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인목사 (광성교회)

오늘은 누가복음 13장 18절에서 24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하자면 이야기 거리가 굉장히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그 이야기 거리 중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8장 47절을 보면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소속이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 속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듣는다고 하는 말씀은 그냥 귀로 듣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귀담아 듣고 나가서 순종하는 것까지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속했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순종은 고사하고 도무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히 단정해서 말씀하시기를 마귀에게서 났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들었던 사도요한은 요한일서 3장 8절을 통해서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 광성교회 교인들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 가운데는 하나님께 속한 자도 있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 속한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성장하는 나라 (18-19)
본문으로 돌아가서 18절에서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꼬 무엇으로 비할꼬라고 말씀하신 후에 겨자씨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디작습니다. 겨자씨를 보신 분들이 있으십니까? 겨자씨가 얼마나 작은지 백지 위에 놓고 보라고 하면 너무 작아서 조그만한 점으로만 보입니다. 눈이 나쁜 사람이 가까이 가져다 대고 "겨자씨가 어디에 있어"라고 말을 하면 말하는 입김에 날아가서 찾을 재간이 없습니다. 겨자씨가 그렇게 작디 작지만 그 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가져다 심었더니 싹이 나고 자라고 또 자랍니다. 얼마나 자라나는가 하면 본문에는 없지만 3m까지 자라납니다. 그러면 공중에 나는 새들이 거기에서 쉼을 얻기도 하고 깃을 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가리키는 비유냐 하면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 즉 수적으로 계속 성장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늘나라 운동이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부르는 것에서 시작을 합니다. 겨자씨처럼 볼 것 없어 보였지만 열두 제자를 부르십니다. 그 열두 제자가 복음을 들고 나아갑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집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확장되고 성장해야 되고 부흥 발전해야 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해서 확장이 되고 성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의 천국의 그림자입니다.
교회는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생명이 모이고 모여서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성장하는 법입니다. 겨자씨가 자라듯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교회는 계속 성장해서 새들이 쉼을 얻고 깃을 들이듯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 쉼을 얻고 여기에 깃을 들이고 뿌리를 내리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외적 성장 혹은 수적 부흥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성장이 없으면 곤란합니다. 그것은 병들었거나 죽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 역사를 보면 광성교회가 처음에 시작되는 날 27명이 모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6년이 지났습니다. 6년이 지난 다음에 제가 전도사로 부임해 왔습니다. 전도사가 새로 부임한다고 광고를 얼마나 많이 했겠습니까? 안나오던 사람을 권면해서 데리고 나왔겠지요. 부임해 오던 날 30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면 6년 전에 27명, 6년 후에 30명 그 동안 몇 명이 더 늘어난 것입니까? 3명이 늘어난 것입니다. 교회가 그래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대형 교회를 왜 자꾸 비판을 합니까? 큰 교회에 대해서 아주 마땅치 않게 여겨 비난을 하고 교회가 기업화되었다 또는 교회가 귀족화 되었다는 등 대형 교회를 공박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습니다. 그러면 6년만에 교인이 3명 늘어나는 교회는 그래도 된다는 것입니까? 제가 이 교회에 와서 37년인데 그 동안 3명이 늘어나서 33명이어도 좋겠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되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다른 교회에 도움을 받고 얻어먹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아무 일도 못하지 않습니까?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 발전 부흥을 거듭하다보니 지금은 4만명 가까운 성도가 되었고 고등학교도 영신여고와 영신여실고를 운영을 하고 특수학교인 하늘빛 학교도 운영하고 외국에 선교사도 많이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즘 개척 교회를 할 때 우리 교회처럼 땅도 사주고 예배당도 지어주는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개척 교회를 할 때 큰 홀의 50평이나 100평을 임대하여 교회를 개척해 보십시오. 교회가 되는 줄 아십니까? 절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땅을 사주고 예배당을 지어 주면 일년만에 개척단계를 벗어나게 되지 않습니까? 교회가 성장하여 힘을 결집하지 아니하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교회가 계속 성장해야만 세계를 향해서 발돋움하며 일하는 교회가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해서 계속 성장하게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10월에 총동원 출석 전도 주일을 위해서 태신자 카드를 작성해 내시고, 기도 많이 하시고, 접촉하시어 소기의 목적을 이루어 하늘 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인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교회를 통해서 성장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광성교회는 더 많이 성장 부흥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변화되는 나라 (20-21)
본문으로 돌아가서 20절에서 21절을 보면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하신 주님은 첫 번째로 겨자씨를 이야기하셨습니다. 두 번째로는 누룩을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누룩을 좋지 않은 면으로 말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누룩은 좋은 면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용은 어떤 여인이 가루 서말을 반죽할 때 누룩을 가져다 넣어서 반죽을 해 놓았더니 부풀고 부풀어서 빵을 해 먹기 좋은 먹거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빵을 해 먹을 때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거기에 누룩을 넣어서 반죽을 합니다. 그리하면 누룩이 생가루 덩어리에 침투해 들어가 발효가 되고 부풀면 빵이나 떡을 해 먹기 좋은 먹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생 가루는 못 먹을 것은 없지만 빵을 만들면 맛은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누룩을 넣고 누룩이 침투해 들어가 발효시켜서 전부 부풀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그런 누룩과 같다고 비유하셨습니다. 이것은 겨자씨는 외적으로 자꾸 성장 발전해야 하는 것을 가리켰지만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해서 자꾸 침투해 들어가 발효시키듯이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성장뿐만 아니라 변화시키고 새로워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내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자랄 때는 자랄 만큼 자라야 합니다. 다 자란 다음에도 더 자라기를 바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성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를 통해서 이렇게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성숙해져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된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군목 제도가 생겼습니다. 그 때는 기독교의 군목들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군목부라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군목을 군종이라고 바꾸었습니다. 복의 근원이라는 책의 내용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초대 군종감을 지낸 분이 김형도 목사님이십니다. 그 분은 함경도 분으로 해방이 되자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군에 들어가 초대 군종감을 지내셨습니다. 한번은 밤중에 웬 점잖은 분이 찾아와서 "목사님!"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전혀 모르는 분이지만 손님으로 오셨으니 들어오시라고 했습니다. 김형도 목사님 아버지가 큰 부자였습니다. 왜정 초에는 면장이요, 장로이기도 했습니다. 아들이 다섯인데 첫째는 의사요, 둘째는 큰 사업을 하고, 넷째 다섯째도 제법 무엇인가를 해서 돈을 버는데 셋째 아들 김형도는 목사가 되었는지라 나중에는 집 한 채도 못 가지고 살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목사 아들을 위해서 집 한 채를 잘 지어 주어야 되겠다 생각하고 좋은 대지를 사고 목수에게 청부로 맡겼습니다. 그래서 목수가 집을 짓는데 최선을 다해서 집을 잘 지었습니다. 집을 다 지었으니 돈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면장을 지내고 있던 김형도 목사의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했더니 못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목수가 "장로님 무슨 소리입니까?"라고 따졌습니다. 그 때 "예수를 믿으면 주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억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요즘 같으면 어림없는 소리이지만 그 당시는 그 소리가 통했습니다. 목수라도 자기 성질이 있는데 질 까닭이 있겠습니까? "돈을 주면 예수를 믿겠소"라고 하면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칼자루는 돈을 줄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다 나중에는 견디지 못하고 돈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와 등록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등록을 했으니 돈을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교회에 나왔지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니 6개월 후에 학습을 받고 또 6개월 후에 세례를 받으면 돈을 주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목수는 돈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열심히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교회에 나오기를 싫어했는데 막상 나와서 예배드리면서 설교를 들어보니 괜찮았습니다. 교인들과 어울리다 보니 술꾼들과 어울리는 것 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너무 좋아 재미가 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돈 받을 것을 잊어버릴 정도가 되고 교회에 열심이었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은 후에 김형도 목사의 아버지가 목수를 불렀습니다. 집 값만 주었을 것 같습니까? 집 값만 준 것이 아니라 그 동안의 이자까지 계산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믿고 싶으면 믿고 말고 싶으면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한 번 해 본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돈 받고 예수 안 믿게 생겼습니까? 복음이 들어가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복음이 들어갔고 누룩이 전부를 부풀게 한 것처럼 복음이 그 분의 심령에 침투해 들어가 변화시켜 놓았습니다. 오랜 후에 6·25사변이 난 다음에 이 분도 남쪽으로 피난을 왔습니다. 바로 그 때 그 목사님이 신당동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것입니다. "목사님 내가 바로 목사님의 집을 지은 목수입니다. 아버님이 나에게 전도를 했었기에 내가 예수 믿고 지금은 신당동 아무 아무 교회에 장로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전도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가리지 않고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 군종감이면 나라에서 미국에 한번 보내 주곤 했습니다. 미국에 가서 이곳 저곳 다니면서 설교를 했습니다. 한 곳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제일 앞에 앉아서 설교를 듣는 여자 한 분이 생글 생글 웃으면서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저 여자가 나한테 반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모르는 여자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강단에서 내려오니 그 여자가 달려옵니다. 목사님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목사님 저를 모르시지요?"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매님 저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고향에서 목사님의 집을 지을 때 그 집을 지은 목수를 아시지요?"하고 물었습니다. "예 잘 압니다. 얼마 전에는 저의 집에도 왔었습니다" "그 때 내 아버지가 목사님의 집을 지어 드리고 목사님의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찾아다닐 때 품에 안고 다녔던 애기가 바로 접니다. 저도 결혼하고 미국에서 지금은 뿌리를 내리고 잘 살고 있는데 제 남편은 이 교회 장로요, 저는 이 교회 집사입니다"라고 하면서 아들 딸들도 소개를 하였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예수라는 ''예''자도 모르고 생가루처럼 예수에 대해서는 생짜였던 목수의 집안이었습니다. 복음이 그렇게 들어가다 보니 전부 부풀고 인격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생활의 변화가 일어나고 가정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변화되어야 하는 나라입니다.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인격, 생활, 가정이 이처럼 변화되고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믿음으로 가는 나라 (22-24)
본문으로 돌아가서 22절에서 24절을 보면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혹이''라고 하였습니다. ''혹이''는 ''어떤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나와서 하는 말이 "주여 구원을 얻을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즉 구원 얻는 숫자를 물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전부 아브라함의 자손인지라 이 많은 사람들이 전부 다 구원을 얻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많은 수가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을 아니 듣는도다"라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이 통치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을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회개하고 복음 받아들이는 그 사람만이 갈 수 있다는 말씀을 들은 이 사람에게는 숫자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나도 구원을 못 얻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어서 "수가 적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숫자에 대한 관심은 없었습니다.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느냐 하는 구원의 길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좁은 길, 좁은 문''이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길은 좁은 길, 좁은 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따르는 길은 좁은 길이요, 좁은 문이기에 고생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편하게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곧 길이요"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석가모니가 아닙니다. 공자가 아닙니다. 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의 문 즉 천국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라고 하는 길을 걸어 예수라는 문을 통해서만 하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따르는 길은 좁은 길, 좁은 문입니다. 믿음 생활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말로만 믿어서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믿음이 어떻게 나를 구원하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이 구하여도 얻지 못하리라''는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 나라를 찾으면서도 너무 쉽게만 믿으려고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갈 하나님의 나라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을 쉽게 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일에 형편이 되면 나오고 싫으면 말고 형편대로 하십시오''라고 가르친다면 얼마나 쉽습니까? ''기도는 꼭 엎드려서 해야 됩니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라고 가르친다면 얼마나 믿기 쉽습니까? 현대 교인들은 부담감 없이 교회 생활하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옛날에는 항상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봉사는 시간이 남으면 하고 없으면 말고, 전도는 너희들이나 하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믿음도 믿음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그렇게 믿는 것입니까? 그것이 믿는 사람의 태도요, 생활입니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한참 잘 못된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전도를 얼마나 많이 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봉사를 많이 하셨습니까?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가는 나라가 하늘 나라입니다. 그래서 험한 길을 걸어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가는 나라가 하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의 믿음은 바울 사도에 의해서 밝혀졌는데 "거짓이 없는 네 믿음을 보고싶다"고 하였습니다. 루스드라라고 하는 곳에 바울이 전도를 하러갔습니다. 그 때 마침 바울을 통해서 디모데가 예수를 영접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제법 수가 더한다고 했을 때 그 동네에 살던 유대 사람, 이웃 동네에 살던 유대인들이 몰려와서 바울을 돌로 쳐서 분명히 죽였습니다. 죽은 줄 알고 바울의 시신을 쓰레기장에 버렸습니다. 처음 믿은 교인들이 죽 둘러서 있지 않습니까? 그런 광경을 보고서도 디모데가 믿기를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정신을 차리고 피투성이가 된 바울이 일어났습니다. 기절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툭툭 털고 일어나서 전도를 하러 다른 곳으로 떠나갔습니다. 디모데 자신도 저렇게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디모데는 믿었습니다. 바울이 전도 여행을 마치고 다시 루스드라에 왔을 때 디모데가 더욱 열심히 믿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 때 바울 사도가 교인들을 모아 놓고 "여러분들이 보았지만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렇게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까? 나중에는 다시 전도 여행길에 루스드라에 가서 디모데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하자고 요청했습니다. 약한 몸, 병든 몸으로 따라나섰습니다. 그것이 거짓 없는 믿음이요, 순교적인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행함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이처럼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쉽게 믿으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은 구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하늘 나라는 진정으로 거짓 없는 믿음, 순교적인 믿음, 이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첫째 교회를 통해서 계속 성장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는 부흥해야 됩니다. 생명의 공동체는 성장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변화되는 나라입니다. 복음에 전혀 접하지 못했던 생가루 덩이 같던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인격의 변화, 생활의 변화, 가정의 변화를 통해서 하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오직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디모데처럼 거짓 없는 믿음, 순교적인 믿음의 소유자가 가는 나라입니다. 이 믿음을 갖고 하늘 나라에 한 사람도 빠짐 없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