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목사 (와싱톤한인교회)

어린 아이가 철이 들기까지는 이런 생각을 주로 합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로부터 내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그러다가 철이 들면 주된 관심이 이렇게 바뀝니다. “부모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그것을 이루어드릴 수 있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도 좋은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미숙할 때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를 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이 성숙해짐에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그것을 이루어드릴 수 있을까?”를 더 많이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 곧 우리 자신에게 가장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며, 그것을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1.

오늘 본문에 보니, 예수님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도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28절에 보니, 그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을 위한 일’ 혹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들이 비록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매료되어 모이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려는 관심과 열심을 어느 정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맞지 않아 보이는 대답을 주십니다. 29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의 뜻은 이런 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들이 하기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가? 나를 믿는 것, 그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다.” 어찌 보면, 과대망상증에 빠진 사이비종교 교주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분이 제 정신인가?”라고 의심할 만한 말씀들이 많습니다.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이라느니, 자신이 생명의 빵이며 생명의 음료라느니, 자신을 먹으라느니, 자신을 먹으면 죽지 않을 것이라는 등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을 정신 나간 소리로 치워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치워 버리기 전에, 그 말에 혹시 우리가 포착하기 어려운 숨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정도 점검해 볼 필요는 있다고 믿습니다.
자, 한 번 따져 보십시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을 풀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에게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참되고 영원한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렘 29:11)

여기서 ‘번영’이라고 번역된 말을 조심해야 하는데,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물질적인 번영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말의 가장 우선적인 의미는 소유의 증가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입니다. 행복과 기쁨과 평안이 깃들 수 있는 상태로 우리가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지고 계신 계획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장 7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생령’으로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생령’이라는 말은 ‘육신을 가진 영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영적 존재로 지어진 우리가 영적 존재답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행복이요, 하나님께는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2.

저는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설명하는 기독교 교리를 한 동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해했고, 심지어는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교리 말씀입니다. 이 말이 미숙한 제게는 심심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장난감을 만든 것이나 흥을 돋게 하기 위해 기쁨조를 만든 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순전히 저의 짧은 생각 탓에 생긴 오해입니다. 참,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런 잘못을 범하는지요!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는,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으면 진실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실상은 우리의 생각의 그릇이 너무 작아 다 담아낼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왜 이렇게도 더디고 어려운지요! 저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그분에게 제가 누구인지를 어렴풋이나마 알고 나서야, 이 교리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어린 아이가 심심해서 만든 장난감 같은 존재가 아니라, 예술가가 혼을 다해 그린 걸작품 같은 존재입니다. 다만, 걸작품으로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걸작품으로 지어져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지금도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원래 계획대로 고결하고, 순수하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선하고, 의롭고, 향기로운 존재로 지어져가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되어감으로 우리는 참된 삶의 기쁨과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우리 존재가 영원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각자는 이 세상에 다시 볼 수 없는 유일한 나, 하나님께서 하나 밖에 계획하지 않으신 참된 나로 지어져 가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서 참된 행복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는 것을 보실 때 하나님은 창세기 1장에서 그러셨듯이, “아, 참 좋다!”고 말씀하시며 감격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마치 훌륭하게 자란 자식을 보며 영광을 받는 부모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기대대로, 그분의 뜻대로 회복되고 자라는 것을 보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영원히 보존되리라고 생각하고 혼을 다해 만든 작품이 누군가의 실수로 인해 몇 개월 만에 파손되었다면, 그 화가는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영원한 존재로 창조하여 그렇게 살아가기를 의도했는데, 우리의 부주의와 타락 때문에 몇 십 년 살다가 이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존재로 창조했는데,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영원한 고통 속에 떨어진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정성을 다해 만든 작품이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창고에 방치되어 먼지에 뒤집어 씌인 채 있다면, 그 화가는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삶의 방향과 의미를 잊은 채 세월을 허비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가 거룩하고 아름답고 참되고 순수하게 창조된 본성을 죄와 악으로 타락시켜 부정하고 추하고 거짓되고 탁하게 살아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그분의 원래 의도와 계획대로 회복되어 영원한 존재로, 영적 존재로, 고결하고 거룩한 존재로 지어져가는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 각자에게 가장 행복한 길이요, 그것이 곧 영생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되는 일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 인간의 지복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행복을 분리할 수 없듯,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행복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3.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렇게 회복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 존재로 지어졌지만 타락하여 동물적인 차원에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을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그분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나의 비유를 사용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먹고 마시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치 성찬에 참여하여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듯, 예수님을 먹고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 먹는 것이 아니라, 항상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 세 끼 먹는 음식과 물을 통해 육신적인 생명이 유지되듯, 지속적으로 먹는 예수님이 우리의 영적 생명을 키워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초대 교회 교인들이 로마인들로부터 ‘인육을 먹는 야만인들’이라는 비난을 들었다는 사실을 압니까? 당시,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몰래 숨어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누었습니다. 로마인들로서는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는지 현장을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들은 것은 다만 믿기 어려운 스캔들의 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예수라는 사람의 살과 피를 나누어 먹곤 한다는 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소문을 그대로 믿었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소문은 로마인들 사이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혐오감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를 먹는다’는 이미지가 초대교인들에게 얼마나 강했는지를 반증합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예수를 먹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성찬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만, 예배드릴 때도, 기도할 때도, 예수님의 말씀을 배울 때도, 성도들 사이에 교제를 나눌 때도,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울 때도,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를 먹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일을 통해 예수님의 정신과 영이 자신을 더 깊이 지배하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독일 속담에 ‘Mann ist was mann isst.’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그 음식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풀 수 있습니다만,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 몸의 형질을 결정하고, 그 형질이 우리의 기질을 결정하며, 그리하여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채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덜 호전적이며 조용하고 평화주의적인 반면, 육식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훨씬 호전적이고 파괴적이라는 분석을 내놓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최근의 과학은 인간의 육신과 영혼 사이에 뗄 수 없이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증명해 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심리학자는 “네가 먹는 음식이 무엇인지 내게 말해 보아라. 네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Tell me what you eat and I'll tell you what you are.)고 말합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 자신이 된다! 이 말을 생각하니,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을 먹고 당신의 피를 마시라고 한 이유를 좀 더 잘 알듯 합니다. 비유하자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의 형질이 우리의 형질이 되고, 그분의 기질이 우리의 기질이 되고, 그분의 정신이 우리의 정신이 되고, 그분의 영혼이 우리의 영혼이 되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먹어 예수님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인육을 먹는 야만인’이라고 비난할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러니 마음 놓고 이 이미지를 사용하십시다. 예수님은 실제로 우리에게 먹히기 위해 오셨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그분이 태어나셔서 동물의 먹이통에 누우셨다는 사실에서 이 상징을 읽습니다. 그분은 세상의 먹이로 오셨습니다. 한 두 끼니를 채워주는 먹이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는 먹이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의 살과 피를 찢어 세상의 먹이로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분의 살과 피를 먹듯, 예배로써, 기도로써, 교제로써, 사랑의 봉사로써 그분의 정신과 영을 먹고 마시면, 우리는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에 거하게 됩니다. 예수를 먹고 마시면, 그분의 정신이 우리 정신이 되고, 그분의 영이 우리 영이 되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일이라고 풀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먹고 마심으로 그분의 존재 안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먹고 마심으로 그분이 사셨던 것처럼 저희의 삶이 변화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4.


그렇다면, 질문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예수님을 잡숫고 계십니까? 표현이 너무 자극적입니까? 질문을 바꿔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과 얼마나 자주, 얼마나 깊이 사귀고 계십니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예수님을 잡숫고 계십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마치 일주일에 한 번 특별 음식을 먹어 건강을 지키려는 사람의 행동처럼, 마음에 위안을 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건강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큽니다. 매일 먹어야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먹은 그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 존재 전체를 집어삼킬 수 있습니다. 그분의 영원성에 우리의 유한성이 삼켜지고, 그분의 온전한 사랑에 우리의 불완전한 사랑이 삼켜지고, 그분의 온전한 진리에 우리의 불완전한 진리가 삼켜지고, 그분의 거룩한 영에 우리의 부정한 영이 삼켜지고, 그분의 온전한 마음에 우리의 상처 난 마음이 삼켜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이다. 또한 아들을 보고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39-40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이유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이루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당신을 먹이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분을 쉬지 말고 먹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면 우리 존재 속에 오신 그분이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저의 책 <사귐의 기도>가 출판된 후 약 1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저는 알지 못하는 어떤 부인으로부터 소식을 받았습니다. 2003년 2월 18일에 일어난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으로 인해 대학에 다니던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어머님이셨습니다. 그분은 제게 글을 보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비명에 간 아들이 그리워서 그 어머니는 아들의 방을 치우지 못하고 그대로 두고는,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그 방에 들어가 아들의 손 때 뭍은 물건들을 만지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책꽂이에 꽂힌 책들을 하나씩 뽑아 아들이 밑줄 친 부분들을 읽으며 아들의 생각을 추측해 보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저의 책 <사귐의 기도>를 뽑아 들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아들이 남긴 흔적을 찾았습니다. 중간 쯤 이르렀을 때, 이 어머니의 눈길을 강력하게 사로잡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123쪽에 있는 몇 문장에 아들이 밑줄을 그어 놓았는데, 질병에 대한 치유 기도를 논하는 장의 말미에서 제가 이런 말을 해 놓았습니다.

[치료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만 있다면 기도하면서 투병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생존 확률이 희박한 경우가 있다. 현실적으로 거의 가망이 없는 경우, 기적적인 치유를 위해 간절히 청원하는 동시에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신앙인의 미덕이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마치 이생이 전부인 양 한 순간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는 데 집착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이렇게 기도한다. “죽어야 할 때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일 힘을 주십시오.” 죽어야 할 때 구차하게 살아남으려고 애쓴다면 얼마나 초라해 보일까? 참된 신앙이라면 현실적으로 가망이 없다고 할 때 미련 없이 삶을 정리하고 담대하게 부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그 어머니는 이 부분을 읽는 순간, 화재 현장에서 질식한 채 불길에 타 죽어가면서 자신에게 cell phoned으로 전화를 해서 남긴 마지막 말이 생각났습니다. 아들은 그 경황에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를 위해 기도해 줘. 내가 죽어가고 있어.....”
이 어머니가 제게 글을 보낸 이유는, 불길 속에서 죽어가는 아들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힘이 바로 위에서 읽은, 밑줄 친 부분을 마음에 새긴 까닭이 아니었을까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 어머니는 제 연락처를 수소문했고, 지금은 닫힌 저의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이 소식을 남기시고, 제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접하고 감사함보다는 두려움에 깊이 휩싸였습니다. 저에게 그 청년은 죽은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영생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죽음을 맞았습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자멸하는 사람이 있고, 이렇듯 죽음의 문턱 앞에서 싱싱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영생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청년이 이렇게 참된 생명의 힘을 보여준 것은 그가 끊임없이 예수님을 먹어 예수님이 그의 존재를 삼켰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 어머니의 감사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스스로 자문해 보았습니다. “너는 그 상황에서 그렇게 살아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먹어라.”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루에도 몇 번 씩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읍시다. 그분의 영이 우리를 완전히 삼킬 때가지, 예배로써, 기도로써, 찬양으로써, 사귐으로써, 사랑의 봉사로써, 헌신으로써 그분을 먹고 마십시다. 그러면 우리가 진실로 살아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진실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이 의미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방향이 잡힐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에 영원이 깃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