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건용 목사 (향린교회)

추석에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사건

지난 6일이 추석이었습니다. 미국에 살면 추석 기분이 별로 들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이번 추석이 긴 연휴였으므로 사람들은 비교적 편안하게 고향에 다녀온 모양입니다. 추석에 고향에 다녀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민족의 대이동’이란 말을 씁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만의 독특한 현상이라 하겠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살고 있다는 얘기지요. 그래도 그나마 추석에는 교향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민 와서 사는 우리들보다는 형편이 낫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국에서는 추석에 신문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인터넷 덕분에 추석에도 계속 국내외의 소식을 들을 수 있어 좋습니다. 이번 추석에 제 눈에 띤 기사가 있었습니다. 작은 기사지만 한 동안 제 눈길은 그 기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추석에는 흩어져 살고 있던 가족들이 모이게 마련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라 반갑기도 하겠지만 흩어져 살고 있었기에 드러나지 않았던 갈등이 이를 계기로 해서 표면에 드러나기도 합니다. 제가 본 기사는 이렇습니다. 추석이라 온 가족이 모였는데 형제, 자매간에 부모님이 남겨놓은 재산 문제로 다툼이 벌어졌고 다툼으로 해서 동생이 자기 누나를 살해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부모가 남겨놓은 한 2억 원 정도의 재산을 갖고 남매간에 다투다가 술김에 동생이 누나를 흉기로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2억 원이 작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동기간에 살인극을 벌일 만큼 대단한 돈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 액수가 아무리 크더라도 생명을 빼앗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그 다툼과 살인이 부모가 남겨놓은 재산 때문에 일어났다면 먼저 가신 부모님이 이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8월 마지막 주일에 누가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생각해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장에 나오는 비슷한 말씀을 오늘의 설교 본문으로 정한 계기는 제가 신문에서 읽은 사건이었습니다. 부모의 유산 문제로 다투다 일어난 어처구니없는 비극이 오늘 말씀을 생각해보게 만들었습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말라

누가복음 12장 13절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 형더러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주십시오.”라고 부탁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부탁을 얼른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했기에 이런 부탁을 했을까요? 예수님이 유산을 나눠주라고 말씀한다고 해서 형이 그 말을 들으리라고 생각했을까요?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 명령한다고 해서 그 명령을 들을 사람이 있을까요?

그러나 당시 유대사회의 상황을 알면 이 부탁이 이해가 됩니다. 구약성경의 율법에는 유산 분배에 대한 규정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경우에 어떻게, 어떤 비율로 유산이 분배되어야 하는지가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세부 사항에 대한 유권해석의 권한은 랍비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했다는 사실은 그가 예수님은 권위 있는 랍비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비단 이 사람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했다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런 요청을 받았다면 이는 명예로 여길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분배자로 세웠단 말이냐?”라고 대꾸하셨습니다. 듣기에 따라 다르지만 이 말씀은 대략 거절의 의사로 들립니다. 왜 예수님은 이를 거절하셨을까요?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군중들의 관심은 다른 데로 돌려놓으셨습니다.

유산 분배에 관한 부탁을 거절하신 후에 예수님은 곧 군중들을 향해서(유산분배를 부탁한 그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예수님은 여기서 ‘탐욕’이란 주제를 제시하셨습니다. 이 탐욕은 주로 물질에 대한 욕심을 가리키는 듯합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라는 말은 정신적이거나 영적인 부보다는 물질적 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물질에 대한 욕심인 탐욕에 빠지지 말 것을 경고하시고는 세 가지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이후에 전개되는 세 가지 이야기는 모두 ‘탐욕’이라는 주제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 대해서는 지난 8월에 설교했으므로 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비유는 소출을 많이 거두어 창고를 새로 지으려는 야심만만한 계획을 갖고 있다가 그날 밤 하나님으로부터 소환명령을 받는 부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가 탐욕에 관한 비유라면 여기서 탐욕은 하나님 없는 미래 계획, 곧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고 세우는 미래에 관한 모든 장밋빛 계획을 가리킨다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에 무엇을 걸칠까 염려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귀에 매우 익숙합니다. 저 유명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 말씀을 이곳저곳에 흩어놓았습니다. 누가가 적절한 배경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산상수훈의 말씀을 갖다 놓은 것입니다. 누가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로 시작되는 말씀을 ‘탐욕’에 대해서 말씀하는 자리에 갖다 놓았습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을 잘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마태복음에는 이 말씀이 탐욕과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말씀을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 탐욕이라는 주제 아래에 갖다 놨습니다. 누가는 ‘염려’가 탐욕과 관련되어 있다고 본 모양입니다. 탐욕과 염려는 연결이 잘 되지 않는 주제들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염려는 가장 기본적인 ‘생계’에 대한 염려인 반면 탐욕은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 욕심 부리는 것이니 말입니다. 이 둘을 연결시킨 누가의 의도를 알려면 더 깊은 생각이 필요하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오늘 본문은 이 말씀이 아니므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오늘 우리의 본문입니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헤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 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도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두 부흥회 이야기

추석이었던 그저께 하루 동안 저는 기억에 남는 두 얘기를 들었습니다. 둘 다 동료목사에게서 들었고 둘 다 부흥회에 관한 얘기인데 내용은 정반대였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그 교회 목사는 요즘 교인들의 헌금이 줄었기 때문에 ‘헌금 거두기’가 특기인 강사를 청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러 해 전에 같은 강사를 청해서 부흥회를 했는데 소기의 ‘성과’를 거뒀으므로 이번에 또 청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오래 나닌 분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많은 교회들에서 이렇게 합니다.

이런 일은 일단 담임목사가 잘못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데는 목사 탓만 할 일도 아닙니다. 목사로 하여금 이렇게밖에는 할 수 없게 만든 교인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회에서 건물을 타인종에게 빌려주고 임대료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재정수입이 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연말에 보니까 전체 재정수입은 별로 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대 수입을 감안해서 교인들이 헌금을 덜 냈기 때문이었습니다. 헌금이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이므로 ‘무리해서’ 드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이므로 ‘교회에서 필요한 재정 중에서 내가 부담해야 하는 부분’ 정도로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도 역시 부흥회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이번에는 부흥회 내내 강사가 ‘목사를 잘 모셔서 축복받은 사람들’ 얘기만 하더랍니다. 제게 이 얘기를 해준 목사는 그 교회 담임목사인데 이 분은 부흥회 내내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고 합니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저런 말을 사흘 내내 하는가? 물론 아직 어려운 교회도 많고 생계가 어려운 목사도 많지만 이 소중한 시간을 저렇게 낭비해서 되겠나? 혹시 내가 강사와 짜고 이런 얘기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교인들이 생각하면 어쩌나?’ 등등의 생각이 내내 들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교회에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조할 때 많이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돈 바치는 곳에 마음도 있으니 신앙이 있다면 하나님께 많이 바쳐라! 헌금 액수의 크기가 바로 신앙의 크기와 같다! 뭐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이 말씀은 절대로 그런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탐욕’이라는 주제 아래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은 곧 창고

앞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누가는 왜 이 세 말씀을 한 곳에 모아놨을까요? 바로 ‘창고’라는 말에서 공통점을 봤기 때문입니다. ‘창고’는 세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입니다. ‘창고’는 흔히 쓰이는 보통명사로서 특별한 뜻을 가진 말이 아닙니다. 이 안에는 대단한 철학이 담겨 있지도 않고 심오한 종교적 진리가 담겨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탐욕과 관련해서 ‘창고’라는 말이 사용되는 세 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필시 뭔가 중요한 뜻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탐욕이란 창고에 들어 있는 물건이 아니라 창고 그 자체의 문제라고 여기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바치는 예물의 종류는 가정형편에 따라서 정해졌는데 요셉과 마리아는 새끼 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바쳤다고 했습니다. 새끼 비둘기 두 마리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는 예물이었습니다. 예수님 가정은 유대 사회 안에서 최고 빈민층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과 당신 제자들이 당할 고난을 전체적으로 상징하는 말씀이지만 그 안에는 물질적 빈곤의 뜻이 분명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금욕적인 삶을 사시지는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금욕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 귀신들렸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리는 형편없는 사람”이란 평판을 사람들에게서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값진 것을 억지로 버리려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하기는 갖고 있었던 것이 없었으니 버릴 것도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은 포기하거나 단념하고 결핍을 감수하는 길이 영혼을 해방시키는 길이라고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포기나 감수, 또는 단념과 같은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물질로부터 자유로우셨을 따름입니다. 보통사람들이 물질을 단념하기 위해서, 또는 탐욕을 줄이거나 없애기 위해서 영혼 안에서 벌여야 하는 치열한 싸움으로부터 예수님은 자유로우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당신이 누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질투나 분노로부터도 자유로우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포기하기 위해 극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많이 가진 부자들을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그들을 불쌍하게 여기셨고 측은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삶이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살 수 없다고 해서 그렇게 살려고 하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람이 되려는 목표로 살면 짐승처럼 살게 되고 천사가 되려는 목표로 살아야 비로소 사람처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길로 저는 세 가지를 말씀하고 싶습니다. 첫째, 여러분이 갖고 있는 부(富)를 쓰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도 쓰고 남을 위해서도 쓰십시오. 그러나 부를 신뢰하지는 마십시오. 부는 부일뿐이고 물질은 물질일 뿐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인격을 높이는 데는 한계가 있고 더욱이 여러분의 영혼을 담보해주지는 않습니다. 부를 쓰되 그것을 신뢰하지는 마십시오. 둘째로, 부의 결핍을 이상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는 어차피 이 세상에서 성자의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절약은 좋은 미덕이지만 결핍은 여러분의 영혼을 망가뜨리기 십상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삶을 이상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런 방식의 삶도 있지만 그것은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하는 이상을 버리지 마십시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격은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하지만 삶의 긴장을 유지시켜주기도 합니다. 늘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부족 때문에 속상해하지 마시고 오히려 그 부족을 감사하십시오. ♣ (2006년 10월 8일 / 성령강림절 열아홉 번째 주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