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원목사 (지구촌교회)

최근에 극장가에는 아주 그 이상 기류 하나가 흐르고 있다고 그럽니다. 과거에 수입 영화가 아니면 흥행이 안되던 그런 신화를 깨고, 우리 한국 사람들이 만든 국산영화가 허리우드 영화를 압도하는 그런 이상 기류가 나타나고 있다고 그럽니다.
그 이유를 분석하는 전문가들의 견해는 다양하게 엇갈리고 있지만, 공통된 지적 가운데 하나는, 최근 히트하고 있는 방화들이 대부분 한국인들의 소위 바닥 정서, 우리가 잃어버려가고 있지만 잠재되어 있는 어떤 정사적 갈망들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대표적인 작품이 "친구” 라든지 혹은 뭐 “신라의 달밤” 그런 영화들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사실 두 영화가 작품성에 있어서는 별것 아니지만 그렇게 많은 관객동원에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 대중들에게 어필하는 어떤 정서적 공감대가 있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정서적 공감대의 정체는 한마디로 말하면 그 순수한 친구에 대한 갈망, 어떤 우정에 대한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된 갈망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옛날부터 그 친구를 한문으로 지기(知己)라고 불러왔습니다. 지금 많이 그 말을 쓰지는 않죠. 지기(知己), 그 알 지(知)자에다가 자기 할 때 기(己)자, 그래서 나를 알아주는 사람, 나와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그리고 내 마음을 이해 줄 수 있는 사람, 이런 친구를 내 인생에서 갖는 다는 것은 분명한 행복의 요소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런 친구를 일찍이 어려서부터 갖고 있을수록, 또 그런 친구가 주변에 여러 사람 있을수록, 우리 인간의 행복지수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친구들을 우리는 예로부터 “죽마고우”다 이렇게 불러왔죠? 죽마고우.
어떤 사람은 죽마고우를 “죽, 죽치고 마주앉아 고스톱 치는 우정의 친구” 라고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제자들과 슬픔과 기쁨을 같이 하시고 또 삶에 여러 가지 교훈들을 같이 나누시는 생애를 살아오시다가 그 3년의 거의 끝자락, 마지막 부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다락방에서 마지막 유훈 같은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우리가 이 교훈을 가리켜서 소위 다락방 감화다 이렇게 말하는데 요한복음 13장에서부터 16장까지가 바로 이 다락방 감화에 속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시는 이 교훈 가운데 한 대목은 제자들에게 아마 깊은 충격을 주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한참 교훈을 베푸시다가 갑자기 예수께서 제자들을 돌아보시면서 오늘 본문에서 하신 말씀인데 너희들은 이제부터 나에게 있어서는 종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너희들은 내 친구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 친구라고.
유대의 문화적 정서는 한국과 대단히 흡사합니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거의 주인과 종의 관계에 비교될 수 있는 과거의 그런 정서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라니, 스승 편에 서 있는 사람이 갑자기 말하기를 이제부터 그대들은 나의 친구라, 이 말은 제자들을 얼마나 놀라게 만들었을까요?
도대체 친구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친구나 소위 우정의 의미를 정의하고자 시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차라리 이 친구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소위 우정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구조, 우정이 형성되는 단계를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그 단계 속에서 나타나는 우정이라는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런 우정이 형성되는 단계에 관해서 매우 의미 깊은 그런 교훈들이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우정이 형성되는 그 단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정은 선택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오늘 본문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정은 선택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일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다 우리의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오직 몇 사람만이 그 중에 나의 친구가 됩니다. 이렇게 선택된 친구들은 우리 인생의 길을 통해서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기도하고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양의 그 속담처럼 전해지는 명언가운데 본래 세르반테스가 이 말을 처음 했다고 전해집니다마는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기를 원한다면 친구를 보라” 그가 어떤 사람인가 알기를 원한다면 친구를 보라,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일생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선택을 합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선택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선택하는 것, 그것은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는 선택이 되겠죠.
저는 인생에서 그 다음으로 중요한 선택이 있다면 배우자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일생을 함께 하는 내 아내, 내 남편을 선택하는 선택처럼 중요한 선택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정의 선택, 혹은 친구의 선택은 아마도 그 다음쯤 오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친구를 선택해야 할까요? 이 선택의 성경적 가이드 라인이 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에서 그 지침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자! 예수님이 뜻밖에 그 제자들에게, 12명으로 선택했던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내 친구야!”이렇게 말씀하시면서 16절에서 매우 의미 있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16절에 보시면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뭐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이렇게 해서 친구가 된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의 중요한 뜻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 편에서 시도된 그 무엇이기에 앞서서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와 간섭에 근거한 것이다. 물론 그것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이 우리의 우정의 선택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친구가 없다고 불평을 합니다. 친구가 어느 날 갑자기 내 일생 속에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적용해 보자면, 친구란 어느 날 갑자기 인생 속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누군가를 선택함으로써 친구가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오히려 우리가 친구의 관계 속에 적극적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하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사람을 선택한다면 왜 선택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12제자를 친구로 선택하신 어떤 동기를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자 다시 읽어보시면 16절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운 것이다 그 이유는 너희로 가서, 그 다음에 뭘 맺게 하려고? “과실을 맺게 하려고” 또 그 과실이 항상 있게 하려고,
자, 예수님이 12명의 제자를 자기의 제자로, 그리고 친구로 선택하신 그 중요한 의도는 어디에 있느냐? “열매를 맺기 위해서다” 그들의 삶이 열매로 풍성하도록, 그리고 그 열매가 항상 있는 삶을 보고파서 예수께서 그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그 제자들을 친구로 선택함으로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 친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무엇을 얻기 위해서만 친구를 선택한다면 그 우정은 이기심에 근거한 상대방을 이용하고 조작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선택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선택이 순수한 우정으로 발전하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상대방의 삶 속에 그분이 축복이 되어주기 위해서, 그래서 상대방의 삶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들로 풍성한 것을 보기 위해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상대방의 삶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한 선택,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변의 어떤 사람을 접근해서 우정을 형성하려고 할 때 주님에게 배울 수 있는 아름다운 우정의 선택의 모습이 아닌가요?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덕을 보기 원해서가 아니라 내가 저 사람의 인생 속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해서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되겠다. .
마치 저 유명한 하바드와 예일의 교수였던“헨리 나우웬”이 캐나다의 토론토 근처의 데이브레이크라는 작은 공동체의 장애인들과 더불어 그 속에 살기 위해서 갈 때 그들을 자기의 친구로 삼기 위해서, 그들의 인생 속에 축복이 되어주기 위해서 선택한 그 길은 얼마나 의미 있는 우정의 선택이였을까요? 우리가 이런 동기로 나선다면 우리들의 우정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참된 우정, 그것은 선택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가르칩니다.

두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정은 나눔으로 자라 가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우정의 두 번째 단계예요. 우정이 형성되는 두 번째 단계, 우정은 나눔으로서만 자라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친구를 한번 만나고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싶다 라는 선언, 혹은 우리 친구가 됩시다 라는 어떤 약속, 혹은 어떤 결단만으로 그것이 순수한 우정으로 발전해 가는 것은 아니죠. 우리가 만났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단 한번의 만남으로 그 다음엔 별 의미 없이 우리의 기억의 스크린 저 건너편으로 사라진 관계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우리의 만남이 진솔한 우정으로 발전해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눔이라는 하나의 과정이 소위 프로세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눔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속 깊은 내면을 열어서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비밀을 나눌 수 있는 나눔 이여야 합니다. 이 비밀을 나누지 않고 우정은 깊이 있는 우정으로 발전해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이 시대에 아주 굉장히 크다란 기독교적 영향력을 끼쳤던 상담자요 또 심리학자요 의사 가운데 “폴 투리니에”라는 분이 계시죠? 제가 자주 인용하는 분인데 폴 투리니에 는 그 비밀에 관리를 중심으로 한 인간 성숙의 발달의 단계를 세 단계로 나누었어요.
첫 단계는 뭐냐하면 어린이의 삶의 단계, 그 아이들에게는 비밀을 간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어린이의 특성입니다. 비밀을 절대로 간직할 수가 없어요. 아빠 이건 비밀이야! 해놓고 그 다음에 금새 그 비밀을 말해 버립니다. 어린아이들은 비밀을 간직하거나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물론 어른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어른 아이라고 말합니다. 그건 어른 아이예요. 그러나 이런 어린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틴에이져의 그 단계가 되면은 달라져요. 소위 비밀을 갖기 시작합니다. 사춘기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비밀을 갖기 시작하는 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부모에게 얘기 안하고 비밀이 생겨요.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발전 단계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러나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사춘기에 들어선 우리의 자녀들은 비밀을 간직하면서 그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찾기 시작합니다. 이때 좋은 친구를 갖게 되면 건강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또 그렇지 못하면 매우 불안한 성장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거죠.
자, 그 단계를 넘어서면 세 번째, 성인이 됩니다. 이 성숙한 성인의 단계에 있어서는 자기의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부부가 돼요. 저는 부부의 정의 가운데 하나가 비밀을 나눌 수 있는 친구의 발견이라고 생각해요. 내 약점도 나누고 아픔도 나누고 좌절도 나누고 실패도 나눌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부부관계가 아니에요? 특별한 친구죠.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이런 이성 배우자만으로 우리의 마음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어떤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자기 동성관계의 건강한 친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친구들을 통해서, 또 우리는 그 배우자와 함께 건강한 배우자와 함께 건강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인격의 형성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친구가 있습니까?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은 나 친구라고 말하는 이 시점을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의 15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우리 15절을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15절 다같이 시작,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오늘 이 말씀이 “이제부터” 라는 단어로 시작되는 것을 주목해 보세요.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로 삼겠다. 또 그 이유는 내가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고 이제 알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이 12제자를 선택한 그 직후부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소위 비밀을 말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 인자가 되어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비밀들을 나누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생애에 거의 마지막 끝자리 단계에 와서 비로소 가장 중요한 비밀인 십자가의 비밀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있으면 그분이 죽으러 간다고,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십자가의 엄청난 비밀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정말 깊은 친구, 피상적인 친구가 아니라 깊이 있게 삶을 나누는 친구는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친구잖아요. 예수님은 지금 그 비밀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비밀을 말할 수가 있다라는 것은 중요한 하나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 전제는 뭡니까? 신뢰예요.
신뢰의 관계가 없이는 아무도 비밀을 말하지 않죠. 비밀을 말했다가는 큰일나잖아요.
그런데 신뢰 할만하다! 라는 어떤 수준에 도달하면 우리는 비밀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진짜 친구가 되는 거예요. 나만이 가지고 있는 어떤 약점, 내 인생의 실패, 내가 숨기고 있는 내 인생의 갈등, 이런 속 깊은 자기의 내면을 열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되는 것이에요.
어디에서 이런 친구를 구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교회라는 공동체야말로 우리가 좋은 신앙의 친구를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마당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주일날 예배만 왔다 갔다 해 갖고는 그런 친구를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내년부터 굉장히 중요한 목표를 삼고있는 Cell Church화 하자! 이런 운동을 지금 우리 사역자들이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어요. 소그룹에 들어가야 돼요. 소그룹에. 마을 목장이라든지. 혹은 형제 선교회, 자매선교회 우리들의 작은 바이블 스타디의 그룹이, 소그룹에 들어가게 되면, 비로소 그 작은 그룹 안에서 우리가 마음을 열 수가 있잖아요. 그것도 쉽게 열지는 않지요.
믿을 만하다, 그러면 그 시점부터 열기 시작합니다. 내가 내 속에 있는 것을 내어놓아도 내가 비판되지 않고 오히려 이해 될 수 있다, 이것을 확신할 때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비밀한 것들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그때 치유가 일어나요 우리 안에. 건강한 삶이 형성됩니다.
전 교회 나와도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이유, 이런 나눔의 마당을 갖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년부터 우리 교회에서, 만약 여러분이 그냥 주일날 예배만 왔다 갔다 하고 소그룹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러면 인간취급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변화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눔이 없이는 안돼요. 이런 나눔이 없이는. 우리가 자기의 마음을 오픈 하지 못할 때, 열지 못할 때 사람은 더 외로워지고 더 깊은 병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근대 인류 역사에 있어서 저는 가장 불행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아돌프 히틀러”가 아닐까 생각해요. 유태인 600만 명을 죽이는 그런 참극의 주인공이였던 아돌프 히틀러. 그런데 한 히틀러의 전기 작가는 그의 불행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불행은 친구가 없었던 불행 이였다” 친구가 없었던 불행 이였다.
한 전기 작가가 그의 전기를 쓰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났어요. 히틀러의 친구 될만한 사람이 있느냐? 꼭 한 사람을 발견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아주 가까이 지내던 사람, 그래서 히틀러는 이 사람을 매우 중용했습니다. 군수물자의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하고 인터뷰하고 얘기를 했는데 뜻밖에도 그는 이런 얘기를 나중에 남기게 됩니다.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제가 그대로 읽겠습니다. “그에게” 이것은 친구가 한 얘기예요. 그 “엘버트 스피어”라는 히틀러하고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었고 나중에 같이 내각의 참모로 일했던 그 엘버트 스피어 라는 사람이 한 얘기입니다. 그대로 제가 읽겠습니다.
“그에게 즉 히틀러에게 단 한명의 친구가 있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 히틀러는 환상가였고 자신의 카리스마에만 몰두했을 뿐 이였다. 그는 우정에 반응할 줄 모르는 사람이였다. 그는 본성적으로 우정을 거부하였고, 매사에 우리와 공감할 수 있는 것을 의도적으로 그는 피했다. 심지어 그는 우리와 더불어 함께 체리 열매를 먹으며 즐거워하는 것조차도, 그는 거부했다. 우리 모두는 단지 그의 거대한 에고의 투사체에 불과했다. 이 우정을 거부했던 사람, 이것이 바로 히틀러 의 불행 이였다” 라고 그는 지적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나눔이 정말 건강한 우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내면을 열기 시작해야 돼요. 우리 속을 열기 시작해야 돼요. 이러한 비밀을 나누는 우리의 속 깊은 내면을 열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의 우정은 깊은 의미의 우정으로 피상적인 우정이 아니라, 정말 깊은 우정으로 자라갈 수가 있다 라고 성경을 가르칩니다.
지금 예수님이 그 얘기를 나누고 있어요.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비밀을 너희들과 나누겠다, 왜냐하면 너희들은 내 친구이기 때문이야.
우정, 우정의 두 번째 단계. 그래서 우정은 나눔을 통해서만 자라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번째로 “우정이라는 것은 순종함으로 강화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본문은 가르칩니다. 저는 이것을 우정의 세번째 단계라고 말하고 싶어요.
우정이 형성되는 세번째 단계, 우리는 서로 피차에 순종함으로 그 우정을 강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신뢰할 수가 있다면 서로를 따라갈 수가 있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신뢰하는데 안 따라갈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상대방을 믿을 수가 있다면 우리는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함께 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순종의 의미라고 생각해요.
오늘 14절에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어떻게 말씀하세요?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저는 이 말씀이, 주님이 지금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친구이기 때문에 내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한다, 순종을 강요하고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그 분의 말씀 앞에, 아니 그분에게 제자들이 순종함으로써 그 분 자신이 아니라 그 분을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다 라는 것을 지금 제자들에게 설득하고 있는 것이예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운명 공동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는 동일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운명을 함께 할 수 있는 자라까지 나갈 수가 있어야 되겠죠.
그렇다면 거기서 필요한 것은 이제 주님이 주신 그 말씀 앞에 순종함으로서 함께 인생의 길을 같이 걸어 갈려는 진지한 노력이 요청되지 않겠습니까?

현대 선교회에 매우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가운데 한 사람은 중국 내지 선교회에 소속해 있던 아마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허드슨 테일러가 영국으로부터 중국에 파견된 다음에 얼마 되지 않아서 몇 년이 지난 후에 그의 생애 가운데 아주 커다란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갈림길이 찾아왔습니다. 이분은 의욕적인 선교사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개척적인 선교의 프로젝트들을 시행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빨리 가다가 보니까 선교 본부와 이견이 생겼어요. 이견이 충돌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선교 본부에서 드디어 경고장 하나가 날라 왔습니다.
선교 본부를 탈퇴하던가 아니면 지금까지 하던 모든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순종하던가 선택하라!
그래서 그 통지를 받고 허드슨 테일러는 아주 깊은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거의 같은 때에 허드슨 테일러는 또 편지 한 장을 받습니다. 그 편지는 뭐냐하면 영국에 있던 자기 애인으로부터 날아온 편지예요. 그런데 허드슨 테일러가 너무나 모험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삶을 살기 때문에 이런 사람과 내 일생을 같이 할 수가 있을까 불안해 졌어요. 그래서 우리 교제 그만 하자고, 절교하는 편지가 날라 왔어요.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가 아주 깊은 낙심과 절망 속에 빠졌습니다. 그는 선교를 포기하고 싶었고 심지어는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까지 그때 받았다고 술회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허드슨 테일러를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은 그가 그 위기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곁에 친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놀랍게도 나이가 20살이나 많은 사람 이였어요. 선교사였는데 스코트랜드 출신에 윌리암 번스라는 20살 많은 그런 선교사가 그 분 곁에 있었습니다. 이분은 허드슨 테일러를 가만히 보니까 허드슨 테일러가 굉장히 아주 가능성이 많은, 포텐셜(potential)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를 좋아했고,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이 였지만 허드슨 테일러를 열심히 따라 다녔습니다. 이 윌리암 번스가 이 절망과 낙담 속에 빠진 허드슨 테일러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아주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나와 같이 여행을 떠나자!” 그래서 여행을 떠나요. 무려 7개월 간의 중국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의 여기저기를 돌아보고 쉬기도 하고 또 같이 사역하기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면서 허드슨 테일러는 다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 윌리엄 번스라는 이 20살이나 많은 친구를 자처했던 이 사람은 허드슨 테일러에게 그 여행하는 기간동안에 7개월 간 계속해서 말한 것이 두 가지 말이였다고 그래요.
하나는 뭐냐하면 “나는 자네를 믿네” 나는 자네를 믿네, 또 하나는 “나는 말이야 자네를 따라 갈거야” 나는 당신을 믿소! “I trust you” 그리고 나는 당신을 따라가겠네. 이 두 마디 말이 허드슨 테일러를 회복시키는 길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허드슨 테일러에게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그는 결정적인 인생의 위기를 결코 극복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허드슨 테일러는 그런 회고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물론 예수님과 나 사이에 관계에 있어서는 그분에게 어느 정도 절대적인 순종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사이의 관계, 우정에 있어서도 이런 절대적 순종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할지도 모르죠. 저는 결코 순종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그래서 우리가 친구에게 맹목적 순종을 해야 한다 라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친구 사이에도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라도 순종하지 못할 상황 속에라도 순종의 태도는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순종하려는 태도, 나는 자네를 따라갈 수 있다는 태도.
비록 어떤 의견에 우리가 온전한 일치를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사실 순종이라는 단어가 가진 중요한 핵심은 어떤 의견에 대한 100%의 합의만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순종이라는 희랍어 단어에 어근(語根)은 본래 듣는다는 단어에서부터 나왔다고 그럽니다. 듣는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얘기를 잘 귀를 기울여 경청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나는 당신을 존중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 아니예요? 그래서 우리가 잘 들어 주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는 얼마나 외로운 삶을 살고있습니까? 친구는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경청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윌리엄 번스는 허드슨 테일러의 모든 결정에 대해서 100% 그것을 찬성하고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자세히 그 자서전을 읽어보면 나중에 그 여행, 7개월 간의 여행을 통해서 많은 허드슨 테일러의 잘못 생각했던 것들을 교정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윌리엄 번스와 대화를 하면서.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 이예요. 친구를 교정시키기 전에 윌리엄 번스는 외롭고 혼란 되어 있었던 친구에게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줄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예요.
오늘 우리에게는 얼마큼 이렇게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나를 신뢰하고 그리고 내게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친구들이 우리 곁에 있을까요? 저는 이것이 순종의 첫번째 스텝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런 신뢰와 순종을 통해서만 우리들의 우정은 비로소 견고해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마지막으로 우정의 네번째 스텝이 있다면 “우정은 희생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입니다” 우정은 희생으로 완성됩니다. 저는 이것이 우정의 마지막 완성의 단계라고 생각을 해요. 우리가 지속적인 우정의 교류는 우리들의 우정을 마침내 아가페적 사랑의 단계까지 승화시킬 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정의 구조이고 모든 진지한 우정이 마침내 도달해야 할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 얘기를 하고있지 않습니까? 본문이 시작되는 13절 말씀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우리1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그리고 본문이 마지막은 어떤 말씀으로 끝납니까?
17절 우리 다같이 읽어요. 17절 시작,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크다란 사랑이 없다. 이 사랑을 위해서 친구 여러분, 나는 지금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여러분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예수님은 이것을 말씀으로만 한 것이 아니지요? 난 너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가 있다고 말로만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 이 말씀을 한 시점이 어떤 시점이예요?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고 친구들을 위한 죽음을 각오 해 놓으시고 지금 주님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예요.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크다란 사랑이 없다”
그리고 그는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우정은 그 우정을 시험받는 어떤 테스트의 시기를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내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생에서 고난을 만나게 될 때 그때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보십시오. 고난을 만났을 때 내 곁을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것은 친구가 아니지요. 그런 친구들은 벌써 떠나보내 주어야 했을 친구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내 인생에 고난의 순간 그리고 고독의 순간 내가 정말 방황할 수밖에 없는 그 순간 내 곁에 끝까지 머물러 있을 수가 있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위한 가장 작은 희생이라도 진지한 희생의 노력을 보여주고 있는 친구들, 이런 친구들이 인생의 길에 얼마나 우리들의 커다란 힘이 될까요? 그래서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영국 속담이라고 합니다마는 “순경(順境)은 친구를 만들지만 역경은 우정을 시험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인 킬케골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고난을 만나야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알아본다”
여러분이 고난 속에 있을 때 곁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진정한 친구들을 여러분은 얼마나 가지고 있습니까?

세계 제 1차 대전 중에 있었던 실화라고 그럽니다. 미국에 어떤 같은 마을에서 자라났던 두 친구가 같은 때에 이 전쟁에 징집이 되었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친구는 같은 부대에 배치되었고 또 같은 전선에서 싸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 전선 순찰을 나갔다가 갑자기 아군에서부터 격리되었어요. 포탄이 나르기 시작했고 그리고 이 친구는 나른 파편에 부상을 입어 피 흘리고 쓸어 지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멀리서 참호 속에서 바라보고 있던 친구가 견딜 수가 없어서 참호를 빠져 나와 친구에게 달려 갈려고 그랬더니 주변에 있었던 부대원들이 그를 막습니다. 분대장이 그를 막습니다. “가면 안돼 이미 때는 늦었어, 너까지 죽어!” 그러나 분대장이 잠시 시선을 다른 쪽으로 팔고 있는 그 순간 다시 그는 참호를 빠져 나와 그 친구가 쓸어져 있는 그곳을 향해 달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를 들쳐업고 다시 자기 참호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친구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분대장이 화를 내면서, 그것 보라고, 내가 늦었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너까지 죽을 번했다고.
그때 이 사람은 자기 분대장을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분대장님 그렇지만 제가 이 친구에게 다가갔을 때 이 친구는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때 내 친구가 저에게 무어라고 그랬는지 분대장님 아십니까?”, “무어라고 그랬나?”, “내 친구는 헐떡이면서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친구야 나는 네가 나한테 올 줄 알았지.”
친구야 난 네가 올 줄 알았단다. 그것이 친구가 아니겠어요. 이것이 우정이죠.

저는 여러분과 제가 인생의 길을 살아가면서 이런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싶습니다.
이런 친구들과 더불어 가는 인생 길은 얼마나 보람 있는 인생의 길이 되겠어요.
그러나 이런 친구를 만나기 앞서서 나는 어쩐지 친구가 없다 인생이 외롭다, 그렇다면 먼저 여러분은 정말 우리를 친구라고 불러주기를 기뻐하시면서 다가오시는 예수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났는지를 여러분 앞에 묻고 싶어요.
우리는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 나의 구세주이시요, 그리고 나의 주님이시여 그러나 또 하나의 명칭으로 그 예수님을 부를 수 있는지를 여러분에게 묻고싶어요.
“나의 친구이신 예수님” 우리가 찬송가의 가사에서 부른 데로 “죄 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그 분은 내가 그를 선택하기 앞서서 나를 선택해놓고 내게 다가오신 바로 그 분, 그리고 내가 그를 붙드는 순간 하늘나라의 비밀을 나에게 쏟아놓으시면서 나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그 분. 그리고 십자가에서 기꺼이 나의 죄와 고난을 짊어지고 나를 대신해서 죽음을 대신 죽어 주시고 그리고 부활하신 그 분, 내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면서 다가오시는 바로 그 분, 그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은 친구로 정말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 친구를 만나셨다면 이 위대한 친구 앞에 또 이렇게 요청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에게 저의 친구이신 주님을 함께 섬길 수 있는 이 놀라우신 주님을 함께 전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런 좋은 친구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런 친구들과 더불어 우리의 위대한 친구이신 주님을 섬기는 그 놀라운 행복, 그리고 그 놀라운 감격 속에 들어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싶습니다.

세상을 떠나가신 고 함석헌 선생이 시를 많이 쓰셨는데 그분의 시 가운데 최대의 걸작 시는 저는 이 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분의 시를 소개하고 싶어요.
제목이 그 사람을 가졌는가 라는 시입니다.

그 사람을 가졌는가?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 맡기며 마음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너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너 뿐이야 하고 믿어주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탓던 배가 가라앉을 때 구명대를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너 하나 있으니 하며 빙그레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에 예 보다도 아니오 라고 가만히 머리를 흔들어 진실로 충언해 주는
그 한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기도하십시다.
인생의 길이 때로 외롭다고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외로운 인생 길에 우리의 친구가 되기를 자청하시면서 다가오시는 그 분, 네가 알지 못할 때부터 나는 너를 선택했다. 네가 나의 친구 될 것을 선택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버려주시면서 이것이 너를 향한 내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며 인생의 길에 함께 하자고 다가오시는 바로 그 분, 그 예수님을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교회에 나오시면서 그 예수그리스도를 내 친구로 만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 기도해 보세요. 예수님, 내 친구가 되어주세요. 내 주님이 되어주시고, 그 분이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인생 길의 외로움을 극복하고 그 분의 위로와 그 분의 임재로 경험하는 놀라운 행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만나셨다면 또 그 분 앞에 이렇게 매달려 기도해 보십시오. 그 위대하신 친구 되시는 주님을 함께 섬기고 함께 자랑하며 함께 전할 수 있는 그리스도 안에 친구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그래서 인생길 그 모든 외로움이기고 승리 길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저를 도와 달라고 우리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의 구주요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친구 되기를 기뻐하시는 신실하신 그 주님을 오늘 이 시간 만나게 하시고 또 그 주님을 함께 더불어 섬길 수 있는 친구들과 더불어 인생 길의 모든 허무를 이기고 삶의 아름다운 승리를 선포할 수 있는 인생이 우리의 인생이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오늘 우리는 우정의 축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우정의 축복을 그리워합니다. 우리의 위대한 친구 그리고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그 주님으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는 이 진정한 우정의 축복을 흠모합니다. 오늘 이 우정 때문에 목말라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다가 오시사 친구 되어주시고 또 이 주님을 함께 섬길 수 있는 친구들을 허락하시므로 예수님 때문에 인생의 길은 결코 외로울 필요가 없다고 고백하고 찬양하며 걸어가는 복된 삶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 다 기립하셔서 우리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으신 신실하신 친구 되시는 주님을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