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오목사 (대구서현교회)

서론> 하나님의 창조 솜씨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기기묘묘하게 되어 있지만, 그 중에도 우리 인간의 신체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신비 그 자체입니다.

우리 몸이 병균의 공격을 받을 때 스스로 병균을 이길 수 있는 면역체계를 생각해 봅시다. 이것은 우리 몸의 안보를 책임지는 군대와 같습니다. 그 중에 특수부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피 속에 있는 백혈구입니다. 우리 몸에 병균이 침입해오면 이를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데, 이 백혈구가 침입자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아름다운 사랑이 느껴집니다.

백혈구는 병균에게 심한 욕설을 하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싸워서 무찌르는 일도 없다고 합니다. 백혈구는 병균이 오면 아주 깊은 사랑으로 그를 감싼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침입자는 백혈구의 사랑에 감동해서 스스로 녹아버립니다.

이것은 창조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그 기원이 사랑에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새롭게 되는 것은 손가락질하는 손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독설을 퍼부어대는 입술에 의해서도 아닙니다. 따뜻하게 품어주고 안아주는 가슴이 있을 때 문제아도 변화되고, 문제도 풀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 연구에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고자하는 열심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영혼을 향한 연민의 정이 부족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것은 또한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열심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잃어버린 영혼에 무관심한 자들이 어떻게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결국 하나님의 독생자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먼저 비유의 배경이 되는 본문을 살펴봅시다.

본문 1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본서의 저자인 누가는 14장 마지막에서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들을 귀가 있다는 것은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강력한 제자도(14:27,33)를 수용할 의도가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장은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온 사실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주께 나아온 자들은 당시 율법에 능통하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던 종교 지도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사람들로부터 경멸받던 대표적인 소외계층인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맹렬하게 공격받던 자들이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들을 귀 있는 자들이었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천국잔치의 기쁨을 맛볼 자격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가까이 나아오니”(엥기존테스)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계속해서 예수께로 나아오고 있는 장면을 현장감 있게 생생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여기 원망하다는 말은 계속해서 투덜거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접촉할 때마다 계속해서 불평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들을 귀 있는 자들과 들을 귀 없는 자들의 선명한 대조를 봅니다. 당시의 상황에서 당연히 들을 귀 있는 자들이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그 반대가 된 것은 사회의 통념을 뒤집는 일입니다.

예수님에게서 개혁과 혁신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가치관이 세상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즐기고 계신 것입니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동류(同類)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또한 사람 중에서도 경멸받는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본문 3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주님은 자기를 경멸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향하여 세가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잃은 양의 비유(4~7절),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8~10절),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11~32절)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본 절에서 ‘이 비유’라고 하여 단수로 표시되었습니다. 왜 누가는 세 비유를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비유는 세가지 이지만 하나의 주제로 통일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본장의 비유는 동일한 형식의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주제는 바로 ‘무엇인가를 잃었다가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 입니다. 이런 사실은 세 비유의 결론이 거의 동일한 문구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쉽게 발견됩니다(7,10,32절).

우리는 이 시간 앞의 두가지 비유를 생각하고자 합니다. 비유 속에서 잃은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슴저리게 느끼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잃은 양의 비유

본문 4절,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어느 날 해가 저물자 양을 치던 목자는 양떼를 우리 안에 들입니다. 그리고 양의 숫자를 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평소부터 유난히 목자의 말을 잘 안 듣고 딴 길로 가기를 잘하던 양 한 마리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큰일이 났습니다. 날은 어두워져 가고, 이대로 두면 맹수에게 먹히거나 어떤 위험에 처할지 모릅니다. 목자는 다른 양떼를 조수나 동료 목자에게 잠시 부탁하고, 보이지 않는 양을 찾아 나섭니다.

산넘고 물건너 산등성이와 골짜기를 헤매면서 양의 이름을 부릅니다. 안타까운 목자의 음성은 골짜기를 메우고 메아리치며 퍼져 나갑니다. 한참을 헤매던 목자는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처량한 목소리로 우는 양의 소리를 듣습니다. 어린 양은 가시덤불에 걸려 꼼짝하지도 못한채 지쳐 쓰러져 있습니다. 목자는 가시에 찔리는 것도 잊은 채 뛰어들어 양을 가슴에 안으며 기뻐합니다.

본문 5절,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양을 어깨에 메고 휘파람불며 돌아오는 목자의 모습이 보입니까? 고집 불통인 죄인들이 죄악과 방탕의 길로 나갔다가 자신의 힘으로 돌아올 수 없으므로 목자의 힘에 의지하여 돌아오는, 애처롭지만 승리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장면입니다.

본문 6절,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잃은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이보다 더 잘 표현된 곳이 있을까요? 주님이 자신에 대하여 친히 하신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요 10:14~16,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유대 격언에는 ‘하나님을 거역하던 자가 이 세상에서 멸망하면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된다’ 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태도는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즐기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은 개인의 기쁨으로 그치지 않고 곧이어 공동체의 잔치로 이어진 것입니다. 기쁨은 함께 나눌 때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본문 8절,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앞의 비유는 ‘어느 사람(=남자)’의 이야기인데 이 비유는 ‘어느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여자들이 거의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때에 평범한 아낙네를 등장시켜 이 비유를 매우 친근감 있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의도하시기로는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과 불구자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14:21), 즉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천시되는 자들의 것이며, 여기에는 여인들도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여인이 동전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여인은 등불을 켜고 온 집을 뒤지면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드라크마를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찾아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찮은 것일지 모르지만 이 여인에게는 생명과 같이 귀한 것이었습니다.

열드라크마는 한 세트로 이루어져 결혼할 때에 남자가 아내에게 주는 사랑의 증표였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그것은 남편에 대한 불경을 의미하며, 귀한 선물은 불완전해지고 맙니다. 그래서 이것은 반드시 찾아야만 했습니다.

본 절의 ‘켜고···쓸며···찾지 않겠느냐’는 세 동사는 모두 반복과 계속을 나타내는 현재직설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인은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를 찾기 위하여, 마치 잃은 양을 찾는 목자와도 같이, 쉬지 않고 집을 쓸고 또 쓸었습니다.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는 이 여인의 집념은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집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잃은 영혼을 찾으시되 반드시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집념을 가지고 찾으시는 것입니다.

잃어버림은 교회 밖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잃은 양의 비유에 나타나는 양은 주인의 품을 떠나 거친 들을 헤매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지만, 동전을 잃은 장소는 집안이었습니다. 이 비유는 오늘도 교회에 나와 있으나 여전히 잃어버린 상태로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드리고 있지만 잃어버린 동전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영혼이 깨어지는 감격을 아직 맛보지 못한 사람, 복음에 부딛쳐 끓어오르는 희열을 맛본 적이 없는 사람, 아직 거듭남의 체험도 없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갖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잃어버린 동전과도 같은 사람입니다.

나는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아닌가? 있어야 할 생명의 자리, 구원의 자리를 이탈한 잃은 드라크마가 아닌가? 자기 성찰이 있어야겠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은 기쁨

본문 9절,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주님의 비유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벗과 이웃은 모두 여성명사 복수로 사용되었으므로 이 잔치는 여자들만의 잔치임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의 성격을 너무나 잘 드러내 보여 줍니다. 당대의 잔치들이 남성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감안한다면(14:1, 7~14),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약자와 소외된 자들, 세리와 죄인들이 참여하는 잔치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여인은 다시 찾은 기쁨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어쩌면 잔치 비용이 찾은 양이나 동전의 값보다 훨씬 많이 나갔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수학과 경제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은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줍니다.

본문 1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다시 찾은 양을 안고 기뻐하는 목자는 바로 주님의 모습입니다. 드라크마를 찾아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여인은 바로 주님의 모습입니다. 동네 사람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벌이기를 조금도 아까와하지 않는 마음은 바로 잃은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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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악 가운데서 잃어버린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영혼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셨습니다. 잃은 영혼을 찾는 것은 주님의 최고의 관심사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건물보다도, 교회의 행사보다도, 영혼을 찾는 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만약 교회의 가장 우선되는 관심이 영혼을 살리는 일과 그 영혼을 성숙시켜 나가는 일에 있지 않다면 온전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은 대답없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완고해진 마음, 강퍅해진 마음의 문을 한없이 인내하시며 두들기셔서 마침내 저와 여러분을 찾아내셨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은 한 손은 우리 손을 잡고 한 손은 하늘을 향해 절규하시며 대속의 제사를 십자가에서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발견되어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이제 주님의 음성이 되어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념을 가지고 산울과 산골짜기를 다 뒤져서라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