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순목사 (그리스도사랑의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읽을 때에 이해가 가지 않고 납득가지 않는 것을 우리는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이해하고 있고 내가 경험한 것은 전부다 물질의 세계에 대한 경험과 물질의 세계에 대한 이해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물질에 대한 것도 아니고 물질에 대한 어떠한 경험을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영원한 생명이 무엇일까? 라고 생각하고 또한 영원한 생명의 가치성에 대해서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는 말씀의 소중한 것을 알지도 못하고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는 사물 세계의 삶으로서 모든 것이 얻어진다고 이렇게 생각하며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러한 모습으로 창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할 때에 죽을 수밖에 없게 창조한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어떠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겠습니까? 영원히 살 수 있는 우리가 이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바꾸어져 버렸습니다. 바꾸어져서 하나님을 불러도 하나님이 대답할 때에 우리는 들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라고 하는 그릇에 온전히 갇혀 버렸으므로 육체의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육체의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만 우리들을 영원한 생명이요, 영적인 사람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을 입고 이 땅위에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 오늘 말씀의 핵심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언젠가는 육체를 벗어야 됩니다. 육체를 벗은 다음에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들은 육체를 벗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사물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를 벗으므로 모든 것이 그 사람에게는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삶이 인생이라면 참으로 인생은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질병과 또한 여러 가지 고통을 당해야 됩니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어려움도 당해야 됩니다. 인간관계 속에서도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다가 생이 마지막을 마친다면 사람이 어쩌면 동물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동물들은 아마 고민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신적인 고통은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정신적인 고통까지 받아가면서 삶이 육신으로 사는 것으로 끝나는 삶이라고 하면 참으로 이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소망은 어떠한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느냐? 우리에게 영생하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땅위에 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의 삶이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으로 주셨고 또한 직접 몸소 그 삶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 제시한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온갖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고난 받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사 지낸 지 삼일만에 부활하시어서 우리 전 인류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말씀한 말씀을 깊이 다시 한번 보십시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행한 것도 할 것이요, 나보다 더 큰 일도 행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영혼 구원자임을 믿는 사람은 예수께서 증거 하고자하는 영생에 대한 도리를 타인에게 증거 하는 그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보다도 더 큰 일을 행하리라는 큰일이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당연한 부활인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고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보다 더 크고 위대한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부활해야 할 당연한 자가 부활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부활 할 수 없는 존재가 생명을 얻어 부활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부활할 수 있는 것은 나의 노력이나 나의 수고로 인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부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것을 가르치고 알게 하기 위해서 능력을 행해 보이십니다. 나사로도 살려내고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여러 가지 능력과 권능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제시는 곧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주님의 말씀이요 역사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이해할 때에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말씀한 말씀은 영이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주님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부활을 이해하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시대 당시에 바리새인들의 신앙이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때에 사두개파 신학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을 말씀한 말씀을 사람의 생각으로 부활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글에 의하면 장자하고 결혼한 여인이 있었는데 이 여인이 후사를 얻지 못하고 그 남편도 죽었습니다. 그와 같이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일곱 형제가 다 그 여인과 부부가 되어서 살다가 후사 없이 똑 같이 죽었습니다. 부활 시에는 그 여인은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하는 물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물음이 사람의 생각으로 주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한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너희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오해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부활 시에는 시집도 가지 아니하고 장가도 가지 아니하는 천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천사는 하나님이 부리는 영인 것입니다. 육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것을 아주 깊이 본질적 설명을 해 주었지만 그들은 깨달음이 없었던 것을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이 영이요 생명의 말씀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니라." 라고 하는 말씀을 토대로 우리는 부활에 대한 이해를 올바로 할 때에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 시에는 시집도 가지 아니하고 장가도 가지 아니하는 천사와 같다" 는 말씀의 의미를 볼 때에 우리는 부활 시에는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닌 다시 말해 성정이 없는 천사와 같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천사는 육체가 아닌 것입니다. 천사는 존재하지만 우리가 만질 수 없고 천사는 존재하지만 우리가 직접적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역사와 계시가 있을 때에는 천사라 할지라도 사람에게 나타나 보이면서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를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누구하고 대화했습니까? 천사하고 대화했던 것을 봅니다. 이때에 대화 할 때에는 천사는 천사의 본래의 모습으로는 인간과 대화 할 수 없습니다. 천사라 할지라도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옷도 입은 것을 보여 주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천사를 표현할 때에는 옷으로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 옷의 희기가 사람이 빨래한 그 옷보다 더 희고 광채가 나는 옷을 입었다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상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설명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사람이 아닌 천사라고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활 한 다음에 우리가 어떤 모습이 될까요? 라고 하는 것을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바로 이해해야 됩니다. 우리는 육체를 입었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벗음으로 인해서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주님의 능력과 주님의 권능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부활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부활체에 대한 설명을 신령한 몸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활적 존재를 몸이라고 하는 언어를 들지 않고는 부활의 실존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몸이 있어서 신령한 몸이라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을 구체적이요 실존적 설명을 하기 위해 몸이라고 하는 것으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에 이르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입니다. 부활에 이를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오셔서 역사하시고 말씀하시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교육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러한 깊은 것을 올바로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어떻게 이끌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이끄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이끄시고 역사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향한 예수님의 역사인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 때에 우리에게 축복하시고 우리에게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이끄시는 것이 우리의 육체를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 영혼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이 시간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역사하시고 우리를 이끄시고 인도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과의 만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과의 만남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어떻게 만나야 될까요? 성령과의 만남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영혼의 구원자임을 믿을 때에 주께서 역사 하셔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역사인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능력을 통해서 권능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역사하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혼 구원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무엇으로 표현한 줄 아십니까? 그 미련은 절구통에 넣어서 찐다 할지라도 미련이 벗겨지지 아니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또한 잘못된 사고와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구부러진 것을 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들을 가리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자리에 왜 앉아 있습니까? 여기에 앉아 있는 목적이 분명해야 됩니다. 앉아 있는 목적은 오직 그가 나의 영혼 구원자이기 때문에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 분 때문에 나는 그 분과의 만남과 그 분과의 교류와 그 분을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 나와 앉아 있다고 하는 자체가 분명하게 우리 마음속에 새겨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 마음에는 주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되면 그 모든 보는 것이 주님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고 용서하게 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것으로 우리 심령이 바꾸어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한 우리 영적인 우리 심령의 변화와 모든 것이 되어질 때에 우리는 가치관이 변화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던 삶의 모든 것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향한 삶으로 바꾸어지고 세상을 향하던 모든 마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마음으로 바꾸어지는 것으로 우리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면 우리의 입술이 틀려집니다. 과거에는 내가 세상을 향하여 세상 말을 하던 모든 것이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요즘 참 행복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행복합니까? 사업이 잘 되십니까? 아닙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행복이 내 마음에 가득합니다. 그것이 무엇인데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오셔서 역사하시고 내게 은혜 주시고 내게 역사하여 나를 인도하므로 내게 어떠한 일이 아니 된다 할지라도 내게 감사가 있고 내게 기쁨이 넘칩니다.'' 라고 하는 것을 간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간증할 수 있는 자체가 여러분이 하는 것 아닙니다. 주께서 여러분의 심령에 역사해 주셔서 성령이 함께 하기 때문에 간단한 말을 하는데도 상대방이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했는데도 장황한 이론이나 체계적인 설명보다도 거기에는 전도하는 능력의 역사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게 함께 해 주셔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전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의 계획을 세웁니다. 전도하는 것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처음부터 기쁜 마음을 가지면 끝까지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고 기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각이기 때문에 그 방법상에도 서로가 다른 것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까?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진 그 십자가가 내게 무겁다고 내려놓아야 됩니까? 아닙니다. 끝까지 지고 가야 됩니다. 어디까지 지고 가야 되겠습니까? 골고다까지 지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서 내가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지고 가는데 나는 죽지 않고 뻣뻣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불평할 수 있고 불만을 가질 수 있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내가 감당하고 걸머지고 말없이 참고 묵묵하므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진정한 전도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한 말씀이 우리에게 영적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말씀한 것을 분명하게 알고 여러분! 여러분의 영혼에 대해서 고민할 줄 알아야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 무엇일까? 주여! 나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바로 알게 하시고 경험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의 가치와 소중함을 알게 하시고 그 생명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고 나를 그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옵소서! 라고 하는 신앙의 자세로 바꾸어지는 역사가 우리 심령 속에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질 때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여러분! 기독교인이 첫째 신앙이 세워져야 될 것이 육은 무익하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이러한 육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도들은 복음을 위해서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오늘 주어진 현세를 바라보지 않고 저 내세의 소망을 바라보고 그들은 끝까지 복음을 증거 하다가 종래에 죽임을 당해도 감사하므로 기뻐하므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오늘 예수님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라는 말씀이 그들의 마음속에 신앙이 되었고 그들 마음속에 체험이 되었고 그들은 확실히 믿기 때문에 순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제 우리도 무익한 것을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영혼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될 때에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믿음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합시다. "내 말을 듣고 지키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다" 고 했습니다. 반석 위에 주초를 놓았지요? 그 반석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의 기초를 그리스도에게 둡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서 내 육신의 유익을 얻으려고 간구하는 것보다 주여!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나로 하여금 주의 뜻을 바로 알게 해 주옵소서! 그 뜻에 순종하는 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내게 그리 아니한다 할지라도 오직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이 있게 해 주옵소서! 라고 하는 그러한 기도하는 심령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