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목사 (와싱톤한인교회)

1.

교회 안팍에서 성령처럼 많이 오해받고 있는 대상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체험에 대한 간증에 매료되어, 일생 동안 한 번이라도 성령을 '확실하게' 체험해 보는 것을 꿈꿉니다. 그래서 부흥집회가 있을 때마다 간절한 마음으로 참석해 보기도 하고, '용하다'는 부흥사가 어느 교회에 왔다고 하면 만사를 제껴 두고 찾아갑니다. 심지어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따져 보지도 않고 '신령하다'는 소문 한 마디에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립니다. 성령에 의해 사로잡혀 보는 것을 이렇게도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열망을 악용하여 기생하는 종교 사기꾼들도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가 전도하는 중에 만났던 어떤 사람의 말처럼 "예수님은 좋은데 성령은 싫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고 따르고 싶은데 성령이 무서워서 교회 나가기 꺼려진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평신도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들 사이에도 있습니다. 일년 동안 성령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설교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니, 성령에 대해 어떤 입장을 정하지 못한 분들은 아주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분란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바로 성령에 대한 논란이라는 사실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체험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믿음이 없다'고 단정하고, 성령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은 성령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광신자들'이라고 무시합니다.

2.

오늘 읽은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 충만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손에서 해방시키시고 40년 동안의 광야길을 거쳐 구원해 주신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초막절 축제'는 8일 동안 지속됩니다. 37절에 보니 "명절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8일째 되는 날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날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이 말씀의 의미를 다 알기 위해서는 초막절에 순례자들이 행하던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초막절이 시작되면, 매일 아침,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실로암이라는 이름을 가진 저수조에서 물을 떠다가 하나님 앞에 붓습니다. 이 의식의 의미가 분명하게 전승되지는 않아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있어 물처럼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이 의식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규정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7일 동안 반복되던 '물 붓는 제사'가 마지막 날에는 생략됩니다. 바로 이 때 예수님은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절묘한 타이밍입니다.
순례객들이 제사에 참여하고 나서, "왜 마지막 날에는 물제사를 드리지 않을까?"하고 궁금해 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여러분, 지금 물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제게 그 물이 있습니다. 제게로 와서 그 물을 마시십시오. 실로암에서 온 물로는 여러분의 참된 갈증을 해갈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분은 계속하여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물'은, 39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성령'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2장 2절에 나오는 성령의 이미지, 즉 불이 솟아 오를 때 나타나는 '불의 혀'의 이미지로 성령을 상상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 있습니다. '불길같은 주 성령'같은 찬송가 가사도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불처럼 상상하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성령을 '물'에 비유하곤 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도 예수님은 성령을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할 생수'로 비유하십니다. 우리 몸에 있어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듯,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 성령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말씀을 보면 예수를 믿는 것은 곧 성령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38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이라고 조건을 제시하십니다.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리를 받아들이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과 관계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참되게 믿게 되면, 그 사람의 배에서 성령이 흘러 넘칠 것이라는 뜻입니다.

3.

믿음은 한 순간에 갑자기 발생하는 '사건'인 동시에, 일생동안 지속되는 '과정'입니다. 왜 믿음이 한 순간에 갑자기 발생하는 '사건'입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믿으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아무리 믿으려고 노력해도 믿어지지 않는 경험을 해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그런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뭔가에 의해 '믿어지지' 않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을 믿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부족합니다. 그렇게 믿기 위해 열망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믿어질 때, 비로소 참된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믿음도 은혜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믿어지는 변화'가 일어날 때, 성령께서 우리 중에 역사하신 겁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 예수님은 성령에 대한 약속을 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 에 역사하시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깨닫게 될 것이고,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예수님이 진실로 누구신지를 알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예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없고 ,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이요, 예수를 참되게 믿으려면 성령을 받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계십니까? 그분을 진실한 마음으로 "주여!"하고 부르실 수 있습니까? "주여!"하고 부를 때, 마음에 뭔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십니까? 감사하십시오. 여러분에게는 이미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간증하는 뜨거운 체험, 차거운 체험, 눈물 콧물 쏟는 체험이 없어도, 여러분 마음에 예수님이 주님으로, 여러분 삶의 주인으로, 여러분 삶의 근거로 믿어지시면, 이미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만지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방언을 해야만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뭔가 감각적인 현상이 있어야만 성령을 체험한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령 체험의 가장 중요한, 가장 우선적인, 그리고 가장 필수적인 증거는 '믿어지는 마음'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 아직 그렇게 믿어지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까?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와 있듯, 성령은 바람처럼 당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통제할 아무런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 마음을 찾아가 만짐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불신에서 믿음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옮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꾸준히 예배에 참여하시고, 매일 영적 생활을 지속하시며, 속회를 통해 성도들과의 사귐에 힘쓰며, 할 수 있는대로 내 것을 내어 드려 형제 자매들을 섬기면서, 마음을 열고 성령을 기다릴 때, 성령께서 보실 때 가장 적당한 시간에 여러분의 마음을 만져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그 부름 하나에 여러분의 마음은 기쁨으로 떨릴 것입니다. 간절한 열망으로 성령의 만지심, 성령의 인치심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4.

믿음은 이렇듯 한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인 동시에, 일 평생 지속되어야 할 '과정'이기도 합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믿음'이라는 명사형보다 '믿다'라는 동사형이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무엇을 말합니까? 믿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지속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남녀간에 일어나는 사랑과 유사합니다. 남녀간의 사랑은 의지로,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 '좋아짐'으로 시작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그대로 지속되는 것도 아닙니다. 두 사람이 함께 그 사랑을 지속시키고 완성시켜 가야 합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과 지속적으로 교제하며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잠깐, 예수님이 여기에서 사용한 비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은 "너희가 목마를 때마다 내가 물을 떠 줄테니, 내게 와서 마셔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 다. 대신, "목마른 사람은 다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의 물을 지속적으로 마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 비유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실로암 연못을 비유한 것입니다. 실로암 연못은 예루살렘 성전 밖에 있던 기혼 샘으로부터 물길을 만들어 성전 안으로 물을 끌어 들여 만든 연못이었습니다. 그곳에는 언제나 신선한 물이 흘러넘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사람은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필경 이 실로암 연못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성전 밖에 있는 기혼샘과 성전 안에 있는 실로암 연못이 수로를 통해 연결되자, 성전 안에는 늘 물이 넘쳐 흘렀습니다. 물을 뜨러 성전 밖에 있는 기혼샘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내가 지속적인 사귐을 통해 연결되면, 그분에게 있는 성령의 물이 내게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 물이 언제나 내 안에 넘쳐 흐릅니다.
여러분은 성령의 만지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는' 경험을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에게서 솟아나오는 성령의 생수가 여러분에게 흘러 넘치게 하는 수로가 연결된 셈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그 수로를 잘 관리하여, 언제나 성령의 생수가 여러분의 삶에 흘러 들어오도록 하는 일입니다. 예배에 게을리 하고, 기도를 소홀히 하고, 속회를 통한 사귐을 등한히 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무시하고 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우리에게 통하는 수로를 막히게 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주일마다 기진맥진하여 "어디 가서 물 한 모금을 얻나?"하는 심정으로 전전하게 됩니다. 그것은 별로 희망이 없는 삶입니다.

우리 삶에 성령의 생수가 흘러 넘치는 일은 얼마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은 성령 충만하여 살아가는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 없고 괴상하고 비정상적인 삶처럼 인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믿고 싶지만 성령은 무섭다"는 말이 나옵니다. 성령 없는 예수 신앙은 위인을 존중하고 따르는 일에 그칩니다. 참된 신앙은 성령을 통해 지금도 역사하시는 살아있는 예수와 만나, 참된 생명으로 회복되는 일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가 사셨던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분처럼 진실해지고, 그분처럼 사랑하고, 그분처럼 겸손해지고, 그분처럼 자신을 드려 남을 살리고, 그분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령을 기피하려는 사람들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분들은 소위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서 "저건 아니다"라고 느끼는 겁니다. 실제로, 그건 아닙니다. 성령 충만해지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처럼 그렇게 부산하고, 수다스럽고, 비정상적이며, 반이성적이고, 충동적이며, 일방적이고, 독선적이고, 위압적인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생수가 흘러 넘치면, 전에 없던 생명력을 얻어 살아나지만, 부산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지지만, 결코 수다스러워지지는 않습니다. 정상을 초월하고 이성을 초월하지만, 이성을 짓밟지는 않습니다. 전에 없던 열정을 얻지만, 충동적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참된 비전을 보고 그 비전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가지만, 독선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전에 없던 영적 감화력을 가지게 되지만, 결코 위압적으로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고매한 모습으로 우리가 변해가는 일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닙니다.

5.

부루클린 타버내클(Brooklyn Tabernacle)의 짐 심발라(Jim Cymbala) 목사님은 오늘의 교회들을 보면, '무덤'이거나 '정신병동'이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도외시하고 전통만 붙들고 살아가는 교회는 무덤과 같고, 잘못된 성령 운동에 빠져 있는 교회는 정신병동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 비유를 기독교인들 각자에게 적용한다면, 그들은 시체이거나 정신병자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말이 됩니다. 성령이 없으면 참된 생명이 없으니, 살아있다고는 하나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시체라는 뜻입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성령 충만하여 살아간다고 주장하지만, 사는 모습은 정신병자나 다름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저는 우리 각자가 시체도 아니요 정신병자도 아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의 역사에 활짝 열려 있음으로 인해, 그분의 만져주심을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께 이르는 수로가 활짝 열려, 성령의 생수가 철철 흘러넘쳐, 성령의 매력적인 변화의 열매가 맺혀지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무덤도 아니요 정신병동도 아니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통해 모든 성도들이 강력한 생명력으로 무장되어 세상에 나가 제자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 모든 소원은 우리 각자가 성령에 대한 겸손하고도 간절한 열망을 마음에 품고 그렇게 살아감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성령에 이끌림을 받는 삶,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교회-주께서 이 소원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성령 하나님,
저희 마음을 엽니다.
당신을 열망하고 기다립니다.
오시어 저희 마음을 만져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나도록
저희 마음을 만져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속에 넘쳐 흐르도록
저희 마음을 다스려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교회를 이끌어가시도록
저희 교회를 다스려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