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예수님이 건강한 남성이었다면

저는 지난주에 다빈치코드 현상을 낳은 두 가지 원인을 얘기했습니다. 첫째는 ‘음모설’입니다. 교회는 뭔가 중요한 사실을 감추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데서 숨어서 일을 도모해왔다, 중요한 일들이 비밀리에 결정되어 왔다, 교회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일이라고 선언한 일들은 실제로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사람이 꾸며낸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 아니라 사람이 지어낸 책이다 등등의 음모설이 다빈치코드 현상을 만들어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자녀를 낳았는가 여부입니다. 사실은 자녀의 유무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통 남자들처럼 여자와 동침했느냐 여부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먼저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과연 예수님에게 후손이 있었을까요? 상식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보면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건강한 남성’이었다면 후손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eunuchs who have been made eunuchs by men)도 있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마태 19:12). 예수님이 그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아무런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어느 쪽으로도 확실히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편을 주장하든 ‘추측’일 따름입니다. 소설 다빈치코드는 자손이 있다는 쪽으로 추측하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 동안 예수님에게는 ‘후손이 없다.’고 주장해오지 않고 ‘후손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곧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아가서 하나님이기 때문에 여자와 동침했을 리 없고 따라서 후손이 있을 리 없다고 주장해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 집안의 아들로 마구간에서 태어나 비천하게 살았다는 사실은 그분의 신성에 흠집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여자와 동침해서 자식을 낳았다고 말하면 신성모독이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일반적으로 보통사람이 동침해서 자식을 낳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행위는 창세기 1장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님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남여의 성적 접촉에 대해서 교회는 유독 민감합니다. 거기에 과중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개신교 목사보다 가톨릭 신부들이 더 존경을 받는 것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신부들이 독신인 이유가 큽니다. 곧 신부는 여성과 성적인 접촉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에게 소위 여자문제(여자목사에게는 남자문제겠지만)가 있으면 그 목사는 그것으로 끝장입니다.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은 여자와 동침해서는 안 된다고,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이 문제뿐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라면,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모름지기 이러저러 한다는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여자와 동침할 수 없다는 기준이 이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자격 기준에 부합하기 때문에 그분을 믿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숫총각’이기 때문에 구세주로 믿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그분은 본래부터 하나님이었다

신약성경에 있는 네 복음서들은 이야기를 전개해나가는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처음에는 비밀로 합니다. 예수님에 의해 내쫓겨진 귀신들은 “우리는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라고 외치며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입을 닫아버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군지 모르고 오리무중입니다. 그러다가 베드로의 고백이 전환점이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때서야 비로소 당신께서 고난과 죽임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대놓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를 막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를 ‘사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정체가 완전히 드러난 때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자 로마군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장면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마가복음은 이렇게 예수님의 정체를 점차적으로, 귀납적으로 알려줍니다.

한편 요한복음은 마가복음과 다른 방식을 씁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로고스이고 하나님입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일찌감치 선언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예수님을 점차 깨달아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정체는 이미 드러났고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않느냐를 문제 삼습니다.

마가복음식의 서술이 필요하겠지만 저는 근본적으로는 요한복음의 방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일을 해서, 또는 어떤 기적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고 그런 행동을 하셨으며 그런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은 많았습니다. 기적을 행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남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말이나 그들이 행한 기적이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주지는 않습니다. 남을 위해 죽음 사람들의 희생이 고귀하긴 하지만 그 죽음이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죽음 그 자체 때문이라기보다는 죽은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잘 따져봐서 옳으면 믿겠다는 태도로는 결코 믿음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치에 타당하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태도가 때론 중요하고 필요할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런 태도가 사람을 믿음으로 이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올바로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앎이 신앙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신앙은 궁극적으로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신앙은 성령의 일이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초대교회 역사는 사도행전이 전부는 아니다

다음으로 ‘음모설’에 대해서 얘기하겠습니다. ‘음모’란 증명하기 어렵고 반증하기도 어려운 일에 대해 생겨납니다. 다빈치코드가 제기한 의문들은 모두 그럴듯합니다. 만일 황당무계하다면 소설이 큰 히트를 쳤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더더욱 소설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현혹되지 않으려거든 아예 읽지도 보지도 말라고 교인들을 강요하다시피 합니다.

이런 교회의 태도에서 ‘음모설’이 만들어지고 부풀려집니다. 그 동안 교회는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이를 드러내놓고 공개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신자들의 신앙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쉬쉬하며 숨겨왔습니다. 여러분도 그 동안 교회에 다니면서 궁금한 것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궁금한 점들을 누군가에게 물어본 경험이 얼마나 됩니까? 아마 거의 없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신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습니다. 교회는 물어보는 것을, 의문을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실에서는 질문하는 것이 장려되지만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질문은 곧 의심이고 의심은 곧 불신앙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빈치코드는 초대교회 역사에 대해서 오늘날 교회가 주장하는 것과 다른 주장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 주장들 중에는 옳고 그름을 확인해볼 수 있는 것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이므로 역사 자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 자료가 별로 풍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빈치코드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증명할 길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초대교회의 역사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주인공들만 복음을 전했던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에는 그들 이외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주후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공인을 받고 국교가 되기 전까지 기독교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온갖 종류의 기독교들이 각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다양했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서서히 통일되어갔습니다. 여기에는 힘의 논리도 적지 않게 작용했습니다. 곧 옳기 때문에 살아남았던 것이 아니라 힘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종파들도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하다가 사라져간 ‘영지주의’라는 기독교 종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성경의 기독교와는 다른 기독교를 믿고 전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신학 중심의 정통기독교와 갈등을 빚었고 나중에는 결국 이단으로 몰려 핍박을 받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사라져갔지만 그들의 문서들은 남아있습니다. 도마복음서, 빌립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 유다 복음서 등등 그들은 수많은 문서들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소설 다빈치코드는 꾸며낸 얘기고 픽션이지만 영지주의자들이 남긴 문서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다빈치코드는 영지주의 문서들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다빈치코드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그럴듯하지만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내세우는 두 개의 견해 중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택하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택하든 영지주의 문서를 택하든 그것은 다빈치코드를 쓴 댄 브라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그는 후자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역사’라고 주장하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는 힘 있는 사람의 글’이란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손에 의해 기록된 승자의 역사입니다. 역사는 제국과 더불어 발생했습니다. 제국을 이룬 힘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룬 일들을 없어지지 않을 그 무엇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고 역사책을 썼습니다. 고대 역사책은 요즘 역사책과 서술방법에서 크게 차이가 납니다. 고대 역사책은 신이나 왕에 대한 미사여구 찬사가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간단히 적고 그 사건이 어느 신의 은총으로 어느 왕에 의해서 일어났는지를 장황하게 묘사하는 것이 고대의 역사책입니다. 그러나 그 기본 목적은 고대역사와 현대역사가 다르지 않습니다.

한편 유목민에게는 역사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은 역사를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지 않았습니다. 칭기즈칸은 단 한 줄의 역사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와 몽골 유목민에 관한 역사는 모두 남들이 쓴 역사, 타인의 눈으로 본 역사입니다. 몽골 유목민 스스로 남긴 역사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덤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칭기즈칸의 무덤도 아무도 모르게 감춰버렸습니다.

북미주 인디언들도 이와 비슷한 태도 갖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도 역사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백인들이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인디언들에게 삶의 중요한 일들은 그들의 가무의식(歌舞儀式) 속에 녹아들어가 있고 그들의 기억 속에 기록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일들은 글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이들이 역사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그 어떤 ‘관념’이 그들에게는 없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역사라는 관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역사’라고 하면 무엇을 떠올립니까? 역사는 자기들이 이룬 업적을 지워지지 않은 무엇인가로 보존하고 남겨두려는 목적으로 기록하는 글입니다. 이집트나 중국의 황제들은 죽어서 거대한 무덤이나 썩지 않는 미이라로 남고자 했지만 유목민들은 무덤조차 감춰버렸습니다. 선가(禪家)의 어떤 승려는 “과거는 지나간 것이니 잡으려고 애쓰지만 않는다면 없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과연 유목민이나 인디언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역사입니까? 방금 얘기한 관점에서 보면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역사가 아닙니다. 영지주의자들의 문서 역시 역사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나 사도행전이나 영지주의자들의 문서들은 ‘제국’과 상관없이 기록된 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예수의 업적을 지워지지 않는 무엇인가로 보존하고 남겨두려고 기록된 글들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예수라는 한 놀라운 분과 강렬하게 부딪쳤던 사람들이 그들의 부딪침의 경험을 적은 글들입니다. 사도행전은 복음을 전하면서 성령과 강렬하게 부딪쳤던 사람들의 부딪침의 경험을 적은 글입니다. 영지주의 문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나중에 로마제국과 결합되면서 역사가 ‘됐습니다.’ 역사로 ‘만들어졌다’는 뜻입니다. 내용은 거의 바뀌지 않았지만 그 문서의 의미가 달라져서 역사가 됐습니다.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라는 뜻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복음서나 영지주의 문서나 결코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역사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댄 브라운이 복음서는 꾸며낸 이야기이고 영지주의 문서가 역사라고 전제하고 있다면 저는 그 전제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소설은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걸 역사라고 주장한다면 저는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책들은 역사책이 아닙니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좌우간 역사책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라는 한 엄청난 분과 부딪친 경험입니다. 성령이라는 한 엄청난 분과 맞부딪친 경험을 적은 글이 신약성경입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누가 부모요 형제/자매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바로 이 사람들이 내 부모요 형제/자매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댄 브라운은 혈통적으로 예수님의 후손을 찾았다고 썼습니다. 소피가 바로 그 예수님의 후손이랍니다. 소피가 ‘성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을 따라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부모요 형제/자매다!”라고 말입니다. 이치를 따져서 얻은 지식이 신앙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신앙을 역사적 사실에 근거 지으려 한다면 그 근거는 매우 박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배가 그저 하나의 잔에 불과하듯이, 성의(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입었던 옷)가 하나의 천 조각에 불과하듯이 예수님의 혈통도, 설령 그것을 추적해낼 수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혈통일 따름입니다. 우리 신앙에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지식이나 역사나 혈통이 아니라 성령의 활동이요 성령의 감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내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것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이런 점들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만들어준 댄 브라운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의 역사에 대한 생각에는, 그리고 영지주의 문서를 무비판적으로 역사 자료로 사용한 데 대해서는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