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목사 (토랜스한인연합감리교회)

I. 설교에 들어가기
요즘 한창 세계 영화 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 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Peter Jackson이라는 젊은 감독에 의해 3년에 걸쳐 3부작으로 제작되었습니다. 1편은 “The Fellowship of the Ring”이고, 2편은 “The Two Towers”이며, 마지막 편은 요즘 한창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는 “The Return of the King” 입니다. “반지의 제왕” 3부작 중 1편에서 주인공 Frodo가 반지를 악한 무리들로부터 보호하려다 동료들이 죽어가고, 그 반지에 때문에 동료들 마음에 갈등과 배신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에 커다란 회의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반지를 오른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렇게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지요. “이 반지가 내게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I wish this Ring had never come to me. I wish none of this had happened.).”

II. 본문 요지 설명
세례 요한이 요단 강가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펼쳐나가고 있던 어느날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분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분도 아니시고, 태어나서 죄를 짓지도 않았던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뭍으로 올라오는 예수님을 성부, 성령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비둘기같이 예수님께 내려와 그를 감싸 안으셨고,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께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부,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절대적 인정을 한 몸에 받은 예수께서는 그쯤 되었으면 이젠 30년의 준비기간을 끝내고 사역으로 곧장 뛰어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사역 현장으로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역 현장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광야 속으로 내몰아가셨습니다. 광야에서 머물렀던 40일 동안 예수님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해 배고픔으로 큰 고통을 느껴야했습니다 (눅 4:2). 그곳에서 예수님은 40일 동안 사탄이 주는 끊임없는 유혹과 싸워야 했습니다. 광야에서 사탄과의 끊임없는 영적 전쟁을 치루던 예수님은 광야의 사나운 들짐승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광야생활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그곳에서 버티셨습니다. 그리고 40일이 끝나자 사탄은 예수님을 떠나갔고, 하나님의 천사가 지쳐 쓰러진 예수님을 돌보아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광야생활이 있습니다. 자신이 원치는 않지만 처해 있는 어려운 삶의 현실이 바로 그 광야입니다. 힘들고, 고달프고, 낙심만 됩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상황은 오히려 꼬여만 갑니다. 외롭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다고 그런 처지에 있는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도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영적 광야에서 고생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영적 성숙을 위해 또는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하고 뛰어들었건만, 영적 성숙이 일어나기 보다는 오히려 유혹, 초조, 낙심, 좌절만 깊어집니다. 열매가 나타나기 보다는 모든 것이 정지해 버렸거나 오히려 전보다 후퇴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적 광야에 외롭게 홀로 남겨진 자신의 모습을 보며 몸서리쳐집니다. 괜히 영적 성숙을 해보겠다고 뛰어들었나 싶습니다. 괜히 사역에 동참해 보겠다고 뛰어들었나 싶어 후회만 됩니다.

III. 본문을 통해 배울 점
나는 오늘 설교에서 본문을 통하여 인생의 광야를 걷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교훈을 몇 가지를 찾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현재 처해 있는 광야(현실)을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흔히들 자신이 처해 있는 광야(현실)에 불평하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자신이 잘못된 상황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피해의식 때문입니다. 서두에서 소개했던 Frodo는 반지가 자신에게 잘못 굴러들어 왔다고 생각했기에 그 반지로 인해 자신이 겪게 된 현실을 힘들어 합니다.
“이 반지가 잘못 내게 굴러들어왔기 때문이야” 라는 생각으로 그 반지 때문에 처한 어려운 환경을 불평했던 Frodo 의 시각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그 누군가 때문에 내가 이토록 광야에서 고생하고 있는거야” 라며 불평하고 자포자기 해버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누군가”는 성령님이 되겠지요. 예수님은 자신이 자원해서 광야로 들어갔던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30년의 준비기간을 끝내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곧바로 사역 현장으로 들어가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인도했다”는 표현은 좋게 말한 것이고 사실은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내몰아내셨습니다. “몰아내신지라”는 헬라어는 에크발레이인데, 이 단어는 “내쫓기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정말로 광야로 내쫓김 받았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 없이. 하지만 광야로 내쫒김 받은 예수님은 광야에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피해자로 남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는 성령께서 뜻하는 바가 있어 자신을 광야로 인도하셨다고 받아들였습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Frodo는 좌절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인 지주인 Gandolf가 들려준 말을 되새기게 됩니다.

Frodo: “이 반지가 내게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I wish the Ring had never come to me. I wish none of this had happened.).”

Gandolf: “그런 어려운 시간을 만나게 될 때, 그들이 그러한 시간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만 하지 (So do all who live to see such times, but that is not for them to decide, is what to do with the time that is given to you).”

처해 있는 광야와 같은 현실에서 “나는 이곳으로 내쫓김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셨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커다란 시각 차이가 있습니다. 처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고, 그곳에 머물면서 취한 행동이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곳으로 내쫓김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광야를 자신의 무덤으로 해석하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광야를 반드시 지나가야 할 인생의 여정(관문)으로 받아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이 처해 있는 광야와 같은 현실을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셨다(God put me here)”고 적극적인 자세로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처해 있는 광야를 무덤 삼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광야를 헤쳐 빠져나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셨다(God put me here)”는 생각은 처해 있는 환경에 대해 긍정적인 질문을 갖도록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런 환경으로 인도하셨을까?” 궁금해 하면서 처해 있는 상황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나를 이곳으로 빠뜨렸다(Somebody put me here)”는 생각은 부정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하고, 자신을 그 상황에 빠뜨렸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을 원망하면서 결국 처한 환경을 자신의 무덤으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현재 여러분은 광야에서 희생자, 피해자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광야에서 승리자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자신이 처해 있는 광야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셨다(God put me here)”고 믿기 바랍니다.
둘째, 처한 광야에서 끝까지 인내하십시오. 광야는 인내를 키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훈련소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생활을 끝까지 인내하며 통과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전쟁터에서 쓰임 받을 칼은 뜨거운 불과 차가운 물로 달구어져야만 하지 않습니까?
예수는 광야에서 시험 받으셨고, 결국 시험을 통과하셨습니다. “시험을 받으시며” 라는 구절의 동사 “시험하다”는 헬라어 페이라조인데, 이것은 “시험하다, 유혹하다, 인내하다, 훈련하다, 증명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께서 자신을 광야로 인도한 이유는 40일의 광야 금식생활 중 사탄이 주는 시험을 이겨내도록 자신을 연단시키는 과정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로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시험(test)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황 속에서 사탄이 주는 여러 가지 유혹을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탄의 유혹이 40일 마지막 순간에 다가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내내 끊임 없는 사탄의 유혹과 싸워야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마태나 누가복음 보다는 마가복음의 기록을 더욱 선호합니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And he was in the desert forty days, being tempted by Satan)” (13절 상반절).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광야에서 인내하십시오. 비록 불평, 원망, 낙심, 좌절, 후회가 끊임없이 다가오더래도 끝까지 인내하십시오. 광야에서 인내하기 위해서 광야는 연단의 장소, 곧 영적 훈련소임을 기억하십시오. 광야가 영적 훈련소임을 기억한다면, 사탄이 주는 연약한 생각, 부정적인 생각을 뿌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매일마다 새벽에 영적으로 싸우는 시간을 갖습니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새벽 제단에 홀로 기도하러 매일마다 온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기다리지 않아도 차가운 바람을 이겨내고 교회로 나옵니다. 이러한 시간은 내게 주어진 영적 훈련 기간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광야에서 인내하면서 기억할 교훈은 광야에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셨던 예수님의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께서]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He was with the wild animals).” 나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현실에 대처하는 예수님의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보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저자 마가는 “예수께서 들짐승들로 둘려싸여 위협을 받으셨다 (He was surrounded and threatened by the wild animals)” 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들짐승”은 헬라어로 데리온인데, 이것은 “위험한 동물, (독이 있는, 사나운) 짐승”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위험한 야수들을 피할 적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외로운 광야에서 함께 지낼 친구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처한 환경 때문에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처해 있는 현실에 대한 자신이 만든 부정적인 이해 때문에 실패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나운 야수들을 친구 삼으셨던 예수님의 삶의 태도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짜증나게 하는 환경을 부정적으로만 해석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환경을 적극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자신의 삶에 유익하고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바꿀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십시오.
셋째, 광야생활 중에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예수께서 광야에서 힘겹게 사탄과 싸우고 있을 때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예수님과 함께 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40일의 훈련 기간 중 하나님은 자신을 예수님께 나타내 보여주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광야에서 40일 동안은 예수 그가 홀로 감당해야 할 시간, 훈련의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외로운 훈련의 시간 그분을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40일 훈련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자 천사들 보내서 훈련으로 지쳐 쓰러진 예수님을 수중들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와 같은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우리로부터 떠나버리신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우리를 홀로 두십니다. 그 시간은 우리가 참고 인내해야할 시간이니까. 그 시간을 인내하며 견뎌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으니까.

IV. 설교 매듭 짓기
C. S. Lewis의 “말과 소년 (The Horse and His Boy)”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오늘 설교를 매듭 짓겠습니다.

그(Shasta)는 무척 힘들어 지쳐 있있다. 그는 아무 것도 자신에게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음산한 기분이 그의 울음을 멈추게 했다. 샤스타는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오고 있다고 느꼈다. 무척 어둡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밤 중인데. 그 무엇 혹은 그 누군가는 너무나 조용히 움직이고 있어서 그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샤스타는 오직 그의 숨소리만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그 존재는 길다란 호흡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만약 자신의 말(Aravis)이 좀더 좋은 상태였다면-혹은 만약 그가 자신의 말로부터 조금이라도 호전된 기미를 발견할 수 있었더라면-그는 자기 말이 빨리 달려 도망치도록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말이 빨리 달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걷는 속도로 앞으로 진행했고, 보이지 않는 그 존재 역시 옆에서 계속 따라오며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느 순간에 샤스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잔뜩 겁먹은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당신은 누구요?” 그러자 그 무엇인가가 대답했다. “너가 말을 건네주길 오래 동안 기다려 왔던 자이다.” 그 목소리는 크진 않았지만 매우 굵고 깊었다.
“오, 제발 떠나주시오. 내가 당신에게 무슨 나쁜 짓을 했소? 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 동행자의 따뜻한 호흡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 그 동행자가 말했다. “그것은 유령의 호흡이 아니다. 너의 아픔을 내게 말해다오.” 약간 진정된 샤스타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빠와 엄마가 누구인지 모른다. 어느 어부 밑에서 고된 고생하며 자라다가 도망치게 되었다. 도망치는 길에 사자들을 만나 헤엄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타쉬반(Tashbaan)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저녁에는 무덤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광야에서 울부짖는 야수들의 무서운 소리를 들었다. 낮에는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목마름으로 고생했고, 사막을 막지나칠 무렵 한 사자의 습격을 받아 결국 말(Aravis)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지 꽤나 오래 되었다.
“나는 너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묵직한 소리가 외쳤다. 그러자 샤스타는 반문했다. “당신은 내가 그렇게 많은 사자들을 만난 것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그 큰 소리가 대답했다. “그곳에는 오직 한 마리의 사자 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내가 조금 전에 당신에게 말했던대로 첫째 밤에 적어도 두 마리의 사자들이 쫓아왔고, 그리고. . .” “그곳에는 오직 한 마리의 사자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사자는 무척 빠른 발을 가지고 있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아오?” “내가 바로 그 사자였다.” 놀랜 샤스타는 입을 딱 벌어졌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목소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내가 바로 그 사자가 되어 너를 뒤에서 쫓음으로 인해 너가 너의 말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너가 공동묘지에서 밤을 지낼 때 너를 위로해주던 그 고양이가 바로 나였다. 너가 잠들어 있을 때 재칼들을 쫓아냈던 그 사자가 바로 나였다. 너가 룬 (Lune) 왕을 만나야만 할 그때 너의 말을 위협해서 무서운 속도로 뛰어갈 수 있도록 했던 그 사자가 바로 나였다. 너는 비록 기억할 수 없겠지만, 너가 보트 안에 누워 죽어가고 있을 때 그 보트를 해안가로 밀어 닿을 수 있게 도와주었던 그 사자가 바로 나였다. 그리고 그 보트가 해안가에 닿은 이후 어떤 사람이 널 밤새로록 지켜보아주었지.”
“나의 말 아라비스에게 상처를 주었던 것이 바로 당신이었소?” “그래. 바로 나였다.” “그렇다면 왜?” 그때 그 목소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들아, 나는 너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 그 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