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목사 (와싱톤한인교회)

오늘부터 조영진 목사님께서 마치지 못하고 끝을 내신 요한복음 연속 설교 ‘생명의 복음’을 이어 나갑니다. 제가 조 목사님의 연속 설교를 이어 나가는 이유는, 지난주의 부임 설교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와싱톤한인교회의 사역은 중단 없이 계속된다는 사실을 상징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담임목사가 새로 왔으니 뭔가 신선한 바람이 불었으면 하는 기대감을 가진 분들도 계실 것이고, 그러한 변화에 대해 두려워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사람이 달라졌으니 불가피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도 있겠으나, 전체적인 방향에서는 당분간 큰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1.

오늘 읽은 이야기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갈릴리에서 여러 가지의 이적을 행하신 후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갈릴리 사람들은 이 호수를 ‘바다’라고 불렀는데, 그들의 눈에 그 호수가 바다처럼 커 보였기 때문입니다--반대편으로 가십니다. 그러자 그분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 호수 반대편까지 따라 옵니다. 반대편에 도착하자 예수님은 산으로 올라가 제자들과 함께 중턱쯤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아 내려다보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더 많은, 더 신기한 이적을 보기 위해!

그 사람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은 옆에 있던 빌립에게 물으십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6절에 보니, 이렇게 물으신 이유는 빌립을 시험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시험하셨다’고 말할 때는 그 의미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험’이라는 말은 영어로 test라는 의미로 쓰일 경우도 있고, ‘유혹’ 즉 temptation이라는 뜻으로 쓰일 수도 있고, train 즉 ‘훈련시키다’라는 뜻으로 쓰일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빌립의 마음을 몰라서 떠보려고 그렇게 물으셨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그렇다면 빌립을 유혹해서 넘어뜨리려고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그것도 아님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그리고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에게 뭔가 매우 중요한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해 이 질문을 하셨다는 뜻으로 풀어야 합니다. 제자들 뿐만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읽는 우리 모두에게 그 진리를 전하기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무리들을 배불리 먹일 구체적인 계획을 마음에 품고 계셨던 예수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을 리 만무합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무슨 진리를 전해 주시려 하셨는가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계속 살펴보십시다. 7절에 보니, 빌립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모두 조금씩이라도 먹게 하려면, 빵 이 백 데나리온 어치를 가지고서도 충분하지 못합니다.” 당시 화폐 단위로 한 데나리온은 남자 성인 노동자가 하루 일해 정당하게 벌 수 있는 일당에 해당합니다. 지금 워싱톤 기준으로 하루 일당을 평균 잡아 80달러로 계산한다 해도, 1만 6천 달러가 됩니다. 적지 않은 돈입니다. 그 많은 돈을 써도 충분히 먹이지 못할 정도로 많은 무리들이 모였습니다.

그 때, 제자 중 하나인 안드레가 나섭니다. 9절에 보니,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만 6천 달러 어치 음식으로 먹여도 부족한 거대한 군중 앞에서 보리 빵 다섯 개와 생선 조림 두 마리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먹여야 할 사람들은 너무나 많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적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예수님은 담담히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사람들을 앉게 하여라.” 여기 사용된 ‘앉다’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식사 자세를 말합니다. 풀어 말하자면,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밥 먹을 채비를 하라고 하여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명령입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한 사람의 한 끼 식사거리도 안 되는데, 그 엄청난 사람들에게 밥 먹을 준비를 시키라는 겁니다. 10절 말미에 보니,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따져서 만도 오 천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 합치면 만 명도 더 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빌립은 한 사람 당 약 1 달러 정도의 음식을 마련해 줄 생각으로 계산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런 명령을 하시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사람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밥 먹을 준비를 하라고.

서성거리고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풀밭에 비스듬히 기대어 식사 자세를 취하자, 예수님은 다섯 개의 빵과 생선 조림 두 마리를 손에 드십니다. 그리고는 감사 기도를 드리십니다. 성찬식에서 하듯, 그 음식에 복을 비는 기도를 올리신 것입니다. 기도가 끝난 후, 예수님은 그 음식을 무리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하십니다.

이 지점부터는 제 상상력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할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지 추정 불가능합니다. 다만,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아서, 부스러기를 모아 보았더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차고 넘쳤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혹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과학적으로 납득시키지 않는 한, 나는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생에 납득하거나 설명할 수 없지만 그 신비를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들이 많지 않습니까? 납득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고 인정하려 한다면,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무미건조해지겠습니까? 물론, 이 말씀은 무턱대고 아무 거나 받아들이고 믿자는 말은 아닙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누구보다도 집요하게 질문에 질문을 해 가며 따지는 사람입니다만, 아무리 질문하고 따져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냥 받아들이고 지내다 보면 어느 땐가 “아, 그랬구나!” 할 때가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적을 통해 저희에게 과학적 질문을 제기하려 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 진리를 전하기 위하셨음을 기억하고, 그 질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습니다.

2.

그렇다면 예수님은 빌립과 안드레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 어떤 진리를 가르치려 하셨을까요? 아니, 이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셨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빌립과 안드레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빌립과 안드레의 말을 통해, 먹여야 할 사람의 수는 너무나 많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도 작다는, 절망적인 현실인식을 봅니다. 1만 6천 달러라는 거액을 가져도 해결하기 힘든 과제 앞에 서 있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빵 다섯 덩이와 생선 조림 두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사람들을 해산시켜 각자 끼니를 해결하고 다시 모이게 하는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 잘 것 없던 빵과 생선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 축사된 후 떼어 나누어질 때 그 많은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고도 남았습니다. 문제의 해결의 열쇠는 1만 6천 달러의 돈을 구하는 데 있지 않고,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예수님의 손에 들려 드리는 데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놀랍고 신비로운 능력을 보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쯤에 이르러서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의 많고 적음을 보기보다는 예수님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초라한 것이라도 예수님의 손에 들리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으며, 아무리 많은 돈이라도 예수님의 손에 들리지 않으면 그냥 허비될 뿐임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 작은 음식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 나누어지자, 그것은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도 남았을 뿐 아니라, 이제 앞으로 보겠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의 영적 눈까지 뜨게 해 주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1만 6천 달러의 돈이 있어 예수님에게 묻지도 않고 달려가 음식을 사다가 그들을 먹였다면, 그것은 한 끼의 거나한 식사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리는 것, 성패는 여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 이것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 빌립에게 말을 거셨습니다. 6절의 말씀대로,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실 일을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그분이 하실 일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절망감의 원인이었습니다.

3.

자, 이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보십시다.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실 일을 알고 있습니까? 그것을 진실로 알고 있으며, 아는 바대로 그분이 우리를 통해 혹은 우리를 사용해 일하실 수 있도록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일을 앞에 두고 혹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때문에 “이만하면 충분해!”라고 말하며 자만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은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나!”라고 말하며 실망하고 낙담하지 않습니까? 교회적으로 말해 보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혹시 어떤 일을 앞에 두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력과 인력 때문에 “이거면 할 수 있어!”라고 안심하는 것 아닙니까? 혹은 해야 할 일의 위세에 짓눌려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어림도 없어!”하고 실망하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우리는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나 교회적인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실 일을 보지 않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의 양을 따지고만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병폐로 지적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교회가 자본주의적인 사고에 지나치게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본주의가 모두 잘못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혜택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현대 역사를 통해 자본주의 체제는 꽤 많은 미덕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 왔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인 사고 방식 중에는 위험한 것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경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자본주의적 사고에 빠져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는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자주 “주의 일도 돈이 있어야 하지!”라는 말을 교회에서 듣습니다. 저는 한국 교회 안에서 이 말이 거의 진리처럼 통하는 것을 보고는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돈이 없으면 주의 일도 할 수 없다”가 됩니다. 이 말을 곰곰이 따져 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 돈의 힘이 절대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하는 것이 아니라 돈이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돈이 많은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돈의 힘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합니다. 어느 경우에는 선교의 이름으로 혹은 봉사의 이름으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에게 찾아가 돈의 힘을 휘두릅니다. 돈의 힘 앞에 사람들을 무릎꿇게 하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과거에 가난한 나라에 대한 선교 활동에 참여하면서 돈의 힘을 휘두르지 않고 무력하고 겸손하게 그분들을 섬기기 위해 애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그 태도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절감했었습니다. 많은 물질을 가지고 가서 도움을 주지만, 실은 우리가 진정으로 도울 일은 다른 데 있음을 알고 겸손해지는 것,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멕시코, 중국, 방글라데시, 탄자니아 등에 지속적인 선교 지원을 하고 있는 저희 교회로서는 매우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교회 내부적인 사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면 저도 직접 선교팀과 함께 다니며 이 일을 도우려 합니다만, 이미 현장에 나가있는 멕시코 선교팀과 다음 화요일에 떠나게 되는 중국 선교팀을 위해 올리는 저의 기도 제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이 만나게 되는 영혼들이 돈의 힘에 압도되어 잠시 몸을 숙이는 것이 아니라, 선교팀원들의 진실하고 겸손한 사랑으로 감동 받게 되기를 매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교회는 안전합니까? 불행하게도, 가난한 교회도 자본주의의 위험에 똑 같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돈이 없으니 하나님의 일도 할 수 없다고 포기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이야기에 나오는 제자들의 태도와 같은 비신앙적 태도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 교회는 돈의 힘을 의지하느라 하나님을 잊기 쉽고, 가난한 교회는 돈이 없다는 사실 때문에 언제든지 끌어다 쓸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사랑을 전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돈이 없어도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방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는 지난 2년 동안 작고 가난한 백인 교회에서 목회 하면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작아도, 가진 것이 아무리 적어도,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의미 있는 봉사의 길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게 물질이 얼마나 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내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려는 마음이 있느냐에 있고, 그 일을 행하는 과정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방법을 찾느냐에 걸려 있습니다.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고 도우시려는 예수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의지하면,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큰 일’은 할 수 없을지라도, 얼마든지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큰 일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것에 있는 것 아닙니까?

4.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있습니까? “이만 하면 내가 가진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실력과 재력과 권력이면 웬만한 일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오. 그러나 그 모든 능력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지 않으면 결국 아무 쓸모 없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지식이 있습니까?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이 지식은 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손에 드립니다. 주님이 사용하소서.”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통해 주님께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데 사용하시도록 매일, 매 순간 여러분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에게 물질이 있습니까? 시간이 있습니까? 건강이 있습니까?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까? 주님의 손에 들려 드리십시오. 그분이 손에 들고 사용하실 때, 그 때에만 그것이 진정한 가치를 가집니다.

이렇게 말하면, “모두 다 버리고 목사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라는 뜻인가?”라고 질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한국 교회 안에는 ‘헌신’이라는 말과 ‘목회’ 혹은 ‘선교’라는 말을 동의어처럼 오해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목사로 혹은 선교사로 부르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도 경영학을 공부한 후, 아무리 피하려 해도 하나님의 부름을 피할 수 없어 신학교에 갔습니다. 저희 와싱톤한인교회에는 매년 늦게서 받은 소명을 이루기 위해 하던 일을 정리하고 신학교로 혹은 선교지로 나가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저는 이렇게 늦었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발견하고 그 부름을 따라 나서는 분들이 저희 교회에서 꾸준히 나오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무리 부정하고 외면하고 거부해도 결국 순종해야 할 구체적인 부름이 있습니다. 하지만 목회나 선교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더 많은 경우에, 주님은 여러분이 지금 일하고 있는 현장에서,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여러분이 가진 것을 사용하여 선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직업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고 이웃을 돕기 원하십니다. 그것을 주님께 드리지 않고 사용하면 몇 십 년 즐기다 마는 것이고, 주님께 드리면 영원한 의미를 가지는 일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할 일은 엄청난데 내게 있는 것은 보 잘 것 없어 낙심하고 좌절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나 같은 사람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 혹은 “내 가진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고 좌절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오늘의 이야기를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손에 들리면 아무리 보 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귀한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으며, 아무리 보 잘 것 없는 것이라도 그분의 손에 들리면 귀한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본주의적인 척도로는 여러분이 혹시 하찮게 평가될지 몰라도, 예수님의 눈에는 여러분은 누구보다 귀한 분들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신비로운 이적을 행하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을 그분에 손에 들려드릴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목회 하던 교회에 퀘이커 교도의 가정에서 자라나 감리교인과 결혼하여 저희 교회에 나오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Ina Moore라는 분인데, 제가 영적으로 깊은 교제를 나누며 많은 도움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분은 깊은 눈동자와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는 매력적인 미소를 가지고 계십니다. 눈을 마주 보고 있으면 그 안으로 흡수될 것 같은 깊은 눈동자를 가지고 계십니다.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듯한 평안을 느끼게 해 주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몇 년 전 두 아들을 비극적인 사고를 통해 잃는 아픔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당뇨와 간암으로 투병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했습니다. 그 사랑하는 남편을 작년에 눈물로 떠나 보냈습니다. 몇 년 동안 꼬리에 꼬리를 잇는 비극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무너지면 모두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여 든든히 버티고 섰습니다. 하지만 이제 남편이 떠나고 더 이상 버텨주어야 할 대상이 없어지자, 갑자기 심한 심리적 문제를 겪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분은 저를 포함한 가까운 몇 분과의 영적 교제를 통해 그 위기를 잘 딛고 일어섰습니다. 지금 그분이 가지고 계신 것은 상처와 아픔과 눈물입니다. 노인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가는 그분은 정말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매일 기도와 침묵과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분입니다. 그분은 자신의 상처와 아픔과 눈물을 예수님의 손에 들려 드렸고, 예수님은 그분의 상처와 아픔과 눈물을 사용해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잠시 동안 눈동자를 응시하고 미소 띤 얼굴로 던지는 한 마디 “Don't worry. You will be alright!"이라는 말은 백 만 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강력한 위로와 평강을 전해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문제는 내가 누구이며 내게 무엇이 얼마나 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고 내 가진 것을 예수님의 손에 들리게 하느냐에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그리고 내 가진 것을 사용하시도록 내어 드리느냐에 있습니다.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나의 존재와 나의 소유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발견하고 그 일에 나의 인생과 나의 소유를 맡길 때,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을 배불리 먹이실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을 영생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려져 축사를 받고 떼어져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데 쓰이는 인생--여러분, 이 이상 더 무엇을 원하십니까?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 존재와 제 소유 모두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손에 드립니다.
잡아 주시고, 축사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소서.
다른 사람들을 배불리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일에
저를 주님 마음대로 찢어 나누어주소서.

주님,
저희 와싱톤 한인교회를 주님 손에 잡으소서.
축사하소서.
주님 뜻대로 떼어
많은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여
거룩함을 향해 자라가도록 돕는 데 사용하소서.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지만
저희의 주의는 오직 주님이게 하소서.
물질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