상이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들은 멀리해야 하는 이단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생활에 질서가 없고 규모가 없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중세기로 들어오면서 수도원 주의가 강조되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수도원 생활이 극성을 부렸습니다. 너도나도 수도원으로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에서 수양하고 침묵의 삶과 성경연구와 현실 삶을 외면하고 나만 구원받고 성결해지겠다고 애썼습니다. 말하자면 현실 도피적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극적인 삶입니까. 거기 들어가 살면 죄를 지을 수도 없습니다. 갇혀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곳에 갇혀 살면서 나만 구원받겠다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소극적인 신앙인들이 세상을 향해서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느 여성 단체에서 “미스터 남성”을 선발하여 상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천 타천으로 수천 통의 추천서를 받았습니다. 그중 눈에 띄는 추천서는 자천 추천서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니 쓸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여자를 구타하지 않습니다. 매일 규칙적인 삶을 살아 6시면 일어나고 10시면 취침합니다. 영화, 비디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주일은 하루 종일 교회에서 예배드리며 보냅니다. 하루도 외박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건실한 남성입니까. 그래서 본부 측에서 확인할 겸 전화를 걸었더니 “여기는 영등포 교도소입니다”하고 받습니다.

가끔 산 속에서 수도승이 타계하면 성자 하나를 잃었다고 전파를 탑니다. 그는 평생 한 벌 옷밖에 없었다고 대서특필합니다. 엄밀히 생각해 보십시오. 산 속에서 세상을 등지고 수도하는 수도승이 두벌 옷이 왜 필요합니까. 그리고 산 속에서 혼자만 구원받겠다고 수도하는 사람에게 욕심이나 소유나 탐욕이 왜 일어나야 합니까. 그리고 나만 구원받겠다고 혼자 수도하는 사람이 무슨 성자입니까. 그런 성자노릇 누구는 못합니까. 성자는 세상을 구원하며 함께 고난을 겪으며 그러면서 그 세상에서 모든 것을 초월하고 고고하게 살아야 그 사람이 성자인 것입니다.

루터가 한 때 수도사가 되어 수도원에서 피정의 삶을 살고 세상과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수도사 생활을 하던 루터가 한번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인가?”, 그러면서 그 삶에 회의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병자와 가난한 자와 낙오자와 멸망당할 자들을 위해서 하늘을 저버리고 이 땅에 오셨는데 우리는 이렇게 산중에서 수도나 하고 나 혼자 성결하고 온전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힘쓰는 이 삶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결국 루터는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살아갈 삶이 아니다“ 하고 수도사 생활을 청산하고 세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루터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힘쓰며 살아갔습니까. 신앙은 현실 속에서 꽃을 피워야 하고 현실 속에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모두 수도원으로 산으로 들어가서 현실을 버리면 누가 세상을 구원하고 복음을 전합니까. 그럼에도 당시 이런 수도원에서는 세속적인 것과 현실의 삶과 성적인 것을 모두 부정했습니다. 그리고 금욕을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성을 죄로 여겼고 수치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금욕주의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성을 억제해야 하는 죄악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성적 수칙을 보면 율법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출산 후 40일 이내에는 아내와 합방하지 말라, 범하는 자는 걸신에 씌울 것이다, 그리고 금식일, 축제일은 거룩한 날이니 쾌락으로 거룩한 날을 욕되게 말라, 범하면 불경죄를 짓는 것이라는 식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당시 일년에 축제일이 며칠이나 되었는가 하면 273일이었습니다. 그 축제일에 부부가 동침하다가 발각되면 중벌을 당했습니다. 이 수도원주의가 이런 금욕주의를 낳았습니다. 이 금욕주의가 나중에는 인위적으로 흘러가고 율법화 되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성이 자꾸만 음지화 되었고 양지에서는 수치심과 죄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오늘도 상존합니다. 오늘도 보수파 교회에서는 이 문제들을 아주 권위적으로 율법적으로 해석합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부정적인 설교 3년만 들으면 모두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참 무서운 영향입니다. 그래서 스승을 잘 만나야 하고 국가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하고 또 목회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신앙은 무한한 자유함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삶은 삶에 약동하는 힘과 능력과 동기와 힘을 공급받아야 하는 영적 생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영적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치우치면 그렇게 부정적인 모습이 우리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육신적인 것에 편향된 신앙” 입니다.

오늘은 또 정반대로 영적인 것 보다 육신의 삶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는 현실주의가 문제입니다. 오늘은 이 영이 너무 무시되고 육신적인 삶이 너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들도 모두 외적인 면에 치우치고 있습니다. 시설을 확충하고 외형위주로 나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도소리가 점점 적어져가고 있습니다. 또 오늘 신앙인들도 너무 현실적인 삶에 집착하고 살아갑니다. 소유하는 일에 골몰하고 더 누리고 더 편안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녁예배가 안됩니다. 구역예배가 안 됩니다. 이것이 영적 생활은 소홀히 하고 육신적인 것을 강조하는 습성입니다. 그러는 동안 이 영적 생활은 등한하고 소홀하고 회피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영적 생활이 메말라가고 고갈되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아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영성을 부여받아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에 집착하느라고 영성이 메마르고 부족하게 되니까 삶에 갈등이 일어나고 부조화가 발생하고 불화가 발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너무 인간주의나 육신주의의 편안함에 치우치게 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갈등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세상이 이렇게 갈등이 많고 원망이 많고 인간주의로 흐르는 것입니다. 너무 인간주의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신앙인들은 “나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보다 나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복을 받을까”를 생각합니다. 나는 어떻게 순종할까를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를 기도합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더 충성할까를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복을 받을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것이 영적 삶을 등한한 결과 나타나는 모습들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좌우로 치우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이 이렇게 되면 껍데기와 형식과 모양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 안에 수단과 인간주의만 남은 것입니다. 인간주의가 강하면 영적 부분이 약화되어 수단이 난무하는 삶을 살게 되고 영만 강조하게 되면 현실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무엇이나 치우치면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영육의 일체감을 이루는 신앙” 이 가장 바람직합니다.

영적인 부분과 현실적인 삶이 잘 조화된 신앙이 가장 건강한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선 건강한 신앙인은 현실의 삶을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가는 것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웨슬레는 “이 세상에서는 천년 살 것 같이 열심히 살고 신앙적으로는 내일이 종말의 날인 것 같이 유념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그 삶이 질서가 있고 규모가 있고 뜻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래야 합니다.

어느 노인이 밭에 과일나무를 열심히 심고 있습니다. 지나가던 노인이 말합니다. “언제 열매가 맺혀서 따먹겠다고 과일나무를 심는가”. 그때 이 노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과일을 꼭 내가 따먹어야 맛인가, 열매가 일찍 열면 나도 따먹지만 늦으면 내 자손들이 따먹을 것이 아닌가”하고 말합니다. 그 생각이 가장 바람직한 건강한 생각입니다. 그 삶에 규모가 있고 질서가 있고 생각이 있고 뜻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신앙인들은 이 세상을 그런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동시에 영적인 면을 보완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으로 다가 아닙니다. 동시에 묵상생활을 통해서 영적 부분을 충족시키는 일도 게으르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루 종일 제자들과 바쁘게 일하십니다. 저녁때는 몸이 피곤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이 끝난 시간에 제자들을 따로 보내놓고 예수님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22절을 보면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왜냐하면 영과 육의 조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입니다. 비록 몸은 피곤했지만 산으로 올라가 영적 내용을 충전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가장 건전한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야 앞에 놓인 십자가도 무난하게 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그 십자가마저 무사히 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순리대로 마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세상에서 열심히 살고 세상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도 인도하고 그들과 더불어 살고 때로 빛과 소금의 삶을 살고 헌신의 삶을 살고 봉헌의 삶을 살고 중보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영적 수준을 위해서 묵상하는 삶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삶, 이것이 가장 건강한 신앙인의 삶이고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유념할 것은 이 영적 생활을 반드시 보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묵상생활을 늘려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육신의 삶을 부정해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영적 내용만 강조해도 안 됩니다. 육신과 영적 생활은 별개가 아니고 연합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건강한 신앙인의 삶입니다. 오늘은 그렇게 살아가야 이 세속사회에서 우리의 신앙을 건강하게 지키고 영적 생활을 효과 있게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