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그렇게 쉽게 나눌 수 있나?

저는 정작 기억해야 할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것을 잘 기억하는 편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나도 그런데...' 하실 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 설교 준비를 하다가 문득 어떤 말이 떠올랐는데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겨우 생각해낸 것이 영화에 나오는 대사였다는 사실인데 제목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있으면 제게 알려주십시오. 영화에서 택시 운전수가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 사람은 오비 베어스(OB Bears)의 박철순 선수를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멋있기는커녕 우스꽝스런 이 말을 기억하려 애쓴 제가 우습기도 합니다. '초인문학'(흔히 '무협지'라고 부르는 장르)의 대가로 일컬어지는 김용이란 작가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에게서 들은 얘기인데 작가 김용의 열렬한 팬들은 세상 사람을 김용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으로 나눈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분류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습니까. 잠깐 웃으려고 하는 말이라면 이해하겠지만 정말 심각하게 세상 사람을 박철순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김용을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는 일은 어처구니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실제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으로 나눕니다. 비기독교인은 그렇게 살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기독교인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입니다. 둘을 하나로 놓고 생각하는 경우도 별로 없고 또 각각을 더 자세하게 나눠서 생각하는 경우도 별로 없습니다. 기독교인에게 불교인이나 이슬람교도는 불교인이나 이슬람교도가 아니라 비기독교인일뿐입니다. 각각의 차이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단순한 이분법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교회가 하는 많은 일들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신자를 갖고 있는 큰 종교들 중에 자기 종교를 전파하는 데 안간힘을 기울이는 종교는 기독교, 특히 개신교밖에 없습니다. 한국 가톨릭의 교인 숫자는 대폭 늘었는데 개신교의 교인 숫자는 줄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는데도 불구하고 숫자가 줄어든 것을 보면 숫자의 증가와 전도의 열정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신교는 여전히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협박이라도 해서 전도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세상에 비기독교인이 한 명이라고 남아있으면 큰일 날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 주일과 수요일에 내년도 예산을 세우기 위한 예산위원회가 열렸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내년도 목회 목표 두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첫째는 연초에 세울 예산이 얼마가 되든지 연말에 그 액수에 모자라지 않은 결산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상반기가 지난 후에는 성인 출석인원이 50명이상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만하면 소박하지요? 교인이 50명이 되려면 제가 먼저 전도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협박하지 않고 전도하나 지금부터 걱정입니다.




정말 당신이 그 분입니까?

세례자 요한이 옥에 갇혔습니다. 그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며 병자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런 예수님의 활동을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요단강가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 때 자기에게 세례 받으러 나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당신이 나오십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군중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나는 바로 이 분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라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당시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믿음은 흔들림 없이 확고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도끼로 찍어 불에 던질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이 벌인 활동을 보지 못하고 옥에 갇혔습니다. 외부와 단절됐던 것입니다.

요한의 최대 관심사, 아니 유일한 관심사는 메시아였습니다. 그는 옥에 갇혀서도 그것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과연 자기가 메시아라고 믿는 예수님이 언제 사람들에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까? 언제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구원할까? 이것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면회를 온 제자들을 통해 간간히 듣는 예수님의 행적은 요한의 기대와는 크게 달랐습니다. 그분은 심판의 도끼를 휘두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그가 얼마나 답답했을까는 우리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물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은 사람은 행복하다.




수수께끼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과연 무슨 뜻일까요? '오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나다.'라든가 '내가 아니니 다른 분을 기다려라.'라고 분명하게 대답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드셨을까요?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중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확고한 대답을 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요한은 확고한 답변을 원했지만 예수님은 표징으로 응답하셨습니다. 궁극적 진리에 대해서는 확고한 답변은 있을 수 없습니다. 확고한 답을 준다는 사람이 있으면 진실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세상 안에서 그 진리가 실현되는 표징들(signs)을 볼 수 있을 따름입니다. 표징을 보고 그것을 올바르게 해석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진리에로 다가가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요한의 물음에 대답하셨습니다. "그날 귀머거리는 책 읽는 소리를 듣고 캄캄하고 막막한 소경도 눈을 떠 환히 보리라"(이사야 29:18). "그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야 35:5-6). "주 야훼의 영을 내려주시며 야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고 나를 보내시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이르셨다"(이사야 61:1).

예수님은 당신의 활동을 통해서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물론 우회적인 대답이지만 사실 이 대답은 단순히 '내가 기다리던 바로 그 사람이다.'라는 내용을 넘어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선포한 복음으로 인해 새로운 시대가 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옛 시대와 새 시대의 차이는 악인이 심판을 받느냐 마느냐에 있지 않고 세상을 지배하던 악한 영의 세력이 승승장구하느냐 패배하느냐에 있습니다.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할 일은 악인을 심판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메시아가 할 일은 악한 영과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메시아로서 예수님이 벌인 투쟁은 궁극적으로 영적인 투쟁이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그 동안 세상을 지배해온 악한 영이 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던 것입니다.




가장 작은이도 그보다 크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지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신 다음에 예수님은 요한을 극찬하셨습니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큰 사람이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 지난 주일에 읽은 바로 그 구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곧 이어서 다음의 한 마디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요한을 그토록 극찬하신 다음 곧바로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 사람보다는 크다."니! 요한은 과연 어떤 인물입니까? 위대한 인물입니까, 아닙니까? 그 다음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 한다. 그러나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하는 일은 요한에게서 끝난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누가 하늘나라를 폭행한다는 것인지, 하늘나라를 폭행하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다만 "모든 예언서와 율법이 예언하는 일은 요한에게서 끝난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요한의 시대와 그 이후 시대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갈수록 태산이란 말이 있는데 여기에 딱 맞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알아들어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들을 귀를 갖추지 못한 모양입니다.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 수 없으니 말입니다. 어쨌든 이 단락의 마지막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이 시대를 무엇에 비할 수 있으랴?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을 갈라 앉아 서로 소리 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이 말씀은 앞의 말씀보다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모여 놀고 있습니다. 한 편에서는 춤추고 즐겁게 놀자고 하고 다른 편에서는 울며 곡을 하는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마음이 모아져야 춤추며 놀든지 곡하면서 놀든지 할 터인데 마음이 모아지지 않아서 놀지 못하는 아이들, 이 세대가 바로 이런 아이들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쳤다고 했고 예수께서 먹고 마시니까 세상은 "저 사람을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린다."고 비난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시대와 예수님의 시대 사이에는 분명히 그 어떤 단절이 있다고 했는데 두 시대가 어떻게 다른지가 조금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요한의 시대는 편 가르는 시대이고 예수님의 시대는 편을 가르지 않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 시대는 사람들끼리 편을 갈라 '내가 옳다' '네가 틀렸다'고 경쟁하고 싸우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폭력적으로 차지하려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대는 에너지를 네 편 내 편으로 편을 가르는 데 쓰지 않고 악한 영의 세력과 싸우는 데 쓰는 시대입니다. 회개한 사람과 회개하지 않은 사람, 물세례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 금욕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등등으로 편을 갈라 서로 대립하고 싸우는 시대는 예수님의 시대가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이 위대하지만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보다 더 작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 역시 메시아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웠지만 편을 가르는 심판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악한 영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전도를 하면서도 감언이설이나 협박으로 대상자에게 기독교라는 옷을 입혀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는 악한 영과의 싸움이고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고 절름발이가 걸으며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전파되는 하늘나라 복음의 표징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는 내년에 50명 이상의 교인이 모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감언이설이나 협박을 전도의 도구로 동원하지 않고 하늘나라의 표징을 보여줌으로써 그렇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