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목사 (높은뜻숭의교회)

지난 8월 14일에, ''민족문학작가회의''는 광복57주년을 맞이하면서 ''친일문학에 대한 자성''이라는 기자회견을 가지면서, 이광수 등 일제강점(日帝强占) 하에서 친일문학 활동을 하였던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그 이름을 다 밝힐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유명한 작가들의 이름이 많았습니다.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최남선, 김동인, 유진오, 유치진, 이무영, 정비석 등의 이름이 눈에 띄였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왜 이미 지나간 과거 역사의 오점을 지금에 와서 들추어내고, 굳이 그 명단을 발표하면서 일제강점기의 "선배문인들의 친일 부끄럽습니다"고 사과했겠습니까? 우리의 관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친일문인 42명의 명단을 발표한 이유는, 광복 57주년을 맞이하면서 "제 아비를 고발하는 심정으로 친일문학작품을 공개하고 민족과 모국어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결코 "단죄나 혹은 보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반성과 용서의 토대를 마련하고 모국어의 참된 미래를 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좀더 속 깊은 마음을 표현한다면, 선배들의 부끄러움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있는 과거역사의 부끄러움과 같은 그 부끄러운 자화상을 다시 보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에, 왜 42명의 유명한 문인들이 친일문학 활동을 했을까요? 왜 그들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통치를 옹호하고,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는 문학작품을 썼을까요? 그들은 문인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옹호하고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한 것뿐입니다. 어디 문학하는 사람뿐이었겠습니까? 왜, 그들은 민족의 역사의 오점을 남기는 부끄러운 친일문학 활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것이 오늘, 우리의 관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지금 자기 앞에 던져진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있는 한 사람을 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앞에 주어진 그 문제 때문에 역사적인 죄인이 되고 만 사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그 이름이 저주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본디오 빌라도라는 사람입니다. 빌라도의 죄가 무엇입니까? 빌라도의 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불의한 재판관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때 그의 신분은 예수를 재판한 재판관이었고, 유대총독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궁극적인 관심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불의한 재판관이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결과의 문제보다 그 결과를 가져오게 한 원인의 문제입니다. 왜 빌라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불의한 재판관이 되어야만 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 빌라도가 정직한 재판을 하지 못했는가? 바로 이것이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역사적인 죄인인 빌라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왜 우리도, 빌라도처럼 진리대로 살지 못하는가? 왜 우리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유대총독이었던 빌라도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보낸『빌라도의 보고서』라는 문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빌라도의 보고서에 관심가지는 이유는 단 하나의 이유입니다. 빌라도는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 사람인가? 그의 마지막 결론은 이렇습니다. "십자가 옆에서 ''말커스''(십자가 처형 현장의 지휘관이었던 로마의 백부장 이름)가 말한 것처럼, 저는 진실로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이 가이사 황제에게 보고한 빌라도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빌라도가, 예수님이 죄 없다는 것을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이 무죄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몰라서 믿지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알지 못해서 불순종합니까? 정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몰라서 방황합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잘 압니다. 수도 없이 하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빌라도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본문을 좀더 유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총독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마 27:11)

본문 11절에 보면, 예수님과 유대 총독 빌라도와의 역사적인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 가질 말씀은,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때,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특별한 질문이 나타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바로 앞에 세워 놓고,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어리석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요 14:6)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하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면(對面)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인 동시에, 빌라도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의 인생의 생(生)과 사(死)를 결정짓는 사건이었다는 겁니다. 빌라도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면서, 무슨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과 마주하고 있을까요? 이 때,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셨겠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총독 빌라도 앞에 지금 서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눈을 크게 뜨고 직시하시기를 바랍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말씀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지 않으신 예수님이, 병자와 약한 자를 고치시던 예수님이, 바다와 바람을 잔잔케 하시던 예수님이, 지금 유대 총독 빌라도 앞에 서신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빌라도와 예수님의 만남 그 사건이 빌라도에게, 전에 없었던 중대한 인생의 고민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빌라도 앞에 서 계시다는 것은, 빌라도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없는 인생의 기회(機會)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동시에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위기(危機)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 앞에 마주하고 서 계신 주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에서 그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은, 그의 인생의 기회였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새로운 삶과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 앞에서, 신고 있던 자기 신을 벗고 맨발로 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예수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 찾아오신 주님과 대면했습니다. 두 눈을 보지 못하면서, 거꾸러지면서 자기가 핍박하던 나사렛 예수를 만났습니다. 그 때, 그는 처음으로 예수가 누구신가?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주여, 당신은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그 대답을 듣고는, 다시 질문합니다. "주님,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만남을 통해서, 핍박자(逼迫者) 사울의 인생은 선교사 바울의 인생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빌라도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빌라도에게는 그의 앞에 서신 예수님은, 기회가 아니라 인생의 위기였습니다. 역사적인 죄악을 범하는 불행한 사건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빌라도 앞에 서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인간이 가장 만나기를 원하면서도, 가장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주님을 만나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사실은 지금 하나님 만나면 큰 일 아닙니까? 주님 만나면 큰일나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만난다면, 주님을 만난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변화되어야 할 내 인생의 문제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 만나기가 두려운 겁니다. 주님 만나기가 싫은 겁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저와 여러분의 인생 앞에, 빌라도에게 마주 서 계시던 그 주님이 서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인생 앞에 서 계신 주님을 기회로 삼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주님을 내 인생의 위기와 절망으로 바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2. 차선책을 찾는 빌라도(마 27:17)

명절이 되면, 로마 총독의 권한으로 죄수 한 사람을 살려줄 수 있는 전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고소한 대제사장, 장로들, 무리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즉, 빌라도는 차선책으로 죄 없는 예수의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이미 잘 알려진 유명한 정치범 ''바라바''가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사형수였습니다. 빌라도 생각에는, 자신이 죄를 찾지 못한 무죄를 확신하는 ''예수''를 풀어주기 위해서,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흉악한 정치범, 살인범인 ''바라바''와 ''예수''를 흥정하면, 그래도 대제사장들, 장로들, 무리들이 ''바라바'' 대신 ''예수''를 놓아주자고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도리어 무리를 선동해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죽이자고 소리치게 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겠나이다…." 도리어,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진리는, 거짓과 흥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진리는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진리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처음도 진리요, 나중도 진리입니다. 비진리가 상화에 따라서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상대적인 거짓과 흥정해서 진리로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리와 거짓을 같이 놓고 흥정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진리대로 놓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영접하는 겁니다. 거짓된 것을 처음부터 버리고 포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진리가 진리로 드러나는 겁니다. ''바라바''와 ''예수님''을 비교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진리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진리임을 알 때, 바라바의 거짓됨을 아는 겁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때로는 법이 불의한 적이 많았습니다. 요즘도 미국의 행동들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지나간 미국 역사에 미국 남부지방에서는 노예를 사고 파는 것은 합법이었습니다. 노예들이 주인에게서 탈출하도록 돕는 것은 위법이었습니다. 그러나, 깨달았건 깨닫지 못했건 피부가 검다고 해서 흑인들을 노예로 부린 백인들이 범죄한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선언서에 서명하고, ''노예제도''를 불법(不法)이라고 선언한 다음부터 노예제도가 잘못된 제도가 된 것은 아닙니다. 노예제도는 늘 잘못된 제도인 겁니다. 결국에는, 법이 노예제도를 불법이라 인정한 것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영원한 진리입니다. 어떤 이유로도, 노예제도나 나치학살, 힘에 의한 전쟁은 정당화 될 수 없는 죄악입니다. 법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황의 문제도 아닙니다. 시대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진리냐? 비진리냐?의 문제에 속한 겁니다.

진리는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변하지도 않습니다. 흥정의 대상도 아닙니다. 진리는 언제나 진리입니다. 진리는 처음도 진리이고, 나중도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바와 비교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상대적인 제도나, 상황이나, 전통이나, 비진리인 법과 흥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앞에 ''예수님''과 ''바라바''가 있을 때, 진리이신 예수님을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진리를 버린 빌라도(마 27:24, 26)

이제, 우리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결론은, 빌라도가 왜 불행한 인간인가? 왜 역사적인 죄인이 되었는가? 그는 왜 진리를 버릴 수밖에 없었는가? 그는 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바라바를 택하였는가 입니다. 빌라도는, 아무 성과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합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합니다. 그러고는,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24, 26절).

빌라도가 드디어 예수님을 포기한 겁니다. 진리를 버린 겁니다. 왜? 빌라도가 예수님을 포기했는가? 바로, 여기에 오늘 말씀의 결론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내 인생 앞에 서 계시는 예수님을, 진리를,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고 버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직시해야 합니다.

저와 같이 에스라 성경학교에서 성경공부하는 젊은 교우 한 분이 최근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 직장은,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수백억원의 자산과 수십억원의 현금을 운용하는 작지 않는 회사였습니다. 진급이 되어서, 그 회사에서 회계업무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는데, 월급도 더 많이 받게 되고 회사에서 인정도 받게 되어 처음에는 굉장히 기뻤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무슨 일을 하는 자리인가 하면, 회사의 일반회계업무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회사의 회장님과 사장님을 위해서 매월 3,000만원 규모의 비자금을 만들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처음에 진급해서, 몇 달은 전에부터 해오던 관행이라 생각하고 죄의식 없이 능력 있게 그 일을 잘 처리했는데, 저와 같이 비유복음말씀을 공부하면서부터 그 일에 대한 고민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상담을 하셨는데, "목사님, 저 회사 그만 두어야겠습니다." 자초지종을 다 들어보았습니다. 그런 후에, 저는 회사 그만 두지 말고, 말귀를 못 알아들을 분들도 아니시니, 회장님과 사장님을 직접 만나보라고 했습니다. 그 회사 회장님과 사장님은 서울의 유명한 모 교회에 출석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다고 합니다. 그래서 더 고민한 겁니다.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회장님, 사장님 저는 이 회사 절대로 그만 둘 수 없습니다. 회사를 위해서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정직한 방법으로 이 회사가 운영되도록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라고 말씀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결과는 단호한 거절이었습니다. 투명한 회사를 만들어보고 싶었지만, 오히려 더 경계하고, 의심하고, 곱지 않는 눈초리로 감시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결국, 그로부터 두 달을 더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 두고 나왔습니다. 그 회사의 회장이나 사장은 교회 열심히 다니는 것과 비자금 만드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버린 빌라도와 같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빌라도가 왜, 진리를 포기했습니까? 왜 예수님을 버렸습니까? 그는, 정치적인 욕망이 너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보다는 거짓된 무리들의 여론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가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을 때, 무리들이 소리쳤습니다. "예수를 놓아주면, 가이사 황제의 충신이 아니니이다"(요 19:12). 이 한 마디의 말은, 그 어떤 말보다 빌라도에게 치명적인 충격을 준 말입니다. 끝없는 정치적인 욕망을 가진 빌라도의 가슴에 꽂히는 비수(匕首) 같은 무서운 말이었습니다. 그는 이 한 마디 말에, 서둘러 진리이신 예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빌라도는 진리를 위해 산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정치적인 욕망과 출세를 위해서 산 사람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진리도 헌신짝처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가이사에게 잘 보이는 일이라면, 거짓된 군중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좋아하기만 하면, 진리를 포기하는 그 사람이 바로 빌라도입니다.

한국에서 26년이나 살아온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 씨가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한국·한국인 비판』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쓴 내용 중에, 그는 우리나라를 가리켜 전과자가 떵떵거리는 나라라고 비판했습니다. 전과자라고 해서 쓸모없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창기와 세리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먼저 들어간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말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뉘우침과 변화가 없는 사람들이 또 국회의원이 되고, 지방자치단체장이 당선되는 나라는 한국뿐?이라는 겁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국회의원 가운데 전과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우리나라만큼 높은 나라는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연세대학교 안용식 교수님이 쓴 논문 가운데, ''우리나라 고급 공무원의 일제관련 경력분석''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그 글을 읽어보면, 기가 찹니다. 우리나라 정부가 수립된 직후, 행정의 실제 집행자였던 국장, 과장의 55.2%가 일제시대 관료를 지낸 친일파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이라고 해서, 나랏일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구시대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맞이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좀 생각하는 분들은, 우리나라가 일제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광복 57주년이 되었지만, 우리나라의 현주소를 바라보면서 한없이 고뇌하고 있습니다. 광복은 되었지만 아직 진정한 해방은 얻지 못했습니다. 식민통치라는 구속에서는 풀려났지만 진정한 자유는 맛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평화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안에 있는 부정직, 거짓, 사기, 교만, 이념적인 싸움, 지역갈등, 부정직한 권력, 죄의 문제 때문입니다. 빌라도의 욕망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랏일이라고 언제나 크고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작은 내 일이 곧 큰 나랏일이고, 큰 나랏일이 곧 나의 작은 일입니다.

빌라도의 정치적인 욕망은 개인적인 욕망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그의 욕망은 진리이신 예수를 버리고 마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나 자신의 삶을 돌아봅시다.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 말입니다. 진리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빌라도의 그 욕망을 정리하지 못하고, 정치(政治)하고, 교회 일하고, 직장 다니고, 기업경영하고, 공부한다면, 우리와 우리나라는 언제나 죄의 종노릇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해방과 자유와 평화는 진리로부터만 옵니다.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고, 포장되어 있는 온갖 빌라도의 욕망을 버리고 진리를 택할 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거기에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다 죄의 종이라"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광복 57주년 맞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새로운 부르심과 기대라고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