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목사 (와싱톤한인교회)

오늘 저는 지난주에 읽었던 오병이어 이야기의 말미에 나오는 한 절에 집중하여 말씀을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혹시 지난 주일 설교를 듣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여러분이 많이 들었을 그 이야기, 보리떡 다섯 덩이와 생선 조림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이 먹고도 남았다는 기이한 이야기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이 아니시라면, 아마 한 번쯤은 들으셨을 것이고 또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난 후, 과연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야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겠지만,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얼마나 신기했을까요? 아마도 그 사람들은 포만감을 즐길 겨를도 없이 경이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저 분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1.

4절에 보니, 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였습니다. 유월절은 모세 시대에 일어났던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해방절 축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하기까지 40년이 걸렸는데, 그 기간 동안에 그들은 많은 이적을 경험했습니다. 그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이적이 만나의 이적이었습니다. 거친 불모지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매일 아침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아직도 '만나'가 뭔지, 확인된 바가 별로 없습니다. '만나'라는 이름은 "이게 뭐야?"라는 뜻의 히브리말에서 왔습니다. 그것을 몇 십년간 먹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게 무엇인지 몰랐으니,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만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을 광야에서 만나로 먹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 드렸습니다.

그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월절 축제를 기념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 번 손을 펼치시어 모세 시대에 행하셨던 구원 역사를 재현해 주시기를 기대하곤 했습니다. 모세 자신이 신명기 18장 15절에서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의 동족 가운데서
나와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이니
당신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 때문에 그들은 유월절을 기념할 때마다 제 2의 모세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들뜨곤 했습니다. 비범한 어떤 일이 일어나면 "혹시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행동을 시작하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긴장하곤 했습니다. 특별한 인물이 출현하면 "혹시 저 사람이 제 2의 모세, 메시야가 아닐까?" 생각하며 촉각을 곤두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조림 생선 두 마리로 그 많은 무리를 배불리 먹이시자, 그들은 모세를 통해 일어났던 만나의 기적을 생각하고, 예수님을 향해 "혹시 저분이 제 2의 모세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14절에 나와 있듯이, 그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다." 신명기 18장 15절에서 예언된 그 예언자가 드디어 왔다는 뜻입니다. 이 말에, 무리들은 순식간에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도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꿈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열광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제가 대변해 본다면, 아마 이랬을 것입니다.

일어나십시오. 우리를 인도하십시오.
무슨 일이든 저희가 돕겠습니다.
일어나 우리를 해방시켜 주십시오.
위대한 이스라엘을 만들어 주십시오.
당신은 그 나라의 왕이 되고
우리는 당신의 백성이 되리이다.
일어나십시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인정하십시오. 외면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왕이 되십시오.
우리의 희망은 당신뿐입니다.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예수여, 예수여!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무리들이 알아서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었고, 생명이라도 바칠 듯 한 열심을 보였습니다. 그들을 몰고 갈릴리로부터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진군해 들어가면 1만 명의 무리가 10만으로 혹은 100만으로 불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막강의 로마 군대도 두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를 뒤엎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한 번 멋지게 살아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아, 예수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 줄곧, 이런 야망을 품고 메시야로 자처했던 인물들이 얼마나 많았던지요! 그들은 모두 스스로 메시야라고 나섰다가 실패했지만, 예수님의 경우는 전혀 달랐습니다. 사람들이 먼저 그분을 메시야로 알아보고 왕으로 옹립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인 15절을 다시 읽습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오병이어로 1만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이셨다는 사실도 충격이지만, 군중들이 왕으로 옹립하려는 것을 보고서도 미련 없이 돌아서 사라지신 예수님의 행보는 더욱 더 충격적입니다.

2.

예수님은 왜 피하셨을까? 이 절호의 기회를 왜 외면하셨을까?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묵상해 보면, 무리들의 열광을 뒤로하고 유유히 사라져 간 예수님의 심정을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세 가지 점에서 예수님이 산으로 피하신 이유를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지상 왕국을 건설하고 그 나라의 왕으로 군림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목적은 이 땅에서 권력을 잡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그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환호와 갈채를 등 뒤로 하고 피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8장에 가면, 예수님이 빌라도와 나눈 대화가 나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당신이 유대 사람들이 왕이오?” 그러자 예수께서 직답을 피하고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답답해진 빌라도는 “왕이라는 말이냐 아니라는 말이냐?”고 다그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 하십니다:

당신이 말한 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의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땅에 위대한 왕국을 건설하고 그 나라의 왕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관심은 오직 진리를 증언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 진리를 듣고 깨달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인정하게 됩니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진리의 왕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를 듣고 깨달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섬깁니다. 미국인이든 이라크 사람이든 이 진리를 알게 되면 예수님이 자기 나라 대통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참된 왕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 잠시 있다가 사라질 왕국의 임금이 아니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나라, 이 세상 어디든지 있는 나라, 진리의 나라 임금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배고픔과 아픔을 깊이 동정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해 주기도 하십니다. 여기에서 무리들을 먹이신 것도 그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그분의 능력을 보고 놀라 모인 무리들이 한 단계 성숙하기를 원하십니다. 언제나 떡을 달라, 병을 고쳐 달라고 요청하는 상태에 머문다면, 예수님은 참으로 안타까우실 것입니다. 그분은 진리를 깨우치고 참된 삶을 살게 하려고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진리를 배우려는 열심은 별로 없고 오직 기적을 구경할 욕심만 있다면, 그분의 가슴은 미어질 것입니다. 무리들이 떡을 배불리 먹고는 자기들의 왕이 되어 영원히 먹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열광했을 때, 예수님은 외면하셨습니다. 산 속으로 홀로 피하실 때 그분의 심경은 참으로 참담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 이 자리까지 예수님을 따라 나온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께 열광하고 기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혹시,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는 것 아닙니까? 이 땅에서 우리의 왕이 되어, 우리의 원한을 풀어 주고, 우리를 보호해 주고, 우리를 먹여 주고 입혀 달라는 것 아닙니까? 6장 26절을 보면, 당신 곁에 모인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진리를 배우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왔다는 뜻입니다. 혹시 우리도 이 무리들처럼 먹고 배 부르는 일을 위해서 이곳에 모여 있는 것은 아닙니까? 좀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어서, 세상에서 좀 더 잘 나가기 위해서, 좀 더 편안히 살기 위해서, 만사형통하기 위해서, 예수님께로부터 능력을 구하려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닙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를 듣고 그 진리대로 살아 보겠다는 열망이 과연 우리에게 있습니까?

기억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무리들에게 등을 돌리셨습니다. 한 두 번은 그들의 물질적인 요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 상태에 있어 같은 것만 요구하면, 예수께서는 결국 등을 돌리십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징들을 보고 그분이 누구이며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과연 우리에게는 이런 변화와 성장이 있습니까? 혹시나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왔다가 그것을 얻고 나면 금새 돌아서 가버리는 사람들과 같지는 않습니까? 혹시 예수께서 우리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시겠습니까?

또 하나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욕구를 채워 달라고 열광했던 무리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다시 찾아왔을 때, 예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의 물질적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시고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음부터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듣고 싶지도 않았고,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진리에 관심 있었던 소수의 제자들만 끝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쪽입니까? 우리는 끝까지 예수 곁에 남아 있을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얼마 있다가 실망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날 사람들입니까?

3.

둘째, 예수께서는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은 그분을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만, 그분은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늘 때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아직 내 때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누가 무슨 말로 유혹을 해도 때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때가 되었다”고 믿음이 왔을 때, 단호하게 나섰습니다. 모두가 다 말렸지만, 나서야 할 때라는 믿음이 생기자 결연하게 나섰습니다.

7장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을 보고 제안을 합니다. 그 정도의 능력이면 예루살렘에서도 통할 수 있으니 가자고 말입니다. 그곳에 가서 스타가 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 하십니다: “내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너희의 때는 언제나 마련되어 있다”(6절).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분의 전반적인 사고방식에 비추어 볼 때,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즉, 예수님처럼 소명 의식,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아무 때나 나서지 않습니다. 일에는 다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은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분명히 압니다. 누가 시킨다고 나서지 않고, 말린다고 물러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별지(分別知)를 따를 뿐입니다.

반면, 소명 의식과 목적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때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언제나 ‘제 때’로 보입니다. 남들이 나설 때라고 등을 떠밀면 그런 줄 알고 나섭니다. 남들이 아니라고 말리면 또 그런 줄 알고 물러섭니다. 혹은 세상 모두가 물러날 때라고 알고 있는데 본인만은 고집을 피우고 머물러 있습니다. 아무 때나 그들의 때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낭패를 봅니다. 언제나 내 때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때’가 찾아오지 않습니다. 아니, 진정한 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자신의 소명을 알고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에게만 진정한 '때'가 찾아옵니다.

저는 잘 알지 못하는 곳을 찾아갈 때면, 자주 먼 길로 돌아가거나 아주 까다로운 코스를 찾아다닙니다. 저처럼 습관적으로 이렇게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길치’라 합니다. 저는 길치로서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길치야 말로 언제나 제 때인 줄 알고 사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는 곳을 정확히 모르면 골목마다 멈추어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다 맞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본인도 불편하고, 같이 탄 사람도 불안하고, 뒤에서 따라오는 차들에게 불편을 끼칩니다. 사고 나기에 아주 쉽습니다. 그렇게 몇 번 하다가 “여기가 아닌가?”하고 가다 보면 꺾어져야 골목을 곳을 지나 버립니다. 반면, 가는 곳을 정확히 알면, 그곳에 이르기까지 편안하고 즐겁게 여행할 수 있습니다. 같이 가는 사람도 즐겁고, 사고가 날 위험도 없습니다. 가는 방향을 정확히 아는 것은 참으로 편하고 안전하고 즐거운 일입니다.

다행히도, 길눈이 어두워 방황하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정말 큰 문제는 인생에 있어서 길치가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인생 전체를 망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을 찾고, 분명한 지도를 가지고 인생을 운전하면, 우리는 때를 분별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걸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인생의 길은 이생에서는 하나님의 사명을 향해 있지만, 내생에서는 영생에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에서 이 아름다운 삶의 여정을 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부르십니다. 그분이 전하고자 하셨던 진리가 그렇게 사는 길을 가르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고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위해서 올곧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남들에 의해서 ‘자의반 타의반’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때를 찾습니다.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믿는 한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반면, 자신의 때라고 믿어지면 그의 퇴장을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혹시 소명 의식도, 목적 의식도 없이 아무 때나 나의 때인 줄 알고 경망스럽게 우왕좌왕하며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더욱 진지해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움직일 수 있다는 견고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4.

셋째, 인간에게 영광 받는 것을 일체 거부하셨던 예수님의 태도에서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않는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반면, 우리 보통 사람들은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않고 다른 인간들에게 영광을 구하려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영광을 받는다는 것은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무리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그 환호와 갈채에 황홀해져서 마치 무엇이라도 된 양 우쭐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기를 지속시키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인지, 아니 그것이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를 잘 아셨습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갈채와 환호가 물거품같이 덧없는 것임을 아셨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하나님만 아시면, 하나님의 인정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론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일을 했는데도 사람들은 칭찬하고 환호합니다. 때론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비판하고 반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위해서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 보면 사람들의 비판을 당해야 할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진실이 이렇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를 경계할 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칭찬하고 환호할 때 그분은 긴장했습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환호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다는 뜻일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과 환호는 자주 판단과 시야를 흐리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때면 예수님은 자주 자취를 감추십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쳤을 때도 그랬고,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고쳤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 놀라운 기적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이 그분에게 집중되는 순간, 그분은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그분은 자신을 드러내고 스타가 되기 위해서 일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을 할 뿐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해 사람들 앞에 자신이 드러나게 되면 그분은 즉시로 그 자리를 떴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입니다. 누구든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런 욕구가 강한 사람들은 그런 직업을 찾습니다. 남들 앞에 나서는 직업, 자신을 상품으로 만드는 직업, 남들을 열광시킬 수 있는 직업을 찾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 연예인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욕구를 가장 잘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직업이 연예인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섬기던 교회에 최근에 가수로 입신한, Jessica라는 17세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저희가 살던 지역에서 조금씩 알려지더니 곧 뉴욕 음악계에 소문이 퍼졌고, 음악 잡지에 인터뷰도 실리고, 뉴욕 시티에서 공연할 기회도 얻었습니다. 그 여학생이 연예계 안에서 가파른 상승세를 타는 것을 보고, 지난 성탄절에 제가 카드에 이런 메시지를 적어 보냈습니다.

"인기와 유명세야말로 가장 관리하기 어려운 적입니다. 당신은 행복해지기 위해 그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지만, 장차 누리게 될 인기와 유명세를 관리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당신의 성공이 오히려 많은 연예인들에게서 보듯 불행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성공할수록 더욱 영적 생활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멋도 모르고 군중에 갈채에 흥분되어 무대에서 활동하는 어린 연예인들을 볼 때마다 연민의 감정이 마음에 가득 차곤 합니다. "이 나이 되어서도 처리하기 힘 든 그 문제를 저 어린 사람들이 어찌 감당하나!"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 연예인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이 욕구에 굶주려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남들 앞에 서고 싶어 하고, 칭찬 받고 싶어 하고, 영광 받고 싶어 합니다. 사회에서 채우지 못하면 교회에서라도 그 욕구를 채우고 싶어 합니다.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것을 가장 귀한 덕목으로 가르치는 교회에서 자주 문제와 다툼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 욕구 때문입니다. 남들이 인정을 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을 선전하려 합니다. 남이 들어주지도 않는 자랑을 늘어놓는 이유는 남이 칭찬하지 않으니 자기 스스로라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욕구가 그렇게도 우리 마음속에 깊이 뿌리를 잡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게도 제거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나서서 환호할 때, 단호히 거부하고 산 속으로 피하신 예수님은 참으로 놀라운 분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분의 제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살라고 권고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욕구가 인생을 망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위해서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기 쉽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위해서 노력하다 보면 자신은 껍데기가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칭찬할 때는 뭐가 된 것 같았는데, 홀로 남아 자신을 보면 아무 것도 아님을 발견합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잊으려고 마약도 하고 술도 마십니다. 인생은 그렇게 시들어 갑니다.

5.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홀홀히 돌아서서 산 속으로 몸을 감추시는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 뒷모습을 묵상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시인 구상 선생님은 ‘그분이 홀로서 가시듯’이라는 감동적인 시를 남기셨습니다.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저 2천 년 전 로마의 지배 아래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수모를 받으며
그분이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악의 무성한 꽃밭 속에서
진리가 귀찮고 슬프더라도
나 혼자의 무력에 지치고
번번이 패배의 쓴잔을 마시더라도
제자들의 배반과 도피 속에서
백성들의 비웃음과 돌팔매를 맞으며
그분이 십자가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정의는 마침내 이기고 영원한 것이요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요
우리의 바람과 사랑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서

아무런 영웅적 기색도 없이
아니, 볼꼴 없고 병든 모습을 하고
그분이 부활의 길을 홀로서 가듯
나 또한 홀로서 가야만 한다.

아버지 하나님의 진리를 향해, 자신의 사명과 때를 분별해 가며, 오직 하나님의 눈만을 의식하고 홀홀히 당신의 길을 가신 주님! 그 주님의 길을, 우리 같이 손잡고 걸어보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