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목사 (와싱톤한인교회)

저를 잠깐 보아 주십시오. 제가 들고 있는 이것이 무엇으로 보입니까? 그렇습니다. 종이입니다. 좀 더 자세히 보아 주십시오. 종이 외에 다른 것은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육안으로 보지 마시고 마음의 눈으로 보도록 해 보십시오. 마음으로 이 종이를 보면 뭐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혹시 나무가 보이지 않습니까? 이 종이의 원료가 된 나무를 마음으로 그려 보시고 그 나무를 주목해 보십시오. 그러면 무엇이 보입니까? 거대한 숲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숲에서 들리는 새소리, 시냇물소리, 바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꽃 향기, 나무 향기가 느껴지는 듯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진짜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육안으로 보시는 종이 한 장이 진짜입니까? 아니면, 마음으로 보신 그 나무와 숲이 진짜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둘 다 진짜입니다. 둘을 다 보아야 제대로 본 것입니다. 둘 다 제대로 보아야 이 종이 한 장을 제대로 대할 수 있습니다. 이 종이를 몇 센트에 불과한 종이로만 보면, 아주 쉽게 구겨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종이를 통해 나무를 보고, 숲을 보고, 지구를 보고, 우주를 본다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낭비하는 종이가 모여 수 십 년 된 아름드리 나무를 쓰러뜨리고, 그렇게 쓰러진 나무들이 결국 숲을 황폐하게 만들고, 황폐화된 지구 환경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저는 교회 사무실에 있는 복사기 앞에 제 이름으로 된 방을 써 붙였습니다.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종이를 아끼는 것은 1) 교우들의 귀중한 헌금을 아끼는 것이고, 2) 나무를 보호하는 일이며, 3)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정확하게 복사할 양을 파악하여 낭비를 줄이고, 가능한 양면 복사를 하고, 문제가 없다면 이면지를 사용해 주십시오.” 이 방을 통해 전하려 한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종이를 종이로 보지 마십시오.”

1.

살아가는 데 있어서 볼 것을 제대로 보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신바 있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네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 나 심하겠느냐? (마 6:22-23) 여기서 말씀하시는 ‘눈’과 ‘몸’은 글자 그대로 우리의 육안과 육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눈이 밝아야 몸이 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서 몸이 제 구실을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불편함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서 ‘마음의 눈’과 ‘인생살이’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보는 마음의 눈이 있으면 바른 인생을 살 수 있고, 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마치 밤길을 걷는 것처럼 불편과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혹은 “볼 눈이 있는 사람을 보아라.”고 덧붙이십니다. 종이를 종이로만 보는 사람은 볼 눈이 없는 사람입니다.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를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로 그리고 홍수로 인해 산이 무너지는 소리로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들을 귀가 있는 사람입니다. 볼 눈과 들을 귀가 없이는 제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 즉 예수님 곁에 모였던 유대인들은 볼 눈도, 들을 귀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이 서로에게 수군거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를 우리가 알지 않는가?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는가?”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요셉의 아들 예수로만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만 들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다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눈이 그들을 속인 셈입니다.

2.

저는 한 때 예수님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참 불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태어나 그분을 만나고 그분에게서 직접 배우고 그분과 함께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시대에 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당시에 제가 살았다고 한다면, 오늘 이야기에 나온 유대인들처럼 저도 그분의 겉모습에 눈이 팔려서 그분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은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 한 때 불행처럼 느껴졌는데, 실은 육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분의 정체를 깨닫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보다 제게 더 쉬운 일일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을 한 인간으로밖에는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혹은 신적인 존재로 믿어지지 않는다는 고백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도, 말 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러한 고민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것이 저절로 믿어지는 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유대 땅에서 살았던 한 청년이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별 어려움 없이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어리숙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아무 거나 덮어놓고 믿는 것은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생각의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사렛 청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직하게 의문을 제기하고 따져 보는 것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값진 선물입니다. 그것은 죄가 아니라 미덕입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믿음의 성장 과정에서 ‘이성’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성적 추리로써 믿음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이성을 무력화시키고 믿는 것도 매우 위험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어질 때까지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옳습니다. 믿지 않기 위해 의심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믿기 위해 의심하고 따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활짝 열어 보이실 날이 옵니다. 믿어지지 않던 것이 어느 순간에 전폭적으로 믿어지는 순간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믿어집니까?” 그러면 대부분 ‘위대한 교사’라거나 ‘위대한 예언자’라는 대답을 합니다. 아마 그 정도는 다 인정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위대한 교사라고 믿어지면, 그분의 좋은 제자가 되도록 그분을 배워 봅시다.”좋은 제자가 되기 위해 예배도 열심히 참여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고 기도도 깊이 하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아 보자고 권합니다. 제가 이렇게 권고하는 이유는,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에 이르면 머지않아 그분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시작하여 결국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경험하기에 이르는 것을 여러 사람을 통해 목격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의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보았던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을 겉으로만 보았지, 그 내면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관계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좋은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믿어지지 않더라도, 그분을 위대한 교사로 받들고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며 그분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심화시켜 나가면, 마음의 눈이 열려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던 그분의 정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신적인 존재가 육신을 입는다는 것이 이성으로는 납득되지 않아도, 인간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현존을 목격하게 되면, 마치 2천년 전 도마가 그렇게 했듯,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3.

이렇게 영적인 눈이 열려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보게 되면, 다른 사물도, 다른 사람도 새롭게 보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바울 사도가 고백한 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라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볼 눈이 뜨인 사람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새롭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에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았으나, 이제는 그 내면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눈이 뜨이면 가장 먼저 사람들이 새롭게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아무도 육신의 잣대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고후 5:16). 육안에 보이는 것으로 다 알았다고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실체를 보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겉모습이나 그 사람의 환경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의 내면에 있는 영혼을 보겠다는 것입니다. 어제, 우리 청소년들이 차동빈 목사님의 인도 아래 아리조나 주에 있는 인디언 정착촌에 선교 활동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예배당에서 잠시 예배를 드리며 제가 그들에게 신신 당부한 것이 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차별과 소외와 가난과 착취로 인해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들을 만나거든, 그 사람들의 외모가 어떻든 상관없이, 그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Respect’라는 한 단어를 마음에 새기고 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라는 말, ‘믿으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 정착촌에 사시는 분들이 ‘오랜만에 사람대접을 받는구나!’ 하고 느끼도록 존중하라고 부탁했습니다. 혹시 우리 청소년들이 그분들의 외모 때문에 그분들을 하찮게 느끼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을 존경받아 마땅한 한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 한, 백 마디 천 마디의 복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니, 그것이 얼마나 역겹게 느껴지겠습니까? 예수께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온 우주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사회적 신분을 가졌으며, 얼마나 잘 살며, 얼마나 교육 받았는지는 그 사람의 영혼의 중요성에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외적인 조건은 그 사람의 영혼의 값을 더하지도, 덜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외적인 조건에 눈이 끌려서는 안 됩니다. 외적인 조건은 다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우리 눈이 붙들리면 허상에 사로잡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목사에게 있어서의 가장 큰 허물 중 하나는 교인들을 외적인 조건에 따라 차별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저도 이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지 않을 것을 마음에 다지고 행동합니다만, 여러분이 보실 때는 어떠실지, 생각할 때마다 조심스럽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그렇게 큰 부덕인가를 따져 보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목사의 교인 차별은 목사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볼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새롭게 보는 경험을 거친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런 경험을 거친 사람이라면 마땅히 외적인 조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을 똑 같은 비중으로 대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만 영적인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제가 이 눈을 잃지 않고 목회할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4.

그런데 실은 이 눈이 목사에게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이런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 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 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 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 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 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 치에 앉든지 하오”하고 말하면, 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 끝에 다음과 같은 결론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해서 대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셨습니까?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교인이든 아니든, 같은 민족이든 다른 민족이든, 피부색이 어떻든, 어떤 사람이든, 겉모양을 보고 차별하면 그것이 죄를 짓는 것이라는 사실을! 거리에서나 직장에서 다른 인종들에게 행하는 인종차별적인 언사나 행동이 하나님께서 협오하시는 죄라는 사실을! 도둑질이나 간음이나 거짓말과 동일한 ‘죄’라는 것을! 아, 정말 이 죄로부터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가 얻은 이 영적 시야가 더욱 밝아져서, 누구를 만나든 겉모양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고 한 그 영혼,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주고 맞바꾸신 그 영혼, 외적인 모습으로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이 고귀한 그 영혼을 언제나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차별의 죄를 벗어나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와싱톤한인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교인들이 목사를 대하는 태도와 관리 집사님을 대하는 태도가 동일한 교회, 집사, 권사, 장로, 전도사, 목사 등의 직분이 더 낮아져 섬기라는 부름이라는 것을 삶으로써, 행동으로써 증명하는 교회, 바깥 사회에서 달고 있던 계급장을 모두 떼 내고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이든 형제자매로서만 만나 하나가 될 수 있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게 해 달라고, 저는 기도합니다. 이런 정신이 우리 교회 교우들에게 이미 깊이 스며들어 있음에 저는 감사드립니다. 이 교회에 부임할 때, 저는 교우들 가운데 사회적으로 대단한 분들이 많이 있다는 소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교우들을 뵈면서 호기심으로“누가 대단한 사람일까?”하고 찾아보았는데, 교회 안에서 행동하는 것만 보아서는 대단해 보이는 사람을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 시치미를 뚝 떼시고 행동하시니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차차 사정을 파악해 가면서, 사회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이룬 분들이 실제로 적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사회에서 달고 있던 계급장을 모두 떼어놓고 겸손히 낮아져 형제자매들을 돕고 계셨습니다. 우리 교회의 그런 분위기 때문에, 사회적인 신분을 빌미로 삼아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우리 교회를 찾아오셨던 분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겸연쩍어 자취를 감추곤 한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얼마나 감사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지금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분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고 낮아지는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억지로, 비굴하게, 비참하게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기쁨으로 자신을 낮추도록, 참된 복음을 소개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깥 사회에서는 어디에서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경험을 한 번도 가지지 못하면 사회적 성공으로 인해 자칫 시각을 잃고 자신이 진실로 누구인지 망각하기 쉽습니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한 사람에게도 필요합니다. 또한 저는, 우리 교회가 사회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분들이 와서 자기 집처럼 평안하게 느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분들이 진실한 사랑과 존경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지를 자각하도록 복음 안에서 그들을 돕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교회가 이 일을 하지 못하면, 그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를 깨달아 알 기회를 얻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분들은 어둠과 그늘 속에서 살면서 시들어 갈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파하실지 생각해 보면, 아찔합니다. 사회적 신분이 낮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아픔을 당하고 눈물짓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크나큰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이렇게 보면, 믿는다는 것은 또한 눈을 뜬다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기 전과는 전혀 다른 실체를 본다는 뜻입니다. 그 눈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열릴 때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눈이 뜨일 수 있는 관계 안에 들어갈 때 저절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눈을 갖기 위해 우리가 따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 거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상태에서 기다리면 성령께서 그 눈을 열어 주십니다.
이런 눈을 뜨지 않은 채 믿는다고 열심을 내다보면 온갖 오해와 오류와 이단이 나옵니다. 물질과 육신은 악하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기 위해 세상 전체를 등져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게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직업도, 학업도, 가족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그들이 사는 것을 보면, 철저히 세속적인 욕망에 붙들려 있는 것을 봅니다. 가장 영적인 것처럼 가장하며 선전하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이 결국은 물질적 탐욕 때문에 망하는 예를 수 없이 봅니다. 눈을 뜨고 믿지 않으면 이런 잘못에 빠집니다. 눈이 뜨여지지 않았다는 것은 실은 믿지 않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은 스스로 믿고 있다고 우기지만, 믿음이 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눈에 속지 마십시다. 실체를 보기 위해 부단히 눈을 감읍시다. 하나님께서 눈꺼풀을 주신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사로잡혀 실체를 망각하지 않도록, 눈을 감고 마음으로 보라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의 눈을 떠서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 안에 있는 고귀한 영혼을 보고 정성으로 대하라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목사로서 저는, ‘정말 그렇게 살았더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목사로서 저는, 우리 와싱톤한인교회가 정말 그런 교회라는 칭찬을 듣는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기도문으로 오늘 설교를 마칩니다. “주님, 제 눈을 감겨 주십시오. 당신을 볼 수 있도록. 주님, 제 귀를 막아 주십시오.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