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 목사 (와싱톤 한인교회)

1.

언젠가 저는 신문을 읽다가 가슴이 저미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날 아침에 저를 무너지게 했던 기사는 조지아 주 패터슨 시(Patterson, Georgia) 에 사는 애쉴리 블록커(Ashley Blocker)라는 일곱 살 난 여자 아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 아이가 8개월 되었을 때, 눈 한 쪽이 부어오르고 충혈되어, 부모가 의사에게 데려갔습니다. 의사가 애쉴리를 붙들고 눈을 억지로 뜨게 한 다음에 안약을 넣어주었습니다. 그 때 의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안약의 느낌으로 인해 자지러지게 울어야 정상인데, 이 아이는 눈에 안약이 들어갔는데도 방글방글 웃고 있는 겁니다. 이상하게 여긴 의사는 여러 가지의 테스트를 해 보았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어, 전문 병원에 보내어 검사를 계속했습니다. 결국, 애쉴리는 Anhidrosis 혹은 CIPA라는 이름의 희귀병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질병은 현재 세계적으로 파악된 환자만도 몇 백명이 되지 않는, 아주 희귀한 질병이고, 따라서 그 원인도, 치료 방법도 알지 못합니다. 몸의 다른 기능은 전부 정상인데, 뭔가 잘못되어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질병입니다.

저는 그 부모의 고통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끊임없이 발생하는 사고들을 뒷수습하며 살아야 하는 그분들의 아픔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픔을 모르는 그 여자 아이는 밤에 자면서 입술을 물어뜯어 아침에 피투성이가 되기도 하고, 뜨거운 그릇을 가지고 놀아 화상을 입기도 하고, 손가락을 물어뜯어 상처를 내기도 합니다. 뛰어가다가 넘어져 깨지고 멍들어도 일어나 웃고 있는 딸을 보는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해 보니, 마음이 져며왔습니다.

그 기사를 일고 나서야 저는 알았습니다.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축복이구나! 우리는 모두 아픔을 피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래서 때로는 진통제(pain-killer)를 먹고, 때로는 마취를 하고, 때로는 술에 취해 보기도 합니다만, 진실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축복이 아니라, 아픔을 느끼는 상태가 축복이라는 겁니다. 제 몸이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제 몸이 건강하다는 징조이고, 제 마음이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제 영혼이 건강하다는 징조입니다. 제가 사람답게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이 여기에 미치니 생각나는 사람이 또 하나가 있습니다. 올해로 네 살 난 여자 아이입니다. 생후 8개월때 당한 교통 사고로 인해 척추를 다쳐, 가슴 아래 부분이 완전히 마비가 된 아주 예쁜 여자 아이입니다. 우리 교회 교우의 자녀입니다. 주의 깊게 보시면 주일에 그 아이를 예배당 어디에선가 볼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그 댁에 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반신 마비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라고, 그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몸의 어느 기관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도, 본인 자신이 통증을 느끼지 못하므로 적시에 조치를 취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큰 근심의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2006년 1월 17일에 이 아이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특수 병원에서 특수한 치료를 시작합니다. 얼마 전에 타계한 '슈퍼맨'의 히어로 크리스토퍼 리브스(Christopher Reeves)가 시도했던 동일한 치료입니다. 의사들은, 시도해 보기는 하되, 큰 희망을 걸지는 말라고 충고한답니다. 그러나 이 치료를 기도로 준비하고 있는 그 가족의 바램은, 다만 아픔을 느끼는 감각만이라도 살아나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 치료가 시작될 즈음에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 작은 희망을 위해 온 교회가 기도로 힘을 모았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허락해 주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의 수고는 다해야 할 줄 압니다.

2.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인생에 큰 문제라면, 그 반대로, 아픔을 관리하지 못하는 것도 또한 인생에 있어 큰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의 심리 상태는 아주 복잡하여, 때로는 아픔 자체를 즐기는 질병에 빠질 수 있습니다. 아픔을 느껴야 할 일에 아픔을 느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일에 아픔을 느끼거나, 한 번 받은 아픔을 품에 안고 살거나, 정도에 지나치게 아파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아픔은 필요한 만큼, 필요한 기간 동안 느껴야 약이 되는 것이지, 과도하게 반응하거나 지나치게 오래도록 품고 있으면 오히려 병이 됩니다.

제 가정사를 말씀 드리는 것에 대해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딸 아이가, 시(poetry)가 마음에 잘 와 닿지 않는다고 해서, 같이 있는 시간이면 가끔 제 눈에 들어온 시를 읽어주고 "느낌이 어떠냐?"고 묻곤 합니다. 저도 바쁘고 그 아이도 제 일로 바쁘니까 그럴 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될 수 있는대로 그렇게 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시와 친해지지 않고야 어찌 인생을 알랴?"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얼마 전, 제 눈에 들어온 작자 불명의 시가 있었습니다.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벼르고 있다가, 기회가 되어 딸아이에게 읽어 주었습니다. 이런 시였습니다.

슬픔은 주머니 속 깊이 넣어 둔 뾰족한 돌맹이와 같다.
날카로운 모서리 때문에
당신은 이따금 그것을 꺼내 보게 될 것이다.
비록 자신이 원치 않을 때라도.

때로 그것이 너무 무거워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 힘들 때는
가까운 친구에게 잠시 맡기기도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머니에서
그 돌맹이를 꺼내는 것이 더 쉬워지리라.
전처럼 무겁지도 않으리라.

이제 당신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때로는 낯선 사람에게까지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은 돌맹이를 꺼내 보고 놀라게 되리라.
그것이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걸 알고.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의 손길과 눈물로
그 모서리가 둥글어졌을 테니까.

(류시화 편, "슬픔의 돌"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 처럼', 19쪽)

동감이 가지 않습니까? 마음의 아픔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가벼워지고 마모되는 법입니다. 지금 당장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도, 시간이 흘러가면서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십니다. 그 아픔이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지만, 그것이 전과 같이 마음의 짐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중, 혹시 지금 당하고 있는 아픔이 너무 커 보이는 분이 계십니까? 조금만 견디십시다. 이 시편의 마지막 구절처럼, 어느 날 당신은 그 아픔의 돌맹이를 꺼내 보고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도 고통스럽던 그 돌이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것을 알고 놀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이 시를 딸에게 읽어주고는, "그래, 느낌이 어떠냐? 이 시에서도 아무 것도 못 느끼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딸이, "오, 그 시는 괜찮은데. 뭔가 왔어!"라고 대답합니다. 반가워서 되물었습니다. "뭐냐? 뭐가 왔냐?" 딸이 대답합니다. "글쎄, 꼭 말할 수는 없지만, 뭔가 왔어." 그러더니, "그런데 갑갑해!"라고 덧붙입니다. 제가 "뭐가 답답해?"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답합니다. "아니, 그 돌맹이를 꺼내 길바닥에 버려 버릴 것이지, 왜 닳아빠질 때까지 그걸 가지고 만지작거려? 아, 갑갑해! 정신 차리라고 한 방 넣어주고 싶어!"

저와 집사람은 이 말에 뒤집어졌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웃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아이의 말에 진리가 담겨 있음을 알 것 같았습니다. 실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꺼내 버려도 상관 없는 아픔의 돌들을 들고 다니면서 만지작 거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참으로 작고 큰 아픔의 돌들을 몸 곳곳에 깊이 숨겨두고, 때때로 그것을 꺼내 만지면서 아픔을 즐깁니다. 버려 버리면 그만인 것을! 혹시, 여러분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아픔의 돌들 중에 이제 그만 꺼내 버려도 될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버릴 수 있으면, 미련을 갖지 마시고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끝내 버릴 수 없는 아픔의 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가 나왔겠지요? 제 딸이 아직 아픔이 뭔지 모르니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제게도 버릴 수 없는 아픔의 돌들이 있어서, 가끔 악몽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버릴 수 없는 돌들은 그냥 지니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무겁고 아프겠지만, 언젠가 그 돌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서 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3.

그렇습니다. 아파야 사람입니다. 아프니까 사람입니다. 아파할 줄 알아야 사람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능력자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아파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분 자신 때문에 아파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때문에 아파하십니다. 왜 우리 인간 때문에 그분이 아파하십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아파하십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픔을 달게 받겠다는 태도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당하는 아픔을 거부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의 본질은 아픔입니다.

창세기 6장 6절에 보면, 인류가 저지르는 온갖 죄악을 보시고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15장 5절에 보면, 죄악으로 인해 망할 모압 나라를 두고 "가련한 모압아, 너를 보니, 나의 마음까지 아프구나"라고 탄식하십니다. 요엘서 2장 18절을 보면, 메뚜기 떼로 인해 황폐해진 땅을 두고, "그 때에 주님께서 땅이 당한 일로 마음 아파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시고 멀리서 팔짱 끼고 구경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 깊이 관심을 두시고 우리가 울 때 함께 아파하시고 우리가 웃을 때 함께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픔이 가장 절절히 배어난 본문이 오늘 읽은 출애굽기 3장에 나옵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7절입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히브리 말에서 '안다'는 말은 '경험하여 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아픔을 겪으셨다는 뜻입니다. 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는 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우리들은 어려운 상황에 빠져서 아픔을 당할 때, 대개 두 가지의 가능성을 상상하곤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셨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누구나 죄의식은 있기 마련이어서, 어느 정도까지는 수긍합니다. 하지만 고통이 깊어지기만 하고 해결책이 보이지 않을 때는 저항하게 됩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하나님은 나를 이토록 못살게 하시는가?"라고 묻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편 22편에 있듯,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자주 "주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4백년간 노예살이를 하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얼마나 원망했겠습니까? 아마도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지은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이 자신들을 버렸거나 벌하고 계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아파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십니다. "이 아픔을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너를 보내니, 네가 가서 네 백성을 해방시키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께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는지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다." 이집트 땅에서 노예살이 하면서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픔을 견디다 못해 모세를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와 암흑과 죽음 속에 신음하는 우리 인류의 아픔을 견디다 못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행으로 인한 하나님의 아픔이 어찌나 컸던지, 외아들을 희생할 정도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토록 아파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픔, 하나님의 근심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분은 아픔이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다니셨습니다. 그분의 사역은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그 아픔을 치유하는 데 집중되었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불행을 보고 여러 번 우셨습니다. 기록된 것만으로도 여러 번이니, 실제로는 자주 우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불행을 깊이 보셨고, 같이 아파하셨고, 그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그분의 사랑이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아픔에서 나오고, 아픔은 사랑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분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5)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이런 배경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4.

오늘 우리는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상고해 봅니다. 맹인의 아픔 앞에서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뉩니다. 한 편에는, 그의 아픔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의 질병의 원인을 두고 토론을 하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다른 한 편에는, 그 사람의 아픔을 깊이 들여다 보고 그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은 두고 두고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절에서 5절에 이르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그에게서 드러내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일을 낮
동안에 해야 한다.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것이 문제 투성이의 인생을 두고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이 드러나도록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아픔을 우리 마음에 품고, 그분이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두고 가십(gossip) 거리고 만들어서도 안되고, 그 아픔에 대해 거창한 신학적 토론을 하는 것으로 그쳐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비인간적인,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장으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 아픔을 함께 느끼고,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너는 무엇이 아프니?" 탤런트 정애리씨가 오랜 동안 사회 봉사 활동을 하며 느낀 생각들을 정리하여 '사람은 버리는 게 아니잖아요'라는 책을 냈습니다. 저는 연예인들의 간증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얼마나 믿어야 할지, 얼마나 진실한지, 가늠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의 보육원을 17년 동안 매 주일 방문하여 섬긴 사람의 이야기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하다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책에는 진심이 느껴지는, 감동적인, 아픔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책의 말미에 정애리씨는 스스로에게 자주 "너는 무엇이 아프니?"라고 묻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 편으로 자신을 아프게 하는 버려진 아이들의 불행에 응답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 늘 마음의 짐이 되어온 남편과의 별거 문제를 고백합니다.

그 질문을 여러분에게 드립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아프십니까? 여러분을 아프게 하는 근심, 걱정, 문제, 상처가 무엇입니까? 그 아픔을 치유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분 안에서, 마치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이 치료받듯, 여러분의 아픔이 치유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분이 주시는 용기로써 여러분의 마음의 주머니 안에 있는 슬픔의 돌들을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치유를 구할 것은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아픔을 깊이 아시는 분이시며, 그 아픔을 치료해 주시는 분입니다.

또 한 번 묻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아프십니까? 과연, 여러분은 이웃의 아픔을 진실하게 느끼고 계십니까, 아니면 구경하고 계십니까? 모르는 이웃의 아픔은 고사하고, 자녀의 아픔, 배우자의 아픔, 또는 부모의 아픔을 진실로 아십니까? 더 나아가, 친구의 아픔, 교우의 아픔, 내 이웃의 아픔을 아십니까? 뭔가 하지 않고는 못 견딜 정도로 그렇게 아프십니까? 혹시나, 내 자신의 아픔에 짓눌려 다른 사람의 아픔에 눈 멀어 있지는 않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정애리씨도, 1989년에 '드라마 게임'이라는 단막극에서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다니는 엄마 역할을 맡아 성로원이라는 영아 보육원에 잠시 방문했는데, 그 전까지는 자기 자신의 아픔에만 몰두하여 살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 짧은 방문을 통하여 다른 사람의 아픔을 목도하게 되었고, 그 아픔이 지금껏 그로 하여금 부지런히 아픈 이웃을 찾아다니며 돕도록 만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정애리씨의 고백의 일부입니다.

살면서 '나를 변하게 하는 만남'을 맞닥뜨린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 아닐까. 나는
내가 지금까지의 삶과 조금 다르게, 변화된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한 첫 만남을
'성로원'으로 꼽는다. 그곳에 첫발을 디디면서부터 오로지 '나'만 들여다보던 삶의
시선이 '사람'을 향해 열리기 시작했으니. (101쪽)

오늘은 강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이유는 우리의 아픔을 해결해 주시기 위함일뿐 아니라, 우리를 변화시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나누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를 참된 인간으로 깨어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모르는 것은, 이웃의 아픔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은, 그리고 아무런 아픔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입니다. 이웃의 아픔을 나누는 정도만큼 우리의 행복은 커갑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랑할 때에만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이웃의 아픔을 진실로 알지 않고는 참되게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강림절 기간 동안에 우리가 묵상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바로 아픔의 이야기요, 참된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진실로 아파함으로 사랑하고, 사랑함으로 행복해지는 경이로운 이야기입니다. 이 신비로운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