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공목사 (피츠버그한인연합감리교회)

빅터 프랑클이란 정신분석학자는 “사람은 의미를 먹고 산다. 보람을 먹고 산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여론 조사에서 직업 가운데 바꾸지 않은 직업은 신부, 목사, 의사의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역사 보람있는 일은 남을 돕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더라는 보도였습니다.

3개의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의학 철학 신학 그리고 음악가 바하의 곡을 연주하는 오르간 반주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읽고 깊이 묵상하던 중에 자신이 부자와 같은 자임을 깨닫고서 바하 연구 컨써트를 취소했고, 신학책 쓰는 것을 포기했고, 의사 개업하는 것을 포기하고 나사로와 처럼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을 헌신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은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켜서 인류의 어둠을 밝히는 불꽃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읽으면서 여러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들지 않습니까? 왜 부자가 지옥에 갔을까? 부자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왜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을까? 무엇을 잘한 것이 있는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포인트는 무엇인가?




1. 예수님은 삶은 이 땅에서 사는 것만이 아니라 내세의 삶이 분명히 있음을 가르켜 주십니다. 미국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80%이상이 내세가 있다고 믿고 있다. 대단히 높은 비율입니다. 부자는 호화로운 생활을 날마다 했습니다. 고운 자색옷을 날마다 입었고 날마다 연회를 베풀면서 진기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반면에 거지 나사로는 그 집대문에 누워서 그 집 하인이 버리는 음식을 먹으면서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고 그것조차 싶지가 않았습니다. 개가 강력한 경쟁자였습니다. 그리고 개가 와서 상처난 곳을 할타도 쫗아낼 기력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천사들의 영접을 받으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반면에 부자는 죽어서 음부(지옥)에 떨어져서 고통을 당하는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왜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음부(지옥)에 가게 되었을까? 부자는 이 땅에서 살면서 자신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자신의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전혀 어려움에 처한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관심도 없었고 동정을 갖고 도와주지도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세가 있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 땅에서 사는 일에 온갖 힘을 쏟았고 거기에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모든 정력을 다 소비했기 때문에 내세에서 지옥에 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행동한 것 배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거지 나사로는 구차한 삶을 살았지만 마음에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주인을 통해서 자비와 동정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았습니다.




2. 내세의 삶은 우리가 이 땅에서 우리가 행한 것이 근거한다.

요한 계시록에 20장 말씀에서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때에 모든 자들이 다 주님앞서 서게 됩니다. 백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는데 무엇을 따라서 심판하십니까? 두 개의 책이 있습니다. 생명책과 행위에 관한 책입니다. 행위에 관한 책에 의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행위에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됩니다.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 20:12) 그 행위에 따라서 부자처럼 영원한 지옥불에(둘째 사망) 떨어지게 됩니다. 그중에 이 부자처럼 불신앙과 자신만을 위한 생을 살은 것이 포함됩니다. 반면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주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이것이 앞으로 되어질 종말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부자는 이 세상에 살면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무런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기와 가까이 있는 도움이 필요한 거지를 보고서도 무관심한 것이 바로 죄였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보스톤 대학교 교수 엘리 위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교육의 반대는 무지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아름다움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같은 무관심이 얼마나 큰 죄인가가를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가르켜 주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오늘도 우리에게 건강과 가정과 교회 직장을 주셔서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신 주님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수재당한 사람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 집을 방문했습니다.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3. 생명있는 동안 긍휼한 마음을 갖고 나눔의 삶을 살아라!

우리의 생은 두 번 살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의 삶입니다. 오직 한길입니다. 후회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지옥에 떨어진 후 후회하고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이 땅에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이 나처럼 이곳에 오지 않도록 나사로를 보내 주소서. 27절, 28절 말씀에서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했겠습니까? 그러자 어떻게 대답을 얻었습니까? 29절과 31절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들을수 있는 성경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닫힌자는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결국은 믿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물질을 얼마큼 가졌는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부자건, 가난한 든, 어떤 직업을 가졌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항상 당신이 주신 생의 모든 선물들을 주위 사람들과 나누면서 살아가는가? 아니면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나의 시간과 물질, 자원을 드리려는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오직 자신과 자신의 가정만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과 자원을 쓰려고 하는지를 보고 계십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가 이 말씀을 읽고 자신을 부자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헌신할 만큼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의 형편이 어떻든지 항상 주님을 위해서, 이웃들을 위해서 긍휼의 마음을 갖고 나눔의 삶을 실천하여 영생의 축복을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웨슬리 목사님의 크리스챤 삶의 규칙을 읽고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선한 일을 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대로 모든 방법을 사용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대로 모든 길을 이용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장소에서 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시간에서 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하라.

당신이 할 수 있는 동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