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목사 (오륜교회)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와 복음의 증거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각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며 열심히 이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 복음 사역에 12명의 제자와 은혜를 받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룻한 많은 여인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12제자는 자기들의 시간과 몸을 드려 이 복음 사역에 함께 하였고 다른 여자들은 자기들의 물질을 드려 이 생명을 살리는 사역에 함께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오륜교회 성도 여러분! 정말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도 이 생명을 살리는 이 복음 사역에 함께 해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되고, 주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이제 우리도 이 복음을 위하여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선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갔고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시간과 몸과 물질을 드리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의 가족 가운데 이웃과 친척과 동료와 친구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분이 있다면 그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이름을 불러 가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남편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했는데 아무리 기도해도 반응이 없자 새벽 기도 올 때마다 자기 남편의 구두를 신문지에 싸 가지고 와서 강대상 앞에 내려놓고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내 남편은 아직 나오지 못하고 구두가 먼저 왔습니다. 내 남편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했더니 그 다음 주일날 남편이 교회에 나오더랍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렇게까지는 못할지라도 태신자 등록 카드에 이름을 써서 올리고 전 교인이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는 것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태신자 등록 카드를 적어 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에도 나누어 드리고 오늘도 나누어 드린 그 기도 카드에 여러분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세 사람 이상의 이름을 기록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적어 내라고 돈 떼먹고 도망 간 사람만 적는 경우도 있는데 물론 그 사람도 구원을 받아야겠지요. 그러나 정말 여러분이 사랑하고 구원받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기도하겠습니다.

말씀을 듣는 큰 무리
이제 오늘의 본문 4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께로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니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되”(4절)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북쩍 거렸습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산 위에서 말씀을 하시든지 아니면 빈들에서 말씀을 하시든지 때로는 바닷가에서 말씀을 전하시든지 예수님이 사역을 하시고 말씀을 전하시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첫째로, 예수님의 말씀이 권세가 있고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7:29)
예수님의 말씀은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달랐습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능력이 없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 적이 있습니까? 마음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난 적이 있습니까? 그들의 가르침에는 정죄와 참소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라! 무엇을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의 특징이었습니다. 사랑이 없었습니다. 긍휼이 없었습니다. 자유함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만들고 죄책감에 매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죽은 영혼이 살아났습니다. 귀신이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습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마음이 상한 자가 치유를 받고 죄와 죄책감에 눌린 자들이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영이다는 것은 매임을 당하지 않고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매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후서 2:9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2:9)

그렇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생명이라는 말은 살아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지금도 듣는 자들 가운데 살아역사합니다. 죽어 있는 문자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우리의 영이 살아납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쉬웠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쉬워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고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쉬워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보게되면 자기도 이해하지 못한 어려운 설교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쉬웠습니다. 주님은 뛰어난 설교가 이셨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이 쉽게 보고 경험하며 살아가는 주변의 상황들과 여러 사건들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공중에 새가 날고 있는 모습을 보면 “공중에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말씀을 전하시는 주변에 백합화가 피어 있으면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6:28)
예수님은 이렇게 주변의 여러 상황들을 가지고 쉽게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도록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밖에도 주님은 많은 비유들을 통하여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참으로 많은 비유들이 나옵니다. 탕자의 비유, 열처녀의 비유, 진주의 비유,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 달란트 비유등 많은 비유가 나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씨뿌리는 비유로 널리 알려진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한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을 보면서 씨 뿌리는 비유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씨를 뿌릴 때 우리나라사람들처럼 그렇게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어떻게 씨를 뿌립니다. 먼저 밭을 갑니다. 그리고 씨가 잘 떨어져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돌과 잡초를 제거하고 흙을 잘게 부순 다음 토양을 부드럽게 하여 그 위에 씨를 뿌립니다. 그리고 그 위에 약간의 흙을 덮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원시적인 방법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땅을 갈아 놓고 씨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맨 바닥에 씨를 뿌려 놓고 적당하게 흙으로 덮습니다. 그러니까 씨들이 길가에 떨어지기도 하고 바위 위에 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비유에는 네 가지의 밭이 나옵니다. ① 길가 ② 바위 ③ 가시떨기 ④좋은 밭 4가지의 밭이 나옵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따져보면 오늘 이 비유는 씨에 관한 비유가 아닙니다. 밭에 관한 비유입니다. 씨는 똑같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와 바위 위에 떨어진 씨와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와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모두 동일합니다. 문제는 씨가 떨어진 밭입니다. 밭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
예수님은 이 비유의 뜻을 묻는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해석하여 주시면서 이 비유는 바로 하나님나라의 비밀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9절과 10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9절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물으니”
10절 “가라사대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이 씨뿌리는 비유, 아니 밭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된 비밀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비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뮈스테리아’는 단어입니다. 이 말에서 영어의 "mistery"라는 단어가 유래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비밀은 "secret"이라는 뜻 보다는 신비 즉 "mistery"로 번역함이 더 성경적인 것 같습니다. 영어 성경에도 보면 NIV는 "secre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지만 KIV에서는 "mistery"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비밀과 신비는 차이가 있습니다. 비밀이란 가르쳐 주지 않거나 보여 주지 않으면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미스테리란 보여 주는데도 가르쳐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만을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들이 듣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복음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다 깨닫고 주께로 돌아왔습니까? 아닙니다. 듣는 자는 많았지만 듣고 깨달음으로 주님의 제자가 된 자는 많지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똑같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이 깨달아지고 어떤 사람은 깨달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동일한 햇빛 아래서 양초는 녹아 내리지만 진흙은 굳어지는 것처럼 동일한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말씀을 들어도 어떤 사람은 가슴을 치며 애통하며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이 더욱 강퍅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음성을 들을 지어다”라는 말을 계속적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 비유속에 담겨진 하나님나라의 비밀(신비)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비유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은
첫째로, 씨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말씀하시면서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비유는 이러하니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요”(11절)
씨는 작지만 살아있는 생명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그 씨에서 싹이 나오고 잎이 나오고 나중에는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곧 씨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 곧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특징이 뭡니까? 살아 움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둘째로, 밭이 곧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밭이 곧 마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와서 그들로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12절)
말씀을 마음에서 빼앗는다는 말은 밭이 곧 마음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서 나오는 4 종류의 밭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말합니다.

사람들을 보면 그 모양이 다르고 성품이 다 다릅니다. 제가 보니까 이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쌍둥이도 우리가 보기에는 다 똑같아 보이지만 부모는 금방 압니다. 다리의 모양만 하더라도 다 다릅니다. 어떤 다리는 가느다랗고 어떤 다리는 통통합니다. 어떤 다리는 안 쪽으로 휘었고 어떤 다리는 바깥쪽으로 휘어져 있습니다. 사람의 눈도 보십시오. 어떤 눈은 크고 어떤 눈은 작습니다. 어떤 사람의 눈은 위로 올라가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의 눈은 아래로 내려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눈썹은 진하고 어떤 사람의 눈썹은 일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다 다릅니다.
요즘 아내와 함께 올림픽 아파트와 공원을 돌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걷고 뛰는 사람의 모습이 다 다릅니다. 그렇듯이 우리 사람의 마음도 다 다릅니다. 선한 마음이 있고 악한 마음이 있습니다. 지저분한 마음이 있고 깨끗한 마음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이 있는가 하면 강퍅한 마음이 있습니다. 단순한 마음이 있는가 하면 복잡한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은 인간의 사고와 인격과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했고 우리말에도 세상 만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씨와 좋은 밭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천국은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말씀을 듣는 태도에 따라 결정되어 집니다. 내가 빛 가운데 거하게 될지 아니면 어두움 가운데 거하게 될지 그것은 곧 말씀을 듣는 태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비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신비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되면 말씀을 듣고 시간이 없으면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오늘 예배시간에 말씀을 듣지 못해도 인터넷에 들어가면 얼마든지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 듣는 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말씀은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현장감 있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 교사들 가운데 주일학교에서 예배를 드리고는 예배를 다 드린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대상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항상 우리는 오늘 내게 주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비유 속에는 4 종류의 마음 밭이 나옵니다.
첫째로 나오는 밭이 바로 길가와 같은 마음입니다. 5절을 보겠습니다.
“씨 뿌리는 자가 자기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리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밟히고 공중의 날짐승들이 먹어 버렸고"(5절)
씨를 뿌리는 자기 씨를 뿌리려고 나아가 씨를 뿌렸습니다. 여기서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복음 전도자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 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이 시대에 씨를 뿌리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력으로가 아니라 이렇게 조용히 씨를 뿌리는 자들에 의해 확장되어져 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뿌려진 씨가 어디에 떨어졌습니까? 길가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길가와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길은 어떤 곳입니까? 사람들이 많이 왕래함으로 인하여 굳게 다져지고 다져진 땅입니다. 마찬가지로 길가와 같은 마음도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자기 나름대로 얻은 잡다한 지식이나 경험, 그리고 혹은 잘못된 전통이나 선입견 등을 통해서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런 길가와 같은 마음의 특징은 굉장히 폐쇄적이고 고집스럽고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길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마음의 밭에는 아무리 좋은 씨가 떨어져도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공중의 날짐승들이 그 길가에 떨어진 씨를 먹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공중의 날 짐승은 무엇을 말합니까? 1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길가에 있는 자들은 말씀을 듣는 자들인데 마귀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라"(12절)
예수님은 공중의 새가 곧 공중 권세 잡은 마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사람들에 의해 밟히고 공중의 새가 와서 먹어 버렸는데 그 새는 바로 다름이 아니라 마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마귀가 하는 주된 일이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그 말씀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말씀의 능력을 압니다. 말씀의 권세를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죄를 품고 있는 자가 그 죄를 버리게 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자가 자유함을 얻고, 말씀을 들으면 믿음이 자라고, 말씀을 들으면 속 사람이 강건해 지고, 말씀을 들으면 그 영혼이 힘을 얻는 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그래서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우리의 마음 밭에 떨어지지 않도록 역사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떨어지지 못하도록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합니다.
고후 4:4절에 보면 “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 했습니다.
집중력을 떨어뜨립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합니다. 때로는 분주함을 통해서 말씀을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합니다. 때로는 너무 피곤하게 만들어서 말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설교 시간에 졸게 만들어서 설교를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설교가 시작되면 자동으로 졸기 시작합니다. 어쩌다가 피곤하여 자는 경우도 있겠지만 설교시간만 되면 습관적으로 자는 사람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냥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아버지의 집에 왔으니 졸 수도 있겠지 하면서 그냥 설교만 하시는데 그래서는 안됩니다. 말씀을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고 죽느냐? 사느냐? 빛 가운데 거하느냐? 어둠 가운데 거하느냐? 가 결정되는데 그냥 지나가면 되겠습니까?

총알 택시 기사하고 점잖은 목사님하고 천국엘 같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중에 누가 책망을 들은 지 아십니까? 총알택시 기사입니까? 아니면 점잖은 목사님이실까요? 목사님이 꾸중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랍니다. ‘총알택시 기사는 늘 사람들로 하여금 깨어 기도하게 하였는데 너는 왜 어찌하여 설교 시간마다 성도들로 하여금 자게 만들었느냐?’

예수님은 12절에서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는 마귀가 와서 그 말씀을 빼앗아감으로 믿지도 못하고 구원받지도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주님은 분명하게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는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설교 시간에 조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면 되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전도하다 보면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너나 잘 믿어” “별나라 달나라를 가는 이런 시대에 지금도 뒤떨어진 그런 종교를 믿느냐”며 반문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에도 보면 그런 사람이 많이 나옵니다. 유대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바울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억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어느 날 자기 아내와 함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하여 들었습니다. (행24:24) 바울이 그에게 의와 절제와 앞으로 있을 심판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그는 그냥 두려워 떨었습니다. (행24:25) 그러나 그는 결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복음을 듣고 회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만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말씀을 받았지만 마귀가 그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은 내가 어떻게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말씀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또 나의 믿음의 성장도 말씀에 대한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나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성경에 나오는 교회들 가운데 가장 짧은 기간에 경이적인 교회의 부흥을 이룬 교회입니다. 그 부흥의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연설로 듣지 아니하였습니다.
왜 나는 이렇게 믿음이 자라지 않을까? 왜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감격이 없을까? 이것 때문에 고민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해본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그런 분들에게 희소식이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해결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천로역정을 쓴 존 번 연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도 늘 이런 고민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나는 왜 믿음이 자라지 않을까? 나는 왜 감격이 없을까? 그러던 어느 날 이 씨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읽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내가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은 말씀의 씨앗이 길가와 같은 내 마음에 떨어졌을 때 그 말씀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공중의 새가 와서 그것을 먹어버린다고 했는데 그 공중의 새가 바로 마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귀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말씀을 빼앗아 가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기의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분하고 원통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예배가 시작된 다음에 들어와서 제일 뒷자리에서 말씀을 듣고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는 일주일 동안 주일 예배를 사모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예배시작 30분 전에 도착하여 기도로 예배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사단이 말씀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큰 소리로 아멘을 외치면서 말씀을 받아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존 번연의 믿음은 몰라보게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중에 천로역정이라는 대작을 남겼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아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씨앗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을 사모하십시오.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십시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자라기 시작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받는 나의 태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