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규목사 (순복음인천교회)

오늘 이 시간에는 "위기가 기적으로", "위기가 기적으로." 이러한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위기가 기적으로." "위기가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나라 경제, 정치 현(現) 상황을 보면서 "위기다, 위기다, 위기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데 "기적이다, 기적이다, 기적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은 무엇을 믿는 겁니까?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또 무엇을 믿는 겁니까? 기적을 믿는 겁니다. 기적은 언제 옵니까? 위기 뒤에 옵니다. 그러므로 "위기가 왔다." 그 얘기는 곧 "기적이 가까이 왔다." 그런 말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여러 가지로 상황이 어렵습니다. 유가 급등, 대우사태, 의료계의 의약분업 거부, 그리고 국민을 외면하고 있는 정치 등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고, 절망적인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만 볼 수 없습니다. 분명히 기적이 오는 소리를 들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문명의 흥망성쇠는 위기에서 비롯되며, 위기를 잘 이겨낸 민족은 흥하지만, 도전에 굴복하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나라만이 아닙니다. 한 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개인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찌 위기가 없겠어요? 위기 때문에 포기하면, 망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힘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고 위기에 도전하면, 오히려 그 위기가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서 인생을 성공으로 살게 되고, 기적을 산출해 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지금의 위기를 두려워하거나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위기는 기적이 오는 서곡입니다. 위기를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시간, 베드로를 만난 예수님. 또 베드로의 삶을 통해서 위기를 기적으로 바꾸신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우리도 체험하므로 말미암아 위기의 상황을 바꾸어서 기적의 환경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생을 성공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위기가 기적으로 오려면 첫째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될까? 예수님을 각자 자기 인생에 영접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직 예수 믿지 아니한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계기가 되고,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예수님 중심으로 살지 않은 사람, 신앙생활을 악세사리로 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내 개인의 삶의 주인, 가정의 주인, 기업의 주인, 그 사회의 주인, 나라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을 살아간다면 어떠한 위기도 기적으로 바꾸는 기회가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위기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살아있는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 돈이 없는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위기가 한 번도 안 다가온 사람이 절대로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위기는 있다. 그러므로 위기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병원으로 실려갈 수도 있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에서 갑자기 쫓겨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문제아로 돌변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깜짝 놀랄 일입니다. 이런 위기가 다가올 수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므로 각종 위기와 위험이 끊이지 않고 찾아올 수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두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이 위기가 없었는가요? 위기가 있었죠, 위기가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땅으로 가던 아브라함.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가던 아브라함. 기근을 만났습니다. 얼마나 큰 기근의 위기가 왔던지 자기 마누라를 팔아먹었어요.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지금 아무리 위기를 만났다 하더라도, 자기 부인 팔아먹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자 그렇다면,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아브라함과 같은 위기는 아직 안 왔으니까. 다니엘은 기도하는 것 때문에 사자굴에 던져지는 죽음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지방에 가서 귀신들린 여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에 위기가 왔습니다. 매를 맞았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이 문제는 위기나 위험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순간에 어떻게 반응하느냐, 그것인 것입니다. 그 반응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위기 때문에 망하기도 하고, 위기 때문에 기적을 산출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적의 주인공도 될 수 있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의 위기는 예수님의 기회입니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나의 위기는 예수님의 기회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기회를 잘 안 주어요. 자기 자신의 삶이 윤택하거나 건강하거나 아름답거나, 명예가 있거나 권세가 있거나 물질이 있으면, 예수님이 간섭할 기회를 절대로 안 줍니다. 우리가 힘있고, 능력 있을 때는 예수님께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모시고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날씨가 참 좋았어요. 아주 순풍이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을 대화에 끼어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일하실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무너무 심심하셔서 배의 제일 밑창에 가셔서 팔 베게하고 주무셨어요. 예수님이 할 일이 없으셔서 주무셨어요. 그런데 갑자기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가 막 뒤집힐 위기가 왔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힘을 다하여서 배 안에 들어온 물을 퍼냅니다. 닻을 올렸다, 내렸다 합니다. 아무리 해도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들의 힘으로 위기를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자기들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배 밑창에 가서 예수님을 깨우는 겁니다. "예수님, 예수님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일 좀 해주세요." 순풍일 때는, 날씨가 좋을 때는, 배가 갈릴리 호수를 편안하게 갈 때는, 걱정이 없을 때는 예수님은 하실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위기가 와서 더 지탱할 힘이 없을 때, 그 때 예수님께 기회를 드린 겁니다. "예수님, 예수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우리가 죽겠습니다." 그랬어요. 예수님이 일어 나셨습니다. "바람과 파도야! 잠잠하라." 갑자기 바람과 파도가 잔잔해졌어요.
여러분, 베드로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가 고기를 많이 잡았다면 예수님이 하실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갈 일도 없습니다. 고기를 못 잡았습니다. 빈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빈배에 타셔서 복음을 증거 하셨고, 베드로에게 명령하셨고, 그래서 빈배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광야에서, 디베랴 광야에서 남자가 오천 명, 부녀자까지 수 만명이 있었어요. 예수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집에까지 가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덩어리를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셨더니 남자만 오 천명, 부녀자까지 수 만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기는, 광야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보통 위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 가서 무덤에 돌을 옮겨 놓게 하시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랬습니다.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 수의 입은 나사로, 수건을 동여맨 나사로가 기적으로 살아 나왔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니까,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 잔치가 막 무르익었습니다. 예수님이 초청 받았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똑" 떨어졌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을 때, 예수님이 일할 기회가 오신 겁니다.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런 은혜, 이런 기적이 지금도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은 위기를 실패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위기의 자리에 예수님이 영접되면, 인생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살면,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위기가 축복의 기적으로 바뀌어지는 것,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위기를 만난 성도들이여, 두려워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기근 때문에 애굽으로 피난 가지말고, 다니엘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셔드리므로 말미암아 형통의 복을 받고, 세상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과 존귀를 돌리는 주인공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힘을 얻어야 한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힘을 얻어야 됩니다. 한 번 따라하시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음으로 힘을 얻자. 힘을 얻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오늘 우리는 주일 성수하러 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해서, 감격해서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을 드립니다. 또 봉사를 합니다. 또 찬양을 합니다. 또 물질을 드립니다. 그것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됩니다. 일주일 동안, 엿새 동안 우리가 살아야 할 힘을 얻기 위해서 영혼의 양식을 먹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듣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모두에게 영적인 힘이 솟구쳐 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은 힘입니다. 말씀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믿음으로 들을 때, 영적인 힘이 생깁니다. 정신적인 힘이 생깁니다. 육체의 건강에 힘이 생깁니다. 생활에 힘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영과 혼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한다"(히 4:12).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은 위기로 인해 절망한 영혼에게 새 힘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무엇과 같으냐, 낮에 뙤약 빛에, 햇빛에 시들은 채소가 밤이슬 맞으면 아침에 생끗 일어나는 것처럼 이 세상 살면서 지치고, 고통 당하고, 절망하고, 낙심하는 성도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새 힘이 나서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하며, 기쁘고, 소망차게 감사하면서 생기 있게 신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은혜가 지금 이 시간에 임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위기를 만나면 사람들은 영적으로나, 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탈진하게 됩니다. 심지어 엘리야처럼 위기 앞에서 죽기를 구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왕상 19:4). 그러나 말씀을 들으면 상식과 경험을 초월하는 신앙의 힘이 솟아납니다. 능력의 주님을 믿는 신앙의 힘이 생깁니다.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신앙의 힘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밤이 맞도록 수고한 베드로지만, 예수님 말씀을 듣고 나니까 힘이 생겼어요. 용기가 생겼어요. 자신이 생겼어요. 다시 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의지하여" 그가 고기를 잡으려고 했을 때, 잡지 못했던 실패의 자리에, 절망의 자리에, 수치의 자리로 나아가서 다시 그물을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누가복음 5장 5절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또 말씀을 들으면 위기를 기적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영적인 눈이 뜨여진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가 무장하면 영의 눈이 떠진다, 그 말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세상은 위기입니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분명히 기적이 오는 소리인 것입니다. 기적이 오는 서곡인 것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 하면서 우리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영의 귀가 열리고 영의 눈이 뜨여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이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야 믿음의 눈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길이 보입니다. 믿음 없는 사울에게 골리앗은 넘어뜨리기에는 너무 컸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다윗에게 작은 물맷돌 다섯은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 장군을 무너뜨리기에, 죽이기에 충분했습니다. 어린 소년 다윗은 물맷돌 다섯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의 믿음이 들어오니까,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 장군을 물맷돌 가지고 죽일 수 있다고 나갔습니다. 믿음 없는 사울은 모든 무기를 다 가지고도 블레셋 거장 골리앗이 무서워서 달달달달 떨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소년, 목동 다윗은 믿음이 들어오자마자, "물맷돌 다섯만 가지고도 내가 저 골리앗 장군을 죽일 수 있다"하고 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환경이 좋은 사울, 믿음 없는 사울 되지 마시고, 환경이 나쁘더라도 믿음 있는 다윗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의 위인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셋째, 새로운 도전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새로운 도전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새롭게 도전하자." "아멘"
그렇습니다. 위기를 만난 사람일지라도 그것을 기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도전, 새로운 도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위기를 허락하신 것은 더 크게 쓰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베드로에게 어부의 상식을 뛰어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 잡았잖아요. 저녁도 못 먹었어요. 아침도 못 먹었어요. 지쳤어요. 배고파요. 지금 허기져요. 힘이 없어요. 그런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그랬습니다. 예수님께 배를 빌려준 베드로, 인간의 생각으로 보면, "베드로야 고맙다. 네가 배를 빌려주어서 내가 천국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내가 빌린 배 빌린 값을 주마. 그런데 내가 돈이 없다. 너는 가만히 있어라. 내가 가서 고기 좀 잡아다가 빈 배 빌린 값으로 내가 고기 잡아 줄게." 그랬습니까? 그러지 않았어요. 베드로에게 말을 합니다. 지친 베드로에게, 힘없는 베드로에게, 그러나 예수님 만난 베드로에게 도전하게 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고기 잡아 줄게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그랬습니다.
유대인이 많이 읽고 있는 탈무드에도 그런 것을 가르칩니다. "고기 잡아 주지 아니하고, 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부모의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여러분들은 지금 자녀에게 어떻게 교육합니까? 밥을 만들어서, 상을 차려주고, 먹어, 안 먹으면 먹어, 안 먹으면 밥 떠서 맛있는 반찬을 올려놓아서 "아 해봐, 아 먹어, 먹어" 그런 엄마들이 잘하는 엄마일까? 물론 아기일 때는 당연합니다. 그러나 아기일 때도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초등학교 다닐 때, 그 추운데도 내복 없습니다. 긴 바지가 없습니다. 모두가 무릎이 나오는 반바지. 팔 뚝 나오는 반 팔. 겨울에 그렇게 입힙니다. 누가 더 강합니까? 누가 더 자식을 사랑하는 겁니까? 사랑하는 부모님들이여,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예수님 보다 더 인심쓰지 마세요. 예수님은 그런 인심 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도전을 주었습니다. 도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너는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그랬습니다.
믿음 없는 자에게 주의 말씀은 불가능하고, 부정적이며, 비논리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인생의 배에 주인으로 모신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이해와 상식을 뛰어넘어 기적을 이루는 능력이었습니다. 이게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3장 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이랬습니다.
빈 배의 위기에서 두 배에 고기를 가득 채우는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는 이제 "고기 낚는 어부"가 아닙니다. "사람 낚는 어부"인 것입니다(눅 5:10). 자기 먹기 살기 위해서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자기 가족을 먹이기 위해서, 살기 위해서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자기 그저 돈 쓰고 출세하기 위해서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어부. 한 영혼을 전도해서 하나님 아들되게 하는 어부. 실패의 일을 성공시켜 주는, 사람 낚는 어부로 주님이 바꾸셨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달라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성공시키기 위해서, 주님의 그 나라 그 의를 먼저 구하면서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도 삶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에 도전해야 됩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시 81:10) 주님 말씀하십니다.
누구나 주전자의 물이 끓는 것을 보지만, 제임스 와트는 주전자의 물이 끓어서 뚜껑이 덜썩 덜썩, 김이 빠져나와서 삐익 소리가 나는 것을 보면서 제임스 와트는 증기기관차를 만들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사과나무의 사과가 떨어집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 누구나 다 보았습니다. 그러나 도전의식이 있는 뉴턴은 거기서 만유인력을 보았습니다.
위기를 만나서 실패하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그 곳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업하다 넘어질 수 있습니다. 쓰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실패의 자리로 만들지 말아라. 그 자리를 무덤의 자리로 만들지 말아라. 그 자리를 부활의 자리로, 다시 도전의 자리로, 승리의 자리로, 기적을 산출하는 출발점으로 만드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 힘을 합쳐야 한다.

네 번째입니다. 힘을 합쳐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힘을 합쳐야 한다. 힘을 합쳐야 한다. 힘을 합쳐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만난 이 위기를 이기는 그 비결이 뭘까? 앞에 세 가지 다 했다 하더라도 힘을 합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힘을 합쳐야 돼요. 여러분, 햇빛을 그냥 보면 그냥 빛이에요. 그러나 오목렌즈로 받아서 힘을 합치면, 불과 몇 분 안되어서 이 종이가 불이 붙습니다. 어떻게 하면? 햇빛을, 힘을 하나로 모으면. 오목렌즈로 빛을 모으면 여기에 구멍이 뽕 뚫리고 불이 붙습니다. 불이 붙어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구요. 힘을 합치는 거예요. 마음을 하나로 합쳐야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나라도 힘이 납니다. 힘이 생깁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베드로가 만약 혼자서 모든 고기를 가지겠다고 생각했다면, 욕심을 부렸다면 베드로는 고기 잡지도 못했고, 고기 잡으려다가 오히려 저 혼자 고기 잡을 때는 고기만 못 잡았는데, 그 다음에는 욕심을 부렸다면 물에 빠져 죽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힘을 합칠 때예요. 이게 지금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너와 나, 정치하는 사람들은 여와 야, 정부와 의료계, 의사와 약사, 노동자와 사주, 그리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 인간이 성령을 통하여, 예수 십자가를 통하여 마음을 합쳐야, 하나되어야 살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조차도 당신의 일꾼을 뽑으실 때, 첫째 조건이 뭡니까? "마음에 맞는 자",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과 합했다"(삼상 13:14) 그랬습니다. 솔로몬의 그 고백을 듣고 나서 내 마음에 맞은 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면, 요나단과 같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삼상 18:1). 초대교회처럼 내 것을 먼저 챙기는 것이 아니라, 한 몸으로서 서로를 돕게 되고, 서로서로 사랑하면서 나누어주면서 서로서로 복되게, 행복하게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행 4:32). 사도 바울은 말을 합니다. 빌립보서 4장 2절입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우리는 기도의 힘을 합쳐야 됩니다. 우리는 합심기도가 필요합니다. 중보기도가 필요합니다. 온 교회와 교회가, 교단과 교단이, 교파와 교파가 합쳐서, 구역과 구역이 합쳐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 필요한 때인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이, 나라와 교회가, 나라와 국민이 함께 모여서 기도할 이 때인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모으는 힘인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능력인 것입니다. 마가다락방 120문도가 마음을 같이 하여 열흘 동안 전혀 기도에 힘쓸 때, 성령 강림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모두가 성령세례 받았습니다. 모두가 방언을 했습니다. 능력 받고 권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때, 굳게 닫힌 옥문이 열리고 베드로가 자유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함께 기도하고 찬송했더니 빌립보 지방에 지진이 나서 옥문이 무너지고, 착고가 풀어져서 자유함을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모세가 기도하면 여호수아가 승리했습니다. 손이 내려가면 패배한 것처럼(출 17:9-16), 지금 이 민족과 개인의 위기 극복이 뭡니까? 우리의 기도에 달려있습니다. 대통령도 기도하고, 장관도 기도하고, 국회의원도 기도하고, 모든 국민이 다 주의 종과 성도가 함께 손에 손을 맞잡고 우리가 기도할 때 위기는 극복되고, 기적이 일어나는 이 나라 이 민족이 분명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세가 되고, 아론과 훌이 되어서 손을 맞잡고 기도할 때, 위기는 기적으로 변화됩니다. 우리 주님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19절입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말씀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