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순목사 (그리스도 사랑의 교회)

양과 목자의 관계 속에서는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않고서는 양이 스스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물이라고 하면 우리나라는 물이 흔하기 때문에 골짜기가 있고 저수지도 있고 논밭에도 물이 있지만 유대사회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오죽해야 모세가 애굽을 떠나서 미다안 광야에 갔을 때에 물이 없어서 여러 가지로 양떼들에게 물을 먹이는데 어려움을 볼 때에 모세가 도움을 주어서 그 삶의 살아가는 수단이 되었던 것도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은 어떤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고 계시는가 하면 수전절에 솔로몬 행각을 다닙니다. 수전절이란 어떤 절기가 수전절인가 하면 이스라엘은 수리아 사람의 통치에 성전이 패망해서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 속에 있을 때에 유다의 마카비아가 그 성전을 회복해서 다시 헐었던 것을 보수해서 기쁜 마음으로 성전을 복원한 것을 기념해서 이스라엘은 수전절을 지켜 왔습니다. 이 수전절에는 어떤 행사를 했는가 하면 등을 환히 밝힙니다. 등을 밝히면서 이렇게 절기를 지키는 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우리가 성전을 잃어 버렸던 것을 성전을 회복해서 어두운 악의 세력은 물러가고 광명한 빛의 세계 아름다운 하나님의 세계가 비춰 진다고 하는 신앙적인 의미에서 등불을 밝혔던 것이 수전절에 그들이 행하는 행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절기가 있습니다. 가장 큰 절기가 여러분이 잘 아는 오순절입니다. 오순절 절기를 가장 큰 절기로 삼았던 것을 봅니다.

이제 오늘 예수님께서 이 수전절에 솔로몬의 행각을 다닐 때에 유대인들이 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는 당신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고 왜 우리의 의구심을 풀어주지 아니하느냐? 라고 하는 이런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묻는 요구는 당신이 참으로 우리가 기다리는 구원자이면 우리에게 구원자임을 보여 주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하는 이러한 의식에서 물음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앉은뱅이를 고치시고 장님을 눈 뜨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려내고 사람으로서는 행할 수 없는 놀라운 기사와 이적을 베풀면서 저들에게 말씀으로 당신이 오신 구원자임을 설명하시면서 증거 하시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말씀하는 예수님을 이들은 지금도 의구심이 있어서 그가 구원자임을 알지 못하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배우지 못하고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성경적 지식으로는 예수는 구원자가 아니라고 하는 이러한 의식구조가 그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능력을 행해 보여도 권능을 행해 보여도 뿐만 아니라 말씀을 하면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예언을 성취시키는 데에도 저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알지 못한 것은 저희의 눈은 가리웠고 저희의 귀은 막혀 있었습니다. 저희의 눈은 가리웠고 저희의 귀는 막힌 것은 육신의 안목이 가리웠고 육신의 귀가 막힌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는 관점이 틀렸기 때문에 잘못 된 관점으로 예수를 바라볼 때에 아무리 보아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자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참으로 안타깝고 가련한 신세가 되었던 것이 당대의 종교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은 이렇다고 하고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각각 다른 얼굴의 형태를 하고 이 예배당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한 말씀대로 예수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나는 아니겠지요.’ 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바로 믿고 있고 바로 알고 있고 나만큼은 참으로 알고 있다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우리는 신앙생활 합니다. 우리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참이고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참이라 할지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아서 내 신앙이 내 믿음이 잘못 되었을 때에는 돌이키는 것이 회개하는 사람이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교만과 겸손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만과 겸손과 다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잘난 체 하고 뻣뻣하고 남을 무시하고 이것을 교만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교만하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교만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알고 있고 잘못 믿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아멘하고 자기 자신의 모순을 회개하고 교정하는 사람이 바로 겸손한 사람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미련한 것을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그 미련은 절구통에 놓아서 그 미련을 찧는다 할지라도 그 미련이 벗겨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람이 한번 구부러진 사람 이것은 육신적으로 구부러진 사고가 아니라 영적으로 구부러진 것은 펼 수가 없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겸손한 자가 되어야 됩니다. 우리의 목자가 누구입니까? 강단에서 설교하는 제가 목자입니까? 저는 결코 목자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의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목자인 것입니다. 참 목자는 양에게 꼴을 줄 수 있어야 됩니다. 양에게 꼴을 줄 수 없는 것은 목자가 아닙니다. 혹 양의 꼴이 무엇이냐? 말씀을 주어서 먹게 하지 않느냐? 라고 합니다. 여러분 말씀을 먹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는 꼴은 영원한 생명이요 성령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은혜는 목사가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목자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목자입니다. 그러면 이제 목자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그 목자인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우리의 삶과 윤리와 도덕의 규범을 말씀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 많은 능력과 기사와 권능을 보이셨고 뿐만 아니라 친히 십자가에 고난 당하시고 장사 한지 삼일만에 부활 하셔서 오백여 문도에게 나타나 보이시면서 우리의 부활을 약속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주님은 오셔서 역사 하시고 말씀하시고 지금도 성령으로 여기 오셔서 우리에게 역사하고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으로 이해하고 사람의 생각으로 받아들여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느니라"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무엇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습니까? 우리의 육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에 고난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이 시간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마실 것도 입을 것도 아닙니다. 진작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의 아버지의 나라에 갈 때에 반드시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받지 않고서는 아버지의 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 받는 것은 내 스스로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어서 영원한 생명을 내가 받을 때만이 아버지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는 목적이 분명해야 됩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분명하지 아니한 것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직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과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고 우리로서는 해결 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어떻게 참여하느냐?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 나를 따르려거든", "예수를 따르려거든" 우리는 예수를 믿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첫째로 자신을 부인하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는 주요 나는 나요 주와 나와 따로 따로가 아닌 나는 주께 예속된 주님과 나는 주 종의 관계가 되는 것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것도 여러분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초보적인 신앙입니다. 점점 신앙이 깊어지고 믿음으로 온전히 돌아선 사람의 기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을 알기를 원합니다. 이제 나는 주의 종이오니 어찌 종의 뜻대로 내가 살기를 원하나이까? 주여 나를 주의 도구로 사용해 주옵소서! 오직 주님이 영광 받는 것이 나의 기쁨이요 주님이 모든 것 이루시는 것이 오직 나의 바램입니다. 라고 하는 이러한 자기 부인하는 신앙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 말씀합니다. "각기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오늘 현대 사회 그리스도인들은 편안한 예수 믿는 생활을 원합니다. ‘개척교회는 부담스럽다!’ 라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반드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부담을 갖는 것이 정석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왜? 부담을 가져야 됩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가 여러분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또 여러분의 고난을 통해서 함께 고난을 나누었다 한들 여러분에게 어떤 효험이 됩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고난당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반드시 이 복음의 사역을 위한 부담을 반드시 져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담스럽고 약간 어려움이 오면 뒤로 물러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의 뜻대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 소년 다윗을 보십시다. 다윗이 돌팔매질을 잘 했기 때문에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습니까? 아닙니다. 오직 다윗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믿음의 결과로 골리앗을 넘어뜨리게 만든 것입니다. 골리앗과 싸워 다윗이 이길 수 있었습니까?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골리앗을 대항하기 위해 나아가는 자체가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가지라고 오늘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자꾸 나타나는 현상과 상황만 놓고 어느 때까지 우리를 의심나게 하려 하십니까? 라는 이러한 물음을 묻는 것을 보십시오. 이것은 믿음의 물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질 때 변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참고 묵묵하고 주님 가신 그 발자국을 나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가면서 주님 그 고난을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의 신앙으로 승화 되어 갈 수 있는 이러한 마음의 자세가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나를 인하여 목숨을 버리고자 하는 자는 얻을 것이요 제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 고 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람의 그 모든 의식구조와는 정 반대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생명을 말하는 생명은 우리가 아는 목숨, 쉼 쉬는 이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지막 주님으로부터 입어야 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들으십시다. 목자의 음성은 어떤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이 되십시다. 예수님의 양이 되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그 놀라운 은혜의 말씀에 아멘하고 그 말씀이 믿어지고 그 말씀대로 행동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이성으로 아는 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성적으로 아는 것은 행함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어서 목자의 음성을 들을 때에 우리에게는 믿음대로 행함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다하나 행함이 없는 것은 그 믿음 자체가 인간의 이성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적으로 아는 것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는 예수님 말씀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도대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 어떤 사람은 선지자 혹은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그럼 도대체 너희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라고 아느냐?" 라고 할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고 베드로는 아주 명료하게 대답을 합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대답하고 알았던 것은 믿음으로 안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총을 입어 안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앎이란 것입니다. 이성적인 앎, 인지적인 앎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에게 어려운 상황이 올 때는 반드시 믿음으로 서 있지 않고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듣고 십자가에 고난당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주여! 그리하지 마시옵소서! 주님에게는 그러한 일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대화 속에서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결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이성적인 앎이라고 하는 것은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목자를 아는 것은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도 믿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알 때는 그 믿음에는 반드시 따르는 행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편안하기를 원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 것에 감사하고 십자가가 오히려 내게 큰 은혜가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왜? 영원한 생명의 오묘한 진리의 이치가 십자가의 도에 있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항상 감사하고 그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현대 용어로 말하면 이것이 올바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교사가 되는 이 직임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가 되어 있는가? 라고 하는 이 자체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되어지지 않다면 목사가 된 들 장로가 된 들 집사가 된 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주님 말씀한 말씀대로 나 마지막 날 도무지 너희를 모른다 하리란 그 부류에 속한 불행한 사람에 속한 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합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 우리에게 약속한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영생은 우리가 숨을 쉬는 이러한 생명이 아닙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나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목자와 양의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한 말씀에 내 양은 나의 음성을 알고 나의 음성을 들으므로 또한 주님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주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가르치기 위해서 이 시간도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치를 아십니까? 이 영원한 생명의 소중성을 아십니까? 이 영원한 생명의 소중성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 주께 기도하십시오. 주여! 나는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 영원한 생명의 가치와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모르고 있사오니 주여 내게 은총을 내리시어 영원한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바로 깨닫게 하시어서 내가 주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사랑한 것처럼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주님과 사랑의 관계가 이루어질 때 주님의 십자가는 고난의 십자가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게 은혜의 십자가요, 감사의 십자가요, 생명의 십자가로 바꾸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될 때에 주는 주요 나는 나가 아니라 주와 합하여 한 영을 이루어 주님 말씀한 말씀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은혜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사랑을 지켜 그 사랑 안에 거한 것처럼 오직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면 그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단순한 우리의 관계 속에서 사랑이 아니라 오직 이 영원한 생명을 주님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 믿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일서 2장 25절에 보면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은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 우리에게 말씀한 목자의 음성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이 시간도 우리에게 말씀주시고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새기시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