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왜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했을까?

똑같은 얘기도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별로 재미없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야기하기(storytelling)의 묘미는 이야기의 내용 못지않게 그것을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야기꾼의 특별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듣는 사람의 상황에 맞게 절묘하게 이야기할 줄 아는 분이이었습니다. 그분의 이야기에는 힘이 있었고 듣는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독특한 기운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심오한 진리를 쉽게 이야기할 줄 아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의 동조자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적대자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 자리에서만큼은 꼼짝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예수님에게는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라고 이름 붙어 있는 비유를 읽었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들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읽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이야기입니다. 비유의 마지막에 주인이 보여준 처사가 일반적인 상식에서 너무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왜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했을까요? 비유의 핵심은 바로 여기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인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려 합니다.




어떤 부자가 청지기 한 사람을 두었는데 자기 재산을 그 청지기가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복음서에 실려 있는 비유는 예수님이 실제 청중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이야기입니다. ‘이야기하기’라는 행위는 청중과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퍼포먼스(performance)입니다.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이란 청중들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고 그들의 상태와 바람까지 고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비유의 서두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부자 주인과 그 수하의 청지기가 그들입니다. 청지기를 둘 정도의 부자는 대단히 큰 부자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당시 갈릴리의 사회상황을 고려하면 주인은 부재지주(absentee landlord)일 가능성 높습니다. 곧 주인은 갈릴리에 땅을 소유하고 있지만 거기 거주하지 않고 예루살렘 같이 큰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청지기를 고용하여 자기 재산을 관리하게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 당시 갈릴리에서는 흔한 현상이었습니다.

비유를 듣는 청중은 누구였습니까?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고 그분을 따르던 사람들이 비유의 청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죄인이라 낙인찍힌 사람들, 그리고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간혹 있었겠지만 대다수가 예수님 아니면 희망 걸 데가 없는 밑바닥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청지기까지 두고 있는 부자에게 느낀 감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적대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한편 청지기에 대한 청중의 감정도 좋았을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민중들을 가까이에서 괴롭히는 사람은 청지기였습니다. 당시 청지기들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 재량권을 주인으로부터 받아 주인의 재산을 늘려주었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비유의 서두를 들었을 때 청중들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임을 간파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청지기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재산을 그 청지기가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청지기를 불러 말했다. “자네 소문을 들었는데 그게 무슨 짓인가? 이제는 자네를 내 청지기로 둘 수 없으니 자네가 맡은 일을 다 청산하게.”




주인은 자기 청지기가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들은 소문의 진위를 확인도 하지 않고 단지 소문만으로 청지기를 불러 질책, 해고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와 같은 주인의 행위를 경솔하다고 해석했습니다. 단지 소문만 듣고 진위를 확인하지 않은 채 청지기를 해고했으니 경솔하다는 판단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점이 비유의 초점은 아닙니다. 비유의 초점은 주인의 사려 깊음 또는 경솔함 여부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청지기가 주인의 질책을 받고서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점입니다. 주인은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 진위를 직접 확인하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대부분은 일단 부인하게 마련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또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일단 부인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청지기를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소문이 사실이었을까요? 부인할 여지도 없다고 판단했을까요? 아니면 주인의 성격을 보아 아무리 무죄를 호소해도 소용없다고 봤을까요? 어느 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청지기는 주인의 질책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측은해했더니 웬 걸!

청지기의 이와 같은 행위를 청중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아마 측은한 생각이 조금은 들었을 것입니다. 그 청지기가 자기들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줬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한 사람이 해고통보를 받은 마당이니 어찌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청중들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그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내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가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날 때 나를 자기 집에 맞아줄 사람들을 미리 만들어놓아야겠다.




같은 말을 해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했느냐에 따라서 느낌과 메시지가 크게 달라지는 법입니다. 이 청지기는 나이가 꽤 들은 청지기였을까요?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라고 말했으니 말입니다.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구나.”라는 말은 당연한 말이지만 만일 듣는 사람이 빌어먹는 사람이었다면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청중은 “네가 청지기라고 우리 앞에서 세도 부리더니 잘 됐다. 우린 평생 땅을 파서 먹고 살거나 빌어먹고 있는데 너도 한 번 당해봐라.”라고 말하며 고소해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팔레스타인의 경제사정을 고려해보면 ‘빌어먹는다’는 말의 의미가 크게 달라집니다. 오늘날 미국에도 빌어먹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른바 노숙자들(homeless people)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노숙자들 중에 굶어죽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음식은 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땅 파먹고 살고 빌어먹고 사는 사람들의 상황은 이와 크게 달랐습니다. 그때 농민들을 비롯한 민중들은 말 그대로 ‘소모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사람이 과중한 노동 끝에 병들거나 죽으면 그 사람을 대체할 수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민중들은 소모품처럼 사용되다가 늙거나 병들거나 죽어갔습니다. 따라서 청지기에게 ‘해고통보’는 생명이 왔다 갔다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청지기 직에 붙어 있으면 살아남고 쫓겨나면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청지기 직에서 물러났을 때 자기를 맞아줄 사람들을 만들어놓기로 했습니다. 그게 누구였을까요?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우리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자 청지기는 “당신의 문서가 여기 있으니 어서 앉아서 오십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일러주었다. 또 다른 사람에게 “당신이 진 빚은 얼마요?” 하고 물었다. “밀 백 섬이요.” 하고 대답하자 청지기는 “당신의 문서가 여기 있으니 팔십 섬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일러주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들여 그들이 진 빚을 자기 마음대로 탕감해주었습니다. 본래 ‘청지기’란 주인의 재산을 잘 관리하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그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비상식적인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그는 남의 것으로 인심 썼을까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주후 1세기 팔레스타인의 경제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앞에서 청지기의 ‘재량권’이란 얘기를 했는데 사실 많은 것이 그의 재량에 달려 있었습니다. 주인은 청지기가 중간에서 얼마를 차지하든 자기에게 돌아올 액수만 기대에 맞으면 청지기가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기름 오십 말을 농민에게 빌려준 주인이 팔십 말을 되받기를 기대한다면 그는 청지기가 채무자에게 백 말을 받아내든 구십 말을 받아내든 개의치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당시 이자율은 현금에 대해서는 25%였고 현물에 대해서는 50%였습니다. 공식적으로 이 정도이니 실제로는 더 높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청지기가 탕감해준 액수는 주인에게 돌아갈 몫이 아니라 자기 몫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탕감 액수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 중 일부는 자기 몫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청지기의 행위에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부정직함, 또는 불의함은 이미 소문이 날 정도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좌우간 이런 청지기의 처사에 대해 주인은 칭찬을 했다고 합니다. “그 정직하지 못한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하였기 때문에 주인은 오히려 그를 칭찬하였다.”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주인은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또는 ‘지혜롭게’ 처리했기 때문에 칭찬했다 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청지기의 행위가 지혜로웠습니까? 청지기는 자기가 빚을 탕감해준 사람들이 자기를 받아 주리라고 생각했을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를 얼마나 오래 먹여주고 재워줄 수 있었겠습니까? 자신의 생존도 불안정한데 청지기까지 돌봐줄 처지였겠습니까? 만일 단지 그것만을 겨냥하고 청지기가 빚을 탕감해줬다면 그를 지혜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한편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청지기가 청지기직에서 쫓겨난 후에 생존할 방도를 찾았기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주인은 자기 이해관계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 때문에 청지기를 칭찬한 것이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기서 우리는 당시 팔레스타인의 문화적인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회였습니다. 명예를 중시하는 만큼 수치스러운 일을 피하려 했습니다. 물론 이는 가진 자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지만 보통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나 스스로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라고 믿었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이를 지키도록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었습니다. 자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율법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을 선대하라고 가르칩니다. 경제논리만 갖고 보면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경제논리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율법의 윤리가 있었습니다.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는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높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청지기가 이를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 결과는 모두가 행복해졌습니다. 주인은 명예를 얻어서 좋았고 빚진 사람들은 빚을 탕감 받아 좋았으며 청지기는 주인에게 칭찬을 받아 좋았습니다. 주인은 아마 청지기를 해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불의한 재물(공동번역이 ‘세속의 재물’이라고 번역한 것은 너무 자의적입니다.)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에 들어갈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결론지으셨습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재물’과 ‘영원한 집’ 곧 ‘영원한 생명’이나 ‘구원’은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재물, 그것이 불의한 재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면, 곧 좋은 일에 사용하면 그 사람은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에 들어갈 것이라 하셨습니다. 만일 부자가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자기가 갖고 있는 재물을 사용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자가 되면 사람은 변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모두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더라도 어려웠을 때는 잊지 않고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쪽으로 재물을 쓴다면 그 사람의 재물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의 근원이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