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 교회)

너무 쉬워 관심을 못 끈 비유?

오늘은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비유를 읽었습니다. 이 비유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지난주일과 그 지난 주일에 읽었던 비유들과는 반대로 이해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사용되는 언어에 있어서나 전개되는 이야기에 있어서나 매우 평이해 보이고 따라서 전하려는 메시지도 분명해 보입니다. 하지만 잘 읽어보면 이 비유 역시 곰곰이 따져봐야 할 구석이 적지 않습니다. 한 줄씩 읽어가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떤 부자가 밭에서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여기서 ‘밭’은 희랍어로 ‘코라’인데 매우 넓은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구역’(district)이나 ‘지역’(region)으로 번역해야 할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땅을 가리킵니다. ‘많은 소출’은 희랍어로 ‘유포레오’인데 ‘풍작’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말입니다.

농사를 짓다보면 풍작일 때도 있고 흉작일 때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풍작이 되는 경우도 드물고 계속해서 흉작이 이어지는 경우 역시 드뭅니다. 길게 보면 풍작과 흉작은 번갈아가며 일어납니다. 어떤 해가 풍작이었다면 물론 반가운 일이고 기뻐해야 할 일이긴 하지만 그것을 유례없는 대단한 일로 볼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만 읽으면 비유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사건이 어떻게 전개될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이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며 혼자 궁리하다가...”




이 대목에서 비로소 부자의 관심사가 드러납니다. 그의 관심은 곡식을 쌓아둘 데가 부족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기존의 창고로는 다 보관할 수 없을 정도로 풍작이었던 얘기가 됩니다. 예기치 않았던 일이 벌어졌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유는 부자를 준비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꾸짖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준비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습니다. 등불에 쓸 기름을 준비하지 않아 정작 신랑이 왔을 때 맞이하러 나가지 못한 준비되지 않은 신부를 꾸짖는 비유가 있지만 오늘의 비유는 준비성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곡식을 쌓아둘 공간이 부족하면 창고를 더 지으면 됩니다.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돈이 없나 일꾼이 없나,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말입니다. 부자가 ‘혼자 궁리했다’고 했는데 사실 궁리고 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창고를 지으면 되니 말입니다.




“옳지 좋은 수가 있다. 내 창고를 헐고 더 큰 것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어야지.”




역시 예상대로 부자는 창고를 더 짓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는 기존의 창고를 헐고 그보다 더 큰 새 창고를 짓겠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왜 이래야 했을까요? 그는 기존의 창고를 그대로 놔두고 새 창고를 증축하지 않고 왜 기존의 창고를 헐어버리고 새로운 창고를 짓기로 작정했을까요? 기존의 창고가 낡고 비가 새서 곡식을 보관하는 데 문제가 있었을까요? 비유는 이 점에 대해서 한 마디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비유가 얘기하는 점에 근거해서 추측해야 합니다. 비유가 말하는 점은 ‘많은 소출’을 얻게 되어 ‘쌓아둘 곳이 없었다.’는 점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해에 거둔 소출이 엄청나게 많아서 기존의 창고로는 쌓아둘 곳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개축’ 또는 ‘증축’만으로는 그 양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예 다 헐고 ‘신축’하기로 했다고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비유의 초점은, 비록 눈에 띠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부자가 얼마나 많은 소출을 거뒀는가 하는 데 맞춰져 있습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추수한 양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습니다. 기존의 창고로는 도저히 저장할 수 없을 정도의 큰 풍작은 분명 범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는 흔히 말하는 ‘기적’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이나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의 결과라고 봐야 합니다. 현대인은 풍작의 원인으로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품종 개량이나 우수한 비료, 때맞춘 비와 좋은 날씨 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례없는 풍작의 원인으로서 고대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 밖에는 없었습니다. 비유의 청중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소출을 많이 거두게 되어 새로 창고를 지어야 했다고 했을 때 청중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직까지는 부자가 그 많은 소출로 무엇을 할지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으므로 청중들은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궁금해 했을 터이지만 동시에 청중들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자기들의 조상인 요셉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부모의 편애와 이로 인한 형들의 질투로 인해 죽을 위기에 빠졌다가 겨우 살아남아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은 이집트 왕 바로의 꿈을 풀이해준 후 승승장구해서 총리대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이집트에 풍년이 들자 남는 곡식을 흥청망청 소비하지 않고 흉년에 대비해서 저장토록 했습니다. 과연 풍년이 지나가자 이집트뿐 아니라 가나안 지역까지 기근이 들었습니다. 가나안에 살고 있던 야곱의 가족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왔다가 요셉과 재회하게 됩니다. 성경은, 요셉이 이집트의 총리대신을 지내는 동안 유례없는 풍작이 거듭된 것이 그를 가족들과 재회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계획을 요셉에게 명시적으로 일러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읽는 통찰력은 전적으로 요셉의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요셉은 그와 같은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계심을 느꼈습니다. 구체적인 계시를 받지 못했지만 신앙에 바탕을 둔 요셉의 지혜는 유례없는 풍작이라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시려는지를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청중들은 부자가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서 엄청나게 많은 곡식을 거뒀다고 했을 때 앞으로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나리라는 점을 기대하며 듣고 있었고, 또 하나님께서 부자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계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청중들은 요셉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앞으로 부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을 받은 부자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주시하며 귀를 세워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리라.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




새로 창고를 짓기로 한 부자가 진정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었는지가 이 말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소출을 많이 거두어 앞으로 몇 년 동안은 ‘걱정’할 일이 없어졌으니 이제부터는 실컷 놀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기로 그는 작정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걱정’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걱정’이랍니다! 그렇게 큰 땅을 갖고 있던 부자가 일용할 양식을 걱정했을 리는 없는데 도대체 그에게 뭐 그리 대단한 걱정이 있었을까요? 물론 먹고 살 것이 있다고 해서 걱정이 없어지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그는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겠다는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고 하셨다.




이야기의 극적인 효과는 반전(反轉)에서 옵니다. 미리 김을 빼면 반전의 효과가 없습니다. 반전은 느닷없이 닥쳐야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앞에서 전혀 암시되어 있지 않은 반전은 듣는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반전을 노릴 때는 은근히 암시하면서도 깜짝 놀라게 들이대야 하는 것입니다.

비유는 유례없는 풍작, 창고를 헐고 다시 지어야 할 정도의 풍작을 얘기하면서 이미 ‘하나님’이라는 결정적인 변수에 대해 암시한 바 있습니다. 그렇게 무대 뒤에 있던 하나님을 무대 위로 올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은 부자를 향해서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래의 장밋빛 계획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입니다. 미래의 첫날일 줄 알았던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되는 순간입니다.




돈 안에 있는 두 얼굴

우리는 이 비유에 두 가지 관심이 있음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비유를 읽고 첫 번째 관심사에만 주목합니다. 물론 첫 번째 관심사도 중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놓친 두 번째 관심사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첫째로, 미래의 불확실성을 고려하지 않는 미래계획, 그리고 인간의 삶을 이끌어나가시는 궁극적인 주인공인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은 인간의 모든 미래계획은 어리석다는 점입니다. 창고를 세우고 실컷 쉬고 놀고먹고 마시자고 계획했던 ‘오늘 낮’의 현실과 그의 영혼이 떠나가게 될 ‘오늘 밤’의 현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가에 따라서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두 현실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비유는 이 사실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비유는 이 부자가 쌓아둔 것이 ‘누구의 차지가 될까?’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비유는 재산의 흐름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비유는 어리석은 부자의 영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만일 오늘 밤 그의 영혼이 그를 떠나간다면 “네가 쌓아둔 것이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라고 비유는 묻습니다. 이 질문이 비유의 마지막 말입니다. 비유는 부자의 영혼에도 관심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가 갖고 있던 재산, 그것을 갖고 장밋빛 미래를 설계하던 바로 그 재산의 향방에도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영혼만 아니라 물질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비유는 대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의 대답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네가 쌓아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는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을 전도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우리가 쌓아둔 것들은 결국 “엉뚱한 데로 간다.”고 대답합니다. 전도서 6장 1절 이하를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억울한 일이 하늘 아래 있는 것을 나는 보았다. 부귀영화를 아쉬움 없이 누려보지 못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물려주는 일이 있다. 헛되다 뿐이랴! 통탄할 일이다.” 전도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인생을 ‘헛되고 헛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도 물질과 재산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축복은 받은 사람이 모두 써야 보람이 있지, 그렇지 않으면 헛될 뿐입니다. 세상에는 그것을 다 누려보지 못하고 죽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고 그런 일이 인생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인생은 헛되다고 했습니다.

오늘 비유에서 예수님이 “네가 쌓아둔 것이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기대하셨던 대답은 전도서의 염세적인 그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 재산이 누구의 차지가 될 것인가 라는 질문은 동시에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재산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질문과도 통합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물질은 단순히 물질에 그치지 않습니다. 물질을 단순히 물질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모든 물질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질은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흔히 넘치도록 풍성하게 받았을 때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나 혼자 쓰기에도 부족한 재물도 역시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입니다. 물질이 하나님의 축복인가, 그렇지 않은가는 물질의 양(量)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넘치도록 받았을 때만 하나님의 축복으로 감사하고 부족하게 받았을 때는 불평하는 태도는 신앙인으로서 옳지 않은 태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흔히 재물을 받을 때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쓸 때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수가 많은데 이 역시 잘못된 태도입니다. 받았을 때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이었던 재물은 쓸 때도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답게 써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점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둘째로, 또 다른 의미에서 물질은 단순히 물질에 그치지 않습니다. 물질은 그 안에 인간관계를 담고 있습니다. 물질은 곧 인간관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돈이나 물질 안에서 두 얼굴을 봐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얼굴입니다. 물질은 곧 내가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입니다.

역설적으로 이 사실을 인류에게 가장 절실하게 가르쳐 준 사람들은 기독교 철학자들이 아니라 유물론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유물론자, 물질주의자 등으로 부르지만 사실 그들은 물질관계 속에 있는 인간관계, 물질관계로 포장되어 있는 인간관계,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의 상품관계 속에서 인간의 얼굴을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중국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물건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격이 저렴합니다. 어떻게 저렇게 싸게 팔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드는 의문은, 저 물건을 만든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임금을 받을까, 그 임금으로 먹을 양식이나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중국산 대바구니 하나에서, 스리랑카 산 티셔츠 한 장에서 노동자의 땀과 눈물과 삶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인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지난주에 성공회대학 교수였던 신영복 선생님의 은퇴식이 있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제가 이 분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87년 또는 1988년에 가톨릭교회에서 발간하던 ‘평화신문’에 실렸던 글을 통함 만남이었습니다. 그때 그분이 감옥에서 쓴 편지의 일부가 신문에 실렸는데 제가 그때 그분의 글을 읽고 느꼈던 감격은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마치 뭔가로 머리를 세게 두들겨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글들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란 제목으로 책이 되어 나왔지요. 실제로 몇 번 먼발치에서 본 적은 있지만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그 분을 저는 존경하는 선생님으로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분은 통혁당 사건이란 이름이 붙어 있는 조직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고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감옥에서 20년을 살다 80년대 말에 세상에 나오셨습니다. 그 즈음에 한 잡지에 글을 쓰셨는데 저는 그 글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여기고 살고 있습니다. 그분이 감옥에 오래 있다 보니 세상의 현실과 멀어져 있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실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사물의 본질을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 그분은 어떤 물건을 보면 그 물건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을까,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노동했을까를 떠올렸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보면 서까래에 올라앉아 망치질을 하는 목수의 땀에 젖은 더러운 옷이나 무거운 벽돌을 등에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떠올렸다는 것이지요. 할 수만 있으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아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쌀을 보면 모내기를 하는 농부, 거머리가 종아리에 더덕더덕 붙어 있는 상태에서 피를 뽑는 고향 마을의 아저씨를 떠올렸습니다. 선생님은 모든 물질이 그와 같은 인간의 땀과 눈물의 산물이고 그 안에는 인간과 인간의 끈끈한 관계, 때로는 서로 돕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해치려하고, 위해서 희생할 때도 있지만 또 딛고 일어서려고 할 때도 있는 바로 그 관계가 서려 있음을 명심하려 했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런 선생님의 태도에서 중요한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올바른 물질관계 위에서만 맺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의 모든 관계도 올바른 물질관계 안에서만 맺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물질에 둘러싸여 살고 있습니다. 많든 적든 돈과 늘 씨름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물질과 돈을 단순히 물질로만 보는 사람은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물질과 돈을 단순히 하나님의 축복으로만 보는 사람도 진정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물질과 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동시에 인간의 얼굴도 볼 수 있는 사람, 그가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네가 쌓아둔 것이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는 우리가 늘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