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규목사 (광주중앙교회)



한 부자가 저명한 학자를 찾았습니다. “내가 언젠가 세상을 떠날텐데 나의 묘비에 새길 좋은 말이 없을까요?” 그때 학자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요?” 부자는 자기의 자랑스러운 얘기를 모두 했습니다. 다 듣고 난 후에 학자는 말했습니다. “당신의 묘비에 이렇게 쓰시지요, ‘낳다, 살다, 죽다.’” 우스꽝스러운 얘기 같으나 어쩌면은 저마다 인생들의 이력서가 아닙니까? 인생의 가장 중요한 때를 셋으로 나눕니다. 낳을 때와 살 때와 죽을 때입니다. “인생의 세 때”, 이 시간 메시지의 주제입니다. 본문 말씀 중심해서 인생의 때를 세 때로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첫째 낳았을 때

낳았을 때, 그 핏덩어리 아가 인생이 저마다 인생들에게 세 가지 교훈을 하곤 합니다. 첫째 교훈입니다. ‘고난 인생이로다.’ 낳을 때 아이가 첫 번 고고한 음성을 발합니다. 그 음성이 무엇입니까? 응애하는 울음소리입니다. 이 울음소리는 ‘인생은 고난이로다’ 의미이기도 합니다. 낳을 때에 벙글벙글 웃으면서 태어나는 아이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인생은 울면서 태어나서 울며 살다가 울면서 가는 존재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이 무엇입니까? 고난이요, 환난입니다. 눈물이요, 고통이요, 질병입니다. 인생의 생로병사가 다 고난입니다. 홍해 없는 인생 없고, 겟세마네 없는 인생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 예수님은 나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주홍같이 붉은 죄, 먹장같이 검은 죄를 담당하시고, 나의 고난, 슬픔, 아픔을 대신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시간에 우리 모두가 빈손 들고 예수님 앞에 나와 위로 받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교훈입니다. ‘무지 인생이로다.’ 낳을 때에 지푸라기 같은 지식하나 가지고 나온 아가가 있습니까? 지구가 자전을 하고 공전을 한다던가 H₂O 는 물이 된다던가 전혀 모르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를 낳고 그 자녀에게 배움을 줘야 합니다. 논밭이라도 팔아서 학교에 보내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피아노를 배워주고, 발레를 배워줘야 합니다. 태권도를 배워주고, 바이올린을 배워줘야 합니다. 그것도 부족하니 칸트를 배워주고, 니체를 배워주고, 토인비를 배워주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알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몰랐던 것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무지를 알았다는 말이요, 곧 무지 인생입니다. 사실 안다는 것 별 것 아닙니다.

옛 어른들에 의하면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로다’ 입니다. 오늘의 진리가 내일 쓰레기통에서 나풀거리는 휴지가 될 수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조령모개요, 조삼모사입니다. 이 말은 오늘의 청와대 정치를 풍자한 말이기도 합니다. 조령모개가 무엇입니까? 아침에는 이렇게 하여라 하더니 저녁에는 저렇게 하겠다는 뜻이요, 조삼모사가 무엇입니까? 아침에는 셋이다 하더니 저녁에는 아니 넷이다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학문이 인생의 행복을 어느 정도 조장해 줄 수 있습니다. 야만인을 지성인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양학이 직접 비타민이 되지를 못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 1:7)이라 했고,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낳아주고, 그 자녀를 학원으로 보내기 전에 교회 유치원으로 먼저 보내야 합니다. 반드시 그 자녀를 기도하면서 길러야 합니다. 자신을 향해서 물으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을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또는 손자들을 그렇게 양육하고 있습니까? 셋째 교훈입니다. ‘적자 인생이로다.’ 낳을 때 어린애마다 주먹을 꼭 쥐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주먹 안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백원짜리 동전 하나 가지고 태어난 아가 없고, 만원짜리 지폐 한 장 가지고 태어난 아가 없습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남자도 여자도 욕심꾸러기 인생이 됩니다. 그 탐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생의 불행을 자초하는 지 모릅니다. 욥은 당대의 거부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룻밤 사이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어찌했습니까? “내가 모태에서 적신(赤身)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욥 1:21). 여기 적신이 무엇입니까? 텅빈 인생이란 뜻입니다. 거지 나사로처럼 왔다가 거지 나사로처럼 간다는 뜻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임종이 가까웠을 때에 “나를 관에 넣을 적에 관 밖으로 내 두 손을 내놓도록 하라”고 했을 때에 “무슨 뜻입니까?” 물었더니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노라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 믿고 살면서 구두쇠처럼 살 것 없습니다. 너무 욕심부릴 것 없습니다. 저마다 하늘나라 저금통장을 마련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살았을 때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눅 16:25). 여기 살았을 때라는 말에 우리의 신경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아까 본문의 부자는 살았을 때 실컷 먹고 마시고 살자 했을는지 모릅니다. 생각하면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를 모르는 인생이 있는가하면은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하는 인생도 있습니다. 한 부자가 살았을 때에 자기 집 대문 밖에서 걸식하던 거지 나사로를 도와주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또 살았을 때에 전도한 사람들이 있었건만 믿음생활 하지 못했던 것을 통탄하고 있습니다.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왕상 8:40). 솔로몬의 말입니다. 솔로몬은 자기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꼬’, 우리의 과제가 아닙니까? 숙제가 아닙니까? 우리의 남은 인생을 살아있는 동안에 어떻게 살꼬,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 1:20) 했고,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8) 했습니다. 왜 우리가 사는 동안에 주를 경외해야 합니까?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 아니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힘으로 산다는 말이요, 왔다 갔다 기동하는 것도 하나님이 살게 하셔서, 또 힘주셔서 그리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위하여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성도여, 살았을 때 할 일이 무엇입니까? 살았을 때에 하늘에 보물을 많이 쌓아야 합니다. 살았을 때 거지 나사로 인생에게 구제를 많이 해야하고, 살았을 때에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찬송을 많이 하고, 혹시 원수 맺은 것 있거든 다 풀어야 합니다. 죽은 다음에는 원수 맺은 것 풀 재간이 없습니다. 살았을 때에 우리가 할 일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전도입니다.

본문에 부자는 살았을 때에 전도한 번 하지 아니했습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부자는 살았을 때에 천국과 지옥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옥의 고통을 실제로 맛보고서야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이제라도 전도하게 하옵소서” 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늦었습니다. 후회한들 소용없습니다. 전도의 문이 닫혀졌습니다. 구원의 기회도 달아났습니다. 본문 29절에 ‘모세와 선지자가 있지 않느냐’ 했는데 무슨 뜻입니까? 모세는 율법, 선지자는 예언, 곧 구약성경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는 자는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도를 할지라도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살았을 때에 전도하십시다. 살았을 때에 119운동하십시다. 살았을 때에 다섯 형제에게 전도하고, 또 많은 사람에게 전도하여 새 성전의 빛나는 별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죽었을 때

“거지가 죽어”(22)라고 했고, “부자도 죽어”(22)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거지도 죽고 재물이 많은 부자도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 물질은 죽음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물질은 구원하고도 전연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그 재물이 우리의 구원에 작은 도움도 주지를 못합니다. 인생은 무엇이냐? 죽음의 존재자입니다. 다 죽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청춘이 없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거지니깐 먼저 죽고 부자니깐 다중에 죽고, 죽음에는 순서도 없습니다. 그래서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에 관한 5개 상황을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은 반드시 죽는다, 대신 죽을 수 없다, 죽음은 반복할 수 없다. 죽음은 언제 올는지 모른다. 죽음 앞에서 실존을 깨닫는다.” 우리 모두는 장송곡을 구슬프게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무덤은 꽃을 심어서 공원처럼 단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죽음은 변개시킬 수 없습니다.

니체가 말합니다. “죽음을 정복하기에는 너무 늙었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합니다. “인생은 불안이라고 하는 열차를 타고서, 절망이라고 하는 터널을 지나서, 죽음이라고 하는 종착역을 다다르는 실존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저는 4형제 가운데 둘째입니다. 벌써 위로 형님이 죽었고, 아래로 동생이 죽었습니다. 다음 차례는 부득불 제 차례일 것 같습니다. 천년 만년 살 인생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여기 오늘밤이 무엇입니까? 느닷없는 밤 아닙니까? 상상 밖의 밤이 아닙니까? 예측하지 못한 밤이 아닙니까? 갑작스럽게 다가온 죽음의 밤을 뜻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오늘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 밤이 오면은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려고 예비한 것이 소용이 없습니다. 외국 유학 가서 석사학위 받고 박사학위 받은 것이 물거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또 주님이 나의 생명 되시기 때문입니다. ♬ 나의 생명 되신 주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 14:13). 주안에서 죽는 자들이 왜 복이 있습니까? 우선 장례식 할 때 아름다운 찬송이 있고, 천국 가서는 상급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죽었을 때에 보지 못할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살았을 때에 설마 했던 지옥을 보았단 말입니다. 실제 지옥에 떨어져서 고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거지 나사로도 죽었을 때에 보았습니다. 황홀 찬란한 것 봤습니다. 그림자처럼 믿었던 천국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 품에 안겼는데, 여기 아브라함의 품은 예수님의 품을 뜻합니다. 거지 나사로는 살았을 때에 예수님을 믿고 죽었을 때는 천국에서 예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찬송작가 존 뉴턴이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천국에 가면 놀라게 될 것 세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틀림없이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무리 찾아도 그 곳에 없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요, 둘째는 틀림없이 못 왔을 줄로 알았는데 그 사람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또 한번 놀랄 것이요, 셋째는 너무도 좋은 천국을 보고서 나 같은 죄인이 이곳에 오다니 생각하면서 정말로 놀라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너무도 좋은 곳입니다.

♬ 저 좋은 낙원 이르니 내 기쁨 한이 없도다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 그런데 누구는 천국 가고 누구는 지옥 간다는 말입니까? “살았을 때”(25)란 말이 답합니다. 살았을 때가 중요하단 말입니다. 살았을 때에 예수 믿으면 죽었을 때에 천국, 살았을 때에 예수 믿지 아니하면 죽었을 때에 지옥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어찌 했습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베드로가 어찌했습니까? “은과 금은 내가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 했을 때에 앉은뱅이가 걷기도 하고 그 영혼이 천국 가지 못했다고 할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또 예수 없이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진 부자가 어찌했습니까?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집에 보내어 내 형제 다섯에게 전도해서 나처럼 고통받는 지옥 불구덩이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때는 늦었다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가 있고 못 할 때가 있습니다. 살았을 때가 있고 죽었을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살았을 때에 주님 뜻대로 사십시다. 살았을 때에, 죽었을 때의 일을 준비하는 모두가 되십시다. 모두가 천국 가서 만날 수 있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