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곤목사 (온유한교회)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기도할 때 눈을 감게 됩니다. 왜 눈을 감고 기도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어릴 적에 교회에 가서 기도할 때 눈을 뜨고 있다가 전도사님이 제 뒷통수에 대고 아주 세게 꿀밤을 주신 일이 있어서 그때부터 저는 눈을 뜨고 기도하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습니다. 아마 그 당시 전도사님은 우리가 눈을 뜨고 장난치는 것을 우려하셔서 그렇게 꿀밤을 주신 줄 압니다. 그런데 그 이후 기도하려면 반드시 눈을 감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눈을 뜨고 기도하라고 하면 말문이 딱 막혀 버립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사님들은 늘 말을 많이 하시고 사람들 앞에 서셔서 설교를 하시니까 사람들 앞에 서는 것에 대해 별로 두려움도 없고 떨리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몰라도 사실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떨립니다. 그런데 여러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떨리는 것을 감추는 기술이 여러분보다 좀 더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기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말을 많이 하시는 목사님이시니까 기도에 대해서도 입만 열면 청산유수와 같이 기도를 잘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눈 뜨고 기도하라고 말하면 아마 말을 떠듬 떠듬 거릴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 것인지조차도 생각이 잘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어떻습니까? 먼저 주님은 기도하기를 참 즐겨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뿐 아니라 그 당시 바리새인들도 기도하기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의 기도와 주님의 기도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기도는 주로 자기 만족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세리의 기도와 함께 비교된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기 자랑과 만족을 근거로 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는 그런 자랑의 요소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기도 했지만 그 속에 자신의 마음을 담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씀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여기에 '민망하다'라는 말은 '불안하다'란 뜻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지금 불안해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이 불안에 빠져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어떻게 하실지 주님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불가사의한 일에 대해 소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확인 비행물체의 존재 여부에 대한 것이라든지 아니면 고대 이집트에서 사람을 미이라로 만드는 과정이라든지 사람의 머리나 과학으로는 잘 증명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규정을 하고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보여주곤 합니다. 물론 그런 일도 불가사의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정말 불가사의 한 것은 하나님께서 화를 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화를 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를 내신다고 말하면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하나님은 화를 내실 수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그 아들은 아버지가 어떠하신지 그 마음의 상태, 분위기,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화를 내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다른 것은 몰라도 죄에 대해서만큼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화를 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화를 당하게 하고 우리들에게는 화를 내시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죄를 지은 사람들은 마음이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죄가 크면 클수록 불안은 더욱 큽니다. 엄청나게 큰 죄를 지은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죄 값을 치루어야 할지 생각하느라고 극도의 불안에 빠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형수들은 이미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의 번호가 불리워지면 극도로 불안한 증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사형장으로 자신이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거의 탈진상태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인간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자신이 이 땅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인간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최고조로 달해 있으며 그 진노를 자신에게 지우려 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 죄를 감당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 다가왔을 때 그 마음에는 이미 죄인들이 경험하는 극도의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여 제대로 말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도저히 기도하지 않고는 그 상황을 감당키 어려웠습니다. 마음이 떨리고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 같아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죄 때문에 이처럼 극도로 불안해 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너무도 뻔뻔합니다.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정작 죄 지은 당사자인 우리들은 너무도 편하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조차도 없이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때로는 그 죄로 인해 불안함과 두려운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어떤 부인은 시어머니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것을 나름대로 참고 또 참으면서 시집살이를 해 왔는데 그로 인해 늘 마음속에는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긴장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수년간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주눅이 들어버렸습니다. 이런 경우 이제 시어머니가 있건 없건 그것과는 상관없이 이 며느리는 늘 긴장속에서 살게 됩니다. 밖에 나가서도 오랜시간을 있을 수 없습니다. 늘 무엇엔가 쫓기는 듯 집에 들어오게 되고, 조금이라도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면 불안하여 늘 무엇인가를 해야만 합니다.

또 발자국소리만 들려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납니다. 이런 정도의 긴장감을 가지게 되면 이것은 병입니다. 극도의 불안과 좌절감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시어머니가 계시지도 않는데 그렇게 불안해하고 안절부절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당사자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이런 경우라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합니다.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감정이 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불안이란 겨우 이 정도입니다. 주님이 느끼는 불안이나 두려움과는 다릅니다. 물론 인생을 살면서 긴장을 하지 않는다면 자칫 잘못된 길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긴장을 하는 것은 여러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늘 긴장해 있고, 그 일로 인해 생활자체가 정상적인 생활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죄로 인해 심한 영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죄가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자신의 아들인 예수님께 물으려 하십니다. 그리고 그 분의 진노가 어떤 것인지 주님은 아십니다. 죄 지은 우리들은 그 진노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모르는데 반해 주님은 너무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여기서 주님의 고뇌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진노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기에 그 일을 감당한다는 것도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주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피하게 해 달라는 부탁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있으며 감당해야 할 일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7절 하반절에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때를 면하게 해 달라'고 하신 것은 완전히 이 고통을 없애달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신이 온 것이 바로 이 때를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아버지 앞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즉 단지 고통때문이라면 주님은 얼마든지 스스로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난해 우리는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와 연결해서 주일에 장기기증에 대한 얘기도 듣고 실제로 40여명이 기증에 서약을 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분들은 사후 기증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 중에 누군가가 이렇게 결정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사후에 기증하는 것보다 살아있을 때 기증하면 더 의미가 있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신문을 통해 장기 기증이 절실한 사람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그 사람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조직검사를 했더니 마침 조직까지도 일치하고 수술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마음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막상 모든 검사가 끝난 상태이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수술동의서에 도장을 찍고 수술대에 눕기만 하면 됩니다.

며칠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갈등을 했지만 용기를 내어 수술대에 누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너무 심리적인 부담과 고통이 큽니다. 마음이 불안합니다. 자칫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생깁니다. 짧은 순간이지만 온갖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 오면서 도저히 수술대에 누워 있을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서 의사에게 말합니다. "선생님! 도저히 수술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돌아가겠습니다."

그 한마디로 그에게 다가온 고통과 두려움은 끝이 납니다.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이 사람은 자기가 말한 것 때문에 좀 창피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싫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물론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럴 바에야 처음부터 기증한다는 말을 하지 말지"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결정에 대해 아무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증하고 하지 않고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원하시기만 하면 얼마든지 이 고통의 때를 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아버지께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어차피 스스로 그 고통을 감수하려 하셨다면 굳이 아버지께 그 고통을 호소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신 예수님께 인간을 향한 모든 진노를 쏟고 계신다할지라도 이런 자유까지 박탈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자신이 짊어져야 할 이 고통이 얼마나 견디기 어려운 것인지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토록 아프니까 그것을 알아달라는 표현은 아닙니다. 가끔 아이들은 자기가 아플 때 아픈 것 이상으로 가장을 해서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확인하려는 의도가 있거나 아니면 더 많이 사랑해 달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런 의도도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끝까지 감당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본문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지금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스러워지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죄인들의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장 최고로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이 일을 통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타낼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예수님의 기도와 추수감사'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사실 계절로 보면 추수감사와는 거리가 먼 절기입니다. 이미 농부들은 추수를 끝냈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의 사람들에게는 추수감사라는 말이 과거만큼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 추수감사의 날에 무엇으로 그 의미들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느 날 주님께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잡지 못하고 허탈해 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다가가셔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고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고백이 무엇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은 베드로의 그 말을 듣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주님은 고기를 잡던 베드로에게 사람을 이후로는 사람을 취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추수의 날에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이후로 네가 사람을 추수하리라' 왜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가장 최고로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원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입술을 통해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무리 사람들에게 자기 아버지를 자랑하며 다녀도 정작 그 아들이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아버지는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영광을 얘기하며 다닌다 하더라도 그분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찬양과 영광이 진정한 찬양과 영광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영광스럽게 되는 것은 죄인들이 그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 때문에 자기의 아들을 희생시키셨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왕이 자기 원수들을 위하여 자기 왕자를 희생시킵니까? 아니 그 모든 원수들을 자기 아들로 삼아서 왕자와 똑같은 대우를 해주는 왕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들이 누굽니까? 모두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나 조건이 우리들에게는 없습니다. 더구나 죄의 용서에 관해서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내 놓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뿐만아니라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왜 전도를 말하며 영적추수를 말하는 것입니까? 왜 태신자를 작정하고 대각성 전도집회를 계획하는 것입니까? 그 일이 하나님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은 주의 백성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내 주위의 모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저하고 계십니까? 아직도 태신자를 작정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을 남의 일처럼 여겨지십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인들의 구원을 통하여 이 죄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28절 하반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아들이 원하는 것이 이것이라면 하나님께서도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시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뿌듯할까요? 사실 이것은 아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있는 아들을 보면 얼마나 기쁘고 대견스럽겠습니까?

저녁 9시 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저희집 아이들의 경우 저녁시간은 언제나 저희들끼리 있어야 합니다. 집을 나오면서 아이들에게 당부합니다. "아빠 엄마가 교회 다녀올 동안 텔레비전 보는 것 되도록이면 자제하고 공부를 하든지 책을 읽든지 유익한 시간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기도회를 마치고 오면 텔레비전이 켜져 있고 방이란 방에 불은 다 켜져 있고, 뭘 했는지 집안이 시장터 같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기도하고 와서 은혜 충만했던 마음이 짜증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리고 야단을 칩니다. 그런데 어느날은 그런 얘기를 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도 흐트러진 것이 없습니다. 방마다 불을 켜 놓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들 각자의 방에 가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얼마나 대견스럽습니까? 그때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빠 오늘 기분 너무 좋은데 너 원하는게 뭐냐?'라고 말할 것입니다. 뭐든지 원하는 것이면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 땅에 왔는지, 그리고 지금이 어느 때인지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다'라고 말씀하셨고 하나님은 '내가 이미 영광스럽고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일을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일에 무관심합니다. 누가 구원에 대해 처음부터 관심을 가졌습니까? 그저 우리의 관심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 잘 벌고 높은 자리에 앉고 큰 소리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주된 관심사입니다. 자식을 낳아서 좋은 학교에 보내고 세상적으로 성공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시대가 악하고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곁길로 가더라도 반드시 구원할 자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있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말이 무엇입니까? 더 이상 한국교회는 부흥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한국교회는 침체에 빠졌다고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왜 그런 현상들이 나타납니까? 교회가 안정이 되면서 영적추수에 깊은 관심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영적추수를 위해 정열을 쏟지 않아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관심은 주로 내 생활의 어떤 유익이나 현실적인 문제에 쏠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믿지 영적추수의 현장에 나가 어떻게 하면 죽어가는 영혼을 주께로 인도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드시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많은 교회들이 안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뛰려고 발버둥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대각성 전도집회를 계획하고, 지금까지 기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시겠다고 선포하신 뜻에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예배당 건축에 많은 정열을 쏟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세우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추수감사주일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너무도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을 때 모든 사람들이 의미를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알아듣지 못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제자반이나 성장반 모임에서 시작 전에 주일설교를 통해 받은 은혜들을 나눕니다. 사실 받은 은혜는 각자가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설교의 핵심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에서 은혜를 받으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어쨌든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제가 은혜받은 얘기를 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씀을 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인지는 몰라도 성장반이나 제자반에서 저와 함께 말씀을 나누는 분들이 별로 깨달은 것도 없는데 어쩔 수 없이 은혜 받은 얘기를 하시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모든 분들이 말씀을 잘 알아듣고 또 은혜 받아서 그 말씀을 실천해 보려는 의지를 가지면 좋겠지만 아마 여기에 앉아 계신분들 중에는 제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아직 잘 깨달아지지도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또 제가 매주일 요한복음으로 강해를 하니까 어떤 분들은 제 설교가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가끔 있으십니다.

그저 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하고, 재미있는 예화를 가지고 이리 메치고, 저리 메쳐서 잘 요리하여 전하면 재미 있을텐데 그것도 아니고, 그래서 마음의 문이 닫혀 있는 분들도 있을 줄 압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지금 저의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정말 재미없는 우뢰의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30절에서 32절까지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이제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난 것은 예수님에게 또 다른 확신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확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충분한 확신 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승리로 비춰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세력다툼에서 패배한 사람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완전한 정치적 패배였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음성이 필요했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이 잘 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승리의 죽음이요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사건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어떻게 죽음이 승리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사람들이 승리한 것이지, 그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이 어떻게 승리자가 될 수 있느냐? 고 말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그들의 생각은 옳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에서 볼 때 승리는 영광을 동반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올림픽에서의 승리는 금메달이라는 영광이 주어집니다. 월계관이 씌워집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영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고통과 그 고통으로 인해 죽어가는 한 사람의 처절한 절규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는 사람이 '승리'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들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며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정말 어려운 결단을 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 우리의 내면에서 추구하는 승리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사람들과 동일한 영광과 승리를 맞보며 살아가려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일을 위해 내 인생을 투자하고 헌신하는 일에 주저함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겉으로 보았을 때 그곳은 실망과 좌절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괴로움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패배와 절망의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엔 영광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겠노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주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까? 왜 그 엄청난 고통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온 세상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끌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겠습니까? 농사도 지은 일이 없는데 농부의 심정으로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할 수 있습니까? 사실 저는 한번도 농사를 지어본 일이 없습니다. 농촌에서 살아본 경험도 없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며 우리가 먹는 곡식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뉴스에 의하면 올해 쌀 생산량이 23년만에 최저라는 소식을 접해 듣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타까움이 농사를 직접 짓는 농부의 마음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영혼을 향해 안타까움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사람들은 이런 일에 안타까워하지 않습니다. 또 주님의 마음을 읽어드리지 못하는 사람도 별로 안타까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세상왕은 더 이상 사람들을 지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비춰지기만 하면 마귀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고 쫓겨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세상 것은 모두 쫓겨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무엇을 위해 기도하셨는지 그 내용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추수감사주일에 나는 어떤 삶을 살기로 결단해야할 것인지 깨닫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