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목사 (오륜교회)

우리는 지난 주 씨뿌리는 비유, 즉 밭의 비유를 통하여 이 비유 속에 숨겨진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함께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란 예수님이 통치하심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듣는 우리의 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씨와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1절에서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보면 씨는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작은 생명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어 있는 문자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좌우에 날선 어떤 검과 같이 예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한 그분의 말씀도 살아 역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들으면 죽은 영혼이 살아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죄책감이 사라집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면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이 떠나갑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눌린 자가 자유함을 얻고 우리의 침체된 영혼이 새 힘을 얻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무디어진 심령이 예민해집니다. 이 말씀의 선포 앞에 죄인이 찔림을 받고 가슴을 치며 통회합니다. 이렇게 말씀이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믿음이 자랍니다. 바울은 로마서 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보다도 이 말씀의 능력을 더 잘 알고 있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아세요? 사단 마귀입니다. 사단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을 듣는 그 시간에 가장 강하게 역사합니다. 여러분 말씀을 듣는 이 시간에 사단 마귀는 가장 바쁘게 활동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말씀의 씨앗이 우리의 마음 밭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역사합니다. 그래서 말씀의 씨앗이 길가에 떨어졌을 때 공중의 새들이 와서 먹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12절에서 이 공중의 새가 마귀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길가에 있는 자들은 말씀을 듣는 자들인데 마귀가 와서 그들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가므로 믿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이라"(12절)
공중 권세잡은 자인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 갑니다. 마귀의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말씀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마귀가 말씀을 빼앗아 감으로 내 믿음이 자라지 못하고 내 남편이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처럼 분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아멘으로 화답하며 말씀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비유에는 4가지의 마음 밭이 나오는데 우리는 지난 시간 첫 번째 길가와 같은 마음의 밭을 생각했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의 밭은 단단하게 굳어진 마음을 말합니다. 세상의 지식과 선입관과 전통에 의하여 단단하게 굳어져버린 교만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런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도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습니다.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냥 예배만 참석하고 돌아갑니다.

바위와 같은 마음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6절)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졌습니다. 바위 위에 떨어졌다는 것은 전혀 흙이 없는 커다란 바위 위에 떨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는 바위 위에 떨어졌다는 것을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마13:5)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돌밭이라고 하니까 흙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갈밭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자갈밭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토지 중에는 밑바닥에 넓은 석회암이 깔려 있고 표면에는 흙이 얇게 덮여 있는 지역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밑에는 넓은 석회암이 깔려 있고 표면에는 흙이 얇게 깔려 있는 곳에 그곳에 씨가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떨어진 씨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반드시 습기가 있어야 합니다. 메마르고 건조한 곳에는 생명이 자랄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신문을 보니까 미국과 러시아가 화성탐사를 위하여 지금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를 지나 내년 초가 되면 무인 우주선이 화성에 착륙을 하게 되고 그렇게되면 화성에서 보내오는 각종 사진 자료들을 통해 그곳에 과연 생명체가 존재하고 있을 것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생명체가 있다, 없다고 말할 때의 근거가 뭡니까? 물입니다. 수분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수분이 없으면 오래 견디지 못하고 잠시 후에 죽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도 수분이 있어야 자랍니다. 피와 땀과 눈물이라는 수분이 있어야 믿음도 자랍니다. 성장하는 교회의 특징을 보십시오. 어떤 교회가 성장합니까? 피와 땀과 눈물이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13절에서 바위 위에 떨어진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에 대하여 설명을 하여 주셨습니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13절)
이런 마음을 가진 자는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는 자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졸거나 하품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기쁨으로 즐거움을 받는 자입니다. 말씀을 알아가는 기쁨이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에 눈을 떠 가는 재미를 가진 사람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선포되면 놓치지 않고 아멘으로 화답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말씀 앞에서는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하고 눈에 이슬이 맺히기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환난이나 핍박이 다가오면 자기도 모르게 말씀에 등을 돌리고 맙니다. 습기가 없어 뿌리를 내리지 못한 고로 너무나 쉽게 넘어집니다. 마태는 마13:20-21절에서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없으므로 환란이나 핍박이 다가오면 너무나 쉽게 넘어집니다. 곧 넘어진다는 표현을 보면 너무나 쉽게 빨리 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말씀으로 인한 기쁨보다 시험으로 인한 어려움이 더 커지면 더 이상 말씀을 간직하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말씀대로 살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 주변에 이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도 어려운 시험이 다가오면 “믿어봐도 별수 없더라”면서 진리에 대하여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기도 하고 신앙생활의 출발은 좋았는데 예수 믿어도 사업이 풀리지 않고 자녀들은 더욱 속을 썩이고 남편은 더욱 포악해지고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으면 언제 예수를 믿었느냐는 듯이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 받을 욕심에 눈 딱 감고 십일조까지 드려봤는데 더 사업이 어려워지게 되면 ‘예수 믿어도 별 소용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바위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까? 왜 오늘도 우리가 말씀 앞에 순종하며 살아갑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주어질 유익보다는 진리이기 때문에 믿고 진리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고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씀 앞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가시 떨기와 같은 마음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7절)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좋은 땅에만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더러는 길가에 , 더러는 흙이 얇은 바위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더러는 가시 떨기 속에 떨어졌습니다. 가시 떨기란 가시덤불을 말합니다. 팔레스틴에는 유난히 가시가 돋은 식물이 많이 자란다고 합니다.
농사를 지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아무리 좋은 밭도 묵혀두면 가시덤불로 우거지고 맙니다. 흙이 얇은 바위 위에 떨어진 씨앗이 움이 트자마자 말라버렸던 것과는 달리 가시떨기 속에 떨어진 씨는 움이 트고 자라기까지 합니다. 씨가 자라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흙도 충분했고 습기도 적당했습니다.
그런데 씨만 자랍니까? 아닙니다. 가시도 함께 자랍니다. 아니 씨 보다는 가시가 더 빨리 자랍니다. 씨 보다는 잡초가 더 빨리 무성하게 자라듯이 씨 보다는 가시가 더 빨리 자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 가시가 기운을 막아서 꽃이 필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그늘 속에 자란 싹 마냥 갸날프게 자란 싹은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4절에서 이 비유에 관한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시 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에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14절)
그러면 가시 떨기와 같은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말씀이 선포될 때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도 얻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면 상당기간 아쉬워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실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실치 못한다는 말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싹이 나고 뿌리가 박히긴 하였지만 가시 떨기 때문에 뿌리가 깊이 박히지 못하고 줄기가 튼튼하게 자라지 못해서 꽃이 피지도 못하고 열매를 맺지도 못하고 만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이야기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인 씨앗이 우리 안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앙이 성장하다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도록 주춤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 안에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14절을 보면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말합니다.
첫째는 이생의 염려입니다.
이생의 염려란 살아가는 동안에 사는 것 때문에 염려하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땐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당 밖을 나가서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가 되기 시작합니다. 염려가 시작되면 들었던 말씀들이 희미해지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들으며 주님의 기쁨되기를 다짐하며 소망했는데 그런 굳은 결심들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는 사업도 망할 것 같고 진급도 못할 것 같으니까 적당하게 세상과 타협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마6:25)
목숨을 주신 하나님께서 먹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몸을 주신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말씀을 믿지 못하니까 주님은 공중의 새들을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저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고 들의 백합화도 입혀 주는데 하물며 너희를 버리겠느냐? 너희를 굶어 죽게 하겠느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마6:30) 라며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마6:33)

염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은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어떤 것도 염려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 고 말합니다. 염려하지 않는 대신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염려가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서 걱정거리가 없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그 염려에 매임을 당해서는 안됩니다. 염려가 나를 지배하도록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염려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할까요? 그것은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스펄젼의 말처럼 10년 염려하는 것보다 10분 기도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염려를 기도로 바꾸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걱정을 기도로 승화시키는 사람입니다.
아무튼 이 세상의 염려가 우리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으면 말씀이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가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염려가 엄습해 올 때마다 염려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기도의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십시오. 기도로 염려를 추방하십시오. 염려대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걱정할 시간 있으면 그 시간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재리입니다.
“재리"란 ''재물''을 가리킵니다. 재물 자체를 말한 것이 아닙니다. 재물 때문에 받는 유혹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재물의 유혹을 받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이렇게 부자가 되었다는 간증을 한번쯤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실일 겁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가난하던 사람이 부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러나 부자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를 믿으면 부작용이 많습니다. 부자가 되고 나면 더 이상 믿어야 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예수 믿는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면/ 얼마 못 가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부자 관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줘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눅18:23)
그가 영생을 받지 못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습니다.
"큰 부자인 고로"
재물 때문입니다. 자기가 자랑하는 재물이 영생을 얻는데 발목을 잡은 것입니다. 재물에 대한 끝없는 인간의 욕심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지난주에 남가주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님을 만나 함께 점심을 들면서 여러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그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생은 어차피 나이가 들면 다 평준화가 된다. 30대가 되면 지식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40대가 되면 미모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60대가 되면 재물의 평준화가 이루어지고 죽을 때가 되면 죽음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 그렇습니다. 재물이 많다고 해서 그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갑니까? 살아가는데 불편이 없으면 되는 정도의 재물이면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 우리의 신앙의 성장을 멈추게 만들고 말씀의 씨앗이 우리 안에서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일락입니다.
일락은 생의 향락을 말합니다. 삶의 쾌락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쾌락적 본능이 있습니다. 쾌락을 억제하고 사느냐 추구하며 사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누구나 쾌락을 누리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구가 속에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먹고 살만하면 향락에 관심을 갖습니다. 돈에 여유가 생기면 이제 좀 즐기면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15절을 보겠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요일서2:15)
하나님 없는 삶의 목표는 세상에서 즐기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는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자" 고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기 위하여 인생을 삽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카드 빚을 내서라도 일단 즐기고 보자는 식입니다. 어떤 청소년은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팔고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삽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5:6절에서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도 인생을 즐길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도 취미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교인들도 건전한 오락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지나치면 우리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어떤 취미 생활이 여가 생활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생활하는데 장애가 된다면 과감이 그것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려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염려, 재물에 대한 욕심, 세상의 쾌락은 우리 영혼의 콜레스톨과 같습니다. 콜레스톨이 많으면 우리 안에 장기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동맥경화가 옵니다. 전신마비가 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다.

좋은 밭
마지막으로 좋은 땅에 떨어진 씨가 있었습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8절)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모든 조건이 잘 구비되어 있어 싹이 나고 튼튼한 뿌리로 자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럭무럭 성장하여 마침내 풍성한 결실을 맺었는데 그 결실이 100배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15절에서 이 좋은 땅을 착하고 좋은 마음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15절)
여기서 착하고 좋은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잘 받아들이는 마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마음의 밭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말씀의 내용을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이해가 안될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전능하심을 믿기에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 말씀대로 지키어 순종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살기를 소원하는 거룩한 열망을 가지고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말씀을 듣고 지키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말씀을 듣고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동의 변화는 오늘 내가 어떻게 말씀을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벌써 오늘 주신 말씀을 듣고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말씀 붙들고 살아 가리라!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설교를 듣는 사람은 다릅니다. 어린 사무엘과 같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말씀을 듣는 사람이 바로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설교자는 금방 이런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자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설교 내~ 딴 생각하다가 저와 눈이 마주치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무리 고개를 끄떡이지만 설교자는 금방 압니다. 아니 우리 주님은 금방 아십니다.

예화
고약하기로 소문난 놀부가 대청마루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스님이 찾아와 말했습니다.
"시주 받으러 왔소이다."
그러자 놀부는 코웃음을 치며 빨리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스님이 눈을 감고 불경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가나바라... 가나바라... 가나바라..."
그러자 놀부도 미심쩍은 웃음을 지으며 자기도 눈을 감고 불경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주나바라... 주나바라... 주나바라..."
누가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 말씀대로 지키어 순종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또 누가 착하고 좋은 마음을 가진 자입니까? 인내로 결실하는 자입니다.
씨를 뿌려놓고 금방 나가서 열매를 취하기를 원하는 농부는 없습니다. 씨를 뿌리고 난 다음에도 열심히 거름도 주고 풀도 뽑아 주고 물도 주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러분, 한두 번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하다가 실패했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세요.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도 믿음의 정상 궤도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실패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말씀을 듣자마자 말씀의 사람으로 불리워진 것이 아니었음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너무 빨리 관둡니다. 한 두 번 해보고 잘 안 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선구자인가봐?라고 생각합니다. (선천성 구제불능 자아상실자)

성도 여러분!
말씀을 지키어 순종하는 삶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갓난 아이 때 단번에 일어나 걸었습니까? 아니잖아요? 얼마나 많이 넘어졌고 얼마나 많은 실패 속에 걸음마를 배우게 되었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의 신앙이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내가 전도하고자 하는 사람이 빨리 주께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계속하여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며 나아가십시오. 계속적으로 태신자를 품고 인내하며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머지 않아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씨앗과 같고 우리의 마음 밭에는 이런 4종류의 밭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 밭은 지금 어떤 밭입니까? 길가와 같이 단단히 굳어져버린 그래서 예배에 참석했지만 말씀을 듣는 시간에 꾸벅 꾸벅 졸다가 예배당을 떠나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얇은 흙이 덮여 있는 바위와 같은 마음입니까?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그 말씀 때문에 겪게될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쉽게 넘어지는 사람은 아닙니까? 환란과 핍박 때문에 말씀에 등을 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당신의 마음은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은 아닙니까? 처음에는 말씀이 들어와 신앙이 자라기 시작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의 염려와 물질에 대한 욕심과 세상의 쾌락 때문에 나의 신앙의 성장이 멈추고 말씀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은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다.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자입니다.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위해서 말씀을 듣는 사람을 말합니다. 인내로 마침내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왜 주님이 이 마음을 원하실까요? 이런 마음을 가진 자들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의 마음 밭은 어떤 밭입니까? 내 마음이 길가와 같은가? 내 마음이 흙이 얇게 덮여 있는 바위와 같은가? 아니면 가시 떨기와 같은가? 아니면 옥토와 같이 착하고 좋은 마음입니까?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에 의해 말씀의 씨앗 때문에 이렇게 마음의 밭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씨가 뿌려지기 전에는 밭의 구별이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거기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고 나니까 내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가 구별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의 듣는 당신의 태도를 통하여 당신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점검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인 씨에 의해서 당신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가 구별되고 오늘 선포되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당신의 길가와 같고 바위와 같고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이 옥토로 바뀌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당신의 묵은 땅을 갈아 엎으십시오. 이 세상의 염려가 내게 엄습하여 올 때에도 너의 모든 염려를 내게 맡기라는 그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써 싸워 이기십시오.
왜 나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을까? 왜 나는 신앙생활은 오래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을까? 이것 때문에 고민하는 분이 계십니까? 고민만 하지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가까이 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을 바꾸십시오. 당신의 마음을 옥토로 바꾸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