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 목사 (와싱톤 한인교회)

1.

섀론(Sharon)이라는 이름의 중년 여인을, 저는 그 어머니 장례식을 통해 만났습니다. 시카고(Chicago)에 살고 있는 그분은, 장례식 준비를 위해 저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아픈 이야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본인도, 처음 만난 목사에게 내가 왜 이렇게 다 열어보이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다면서, 30대 초반에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아들 이야기를 제게 해 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죽어가는 아들을 지켜 보면서 당해야 했던 여러 가지의 아픔들을 고백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픈 것이, 사람들이 위로한답시고 던지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믿는다는 사람들이 던지는 말들이 그분에게 가장 고통이었는데, 가령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거나 혹은 "이유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같은 말들이었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는, 처음에는 묵묵히 참고 들어주었는데, 나중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런 말로 위로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한 얼굴로 이렇게 답하곤 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틀렸습니다.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닙니다"라고.

이 점에 있어서 서양인들은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인간에게 불행을 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모든 불행을 그렇게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의심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모든 인간, 모든 생명의 행복을 의도하셨고,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하기 위해 잠시 동안 불행을 주시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만, 불행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도는 아닙니다. 많은 경우, 우리의 불행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로 오거나, 우리가 사는 사회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생깁니다.

앞에서 말한 그 청년이 에이즈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던 것은 그 청년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뜻을 가지고 그의 몸에 에이즈 균을 집어 넣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서 수 천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된 것은 하나님이 무슨 뜻을 가지고 그렇게 되도록 조정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잘못된 세계 질서 때문이요, 강대국들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요, 궁지에 몰린 사람들의 악한 선택 때문입니다. 쓰나미나 초대형 허리케인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무고한 죽음을 당한 것도 하나님이 무슨 뜻을 두고 그렇게 되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인류가 저지른 무분별한 환경 파괴와 대책 없는 개발과 고르지 못한 부의 분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이 '자연 재해'(natural disaster)이지, 실은 '인재' (disaster caused by human beings)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 모든 재난과 불행조차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고 믿습니다. 이렇게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재난과 불행을 일어나게 시켰다고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지난 한 해 동안 거대한 재앙이 연달아 터지면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그 재앙들을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해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재판정 앞에 억울한 피고(culprit)로 세워놓고 고소하는 일입니다. 피고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타락한, 죄로 물든, 악한 선택을 즐기는 인간이 피고입니다. 인간에게는 이토록 일관되게 불행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신비한 섭리 안에서 인류를 행복으로 이끌기 위해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비록 인류 사회가 불행과 재앙과 고난으로 얼룩져 있지만, 하나님은 그 인류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 모든 것을 합하여 인류를 행복으로 인도하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이 선의(善意)를 믿습니다.

2.

인간에게 닥친 불행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세 주일째 상고하고 있는 요한복음 9장 3절을 그 증거로 듭니다.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을 두고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개역 성경은 그런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개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번역으로 보면, 마치 하나님께서 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그 사람을 맹인으로 태어나게 하셨고, 지금껏 그렇게 살도록 만드신 것 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이 번역이 문법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번역은 히브리말 혹은 헬라말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번역입니다. 이 점에서는 우리가 읽고 있는 표준 새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어 번역본들을 비교해 보아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Contemporary English Version만이 이 절의 뉘앙스를 살려 놓았는데, 그 번역이 이렇습니다.

"No, it wasn't!" Jesus answered. "But because of his blindness,
you will see God work a miracle for him.

우리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하지만 그의 보지 못함으로 인해 너희는
하나님이 그를 위해 일으키시는 기적을 볼 것이다."

The Message라는 번역 성경을 편찬한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도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You're asking the wrong question. You're looking for someone to blame.
There is no such cause-effect here. Look instead for what God can do.

우리 말로 하면 이렇게 됩니다.

"너희는 지금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구나. 누군가, 비난할 대상을 찾고 있단 말이지. 하지만 이 사람의 불행은 죄의 결과가 아니다. 눈을 돌려,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는지를 바라 보도록 해라."

이것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그 사람이 맹인으로 태어난 것이 무엇 때문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예수님이 받들고 계신 것입니다.

불행 자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 불행을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볼 때,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도와 저 불행에서 벗어나게 할까?"를 질문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그 사람과 함께 아픔을 나누면서 그 짐을 덜어주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3.

불행을 당하고 있는 장본인의 경우는약간 다릅니다. 불행을 당한 당사자로서는 그 불행을 계기로 하여 자신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는데, 경제 구조가 잘못되어 애꿎게 사업이 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최선을 다해 일했으나, 회사 전체의 문제로 인해 해고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잘못과 불행을 직접적으로 연결짓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욕심을 내어 사업을 확장하려다가 망하거나, 혹은 규모없이 살다가 건강을 해친 경우에는, 스스로를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그런 경우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지!"하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과거 삶을 깊이 반성하여 잘못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치는 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굳이 잘잘못과 관계 없는 불행이라 하더라도, 그 불행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이 그것을 사용하도록 할 때, 하나님은 그 불행을 이용하여 놀라운 일을 만들어내십니다. 내가 당하는 불행의 원인을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 불행을 하나님께 맡길 때, 그분은 그 알 수 없는 불행을 이용하시어 선한 결과를 만들어 내십니다. 불행을 당한 당사자로서는 두 가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신을 불행을 두고 슬퍼하며 불평하며 비관 속에 서서히 죽어가던지, 아니면 그 불행 중에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든지,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택할 경우, 그분은 우리의 불행을 통해 선한 일을 도모하십니다. 그것이 우리 불행을 보시고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이요 '뜻'입니다.

지난 주, 프랑스에서 있었던 안면 이식(face transplant) 수술이 큰 뉴스 거리였습니다. 지난 5월에 38세된 한 여인이 개에게 물려, 코와 입과 턱을 잃었습니다. 프랑스 중남부 도시인 리옹의 한 병원의 의료진이 뇌사자의 코와 입술과 턱을 기증받아 이식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그분이 달라진 얼굴을 보고 그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아주 고통스러운 정신적인 적응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주(December 12, 2005) 뉴스위크 매거진(The Newsweek)에는 장기 이식 수술에 끼친 공로로 인해 노벨 의학상을 받은, 하버드 의대의 조셉 머레이 박사(Dr. Joseph Murray)의 짧막한 글이 게재되었습니다. 그는 1944년에 인디아에서 사고를 만나 온 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챨스 우즈(Charles Woods)라는 비행사에 대해 회고합니다.

챨스는 전신에 70% 이상 화상을 입고, 얼굴은 완전히 변형된 상태였습니다. 그 정도의 화상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비행사는 비범한 삶의 의지로 인해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밸리 포지 종합 병원 (Valley Forge General Hospital)에 근무하던 조셉 머레이 박사는 이 환자를 받아서 치료하면서, 사망한 병사의 피부를 이식하는 수술을 했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거의 죽은 상태에 있었으므로, 의료진은 실험하듯 이식 수술을 했는데, 당연히 나타나야 했을 면역체계(immune system)의 거부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의 강한 의지 때문에 그 수술이 효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살아났고, 24회의 피부 이식 수술을 받고 2004년까지 건강하게 살았습니다.

머레이 박사는 챨스의 케이스를 두고 계속 연구하여, 다른 사람의 장기를 이식했을 때 생기는 면역체계의 거부 반응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내었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1954년 12월 23일, 최초의 장기 이식 수술을 성공시켰습니다. 그로부터 50년 이후인 지금, 장기 이식 수술이 보편화되었습니다. 이제는 몸 전체를 다른 사람의 머리에 이식하는 것까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장기 이식 수술을 받아 건강하게 사시는 분들이 두 분이 계십니다. 최근에 심장 이식 수술을 받고 금의환향하신 김은형 권사님과 영안실 앞까지 가셨다가 간 이식 수술로 살아나신 이정현 목사님이 그분들이십니다. 2004년에 미네아폴리스 메트로돔(Minneapolis Metrodome)에서 장기이식자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2000명 이상의 이식 수혜자들이 모여 함께 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실로 경이로운 발전입니다.

만일 챨스 우즈가 비범한 정신력으로 그 수술을 견뎌내며 살아남지 못했더라면, 이식 수술은 아직도 먼 미래의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그랬더라면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금 이정현 목사님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않을 것이고, 김은형 권사님은 임종을 향하여 가쁜 숨을 쉬고 계셨을 것이고, 저는 또 한 번의 장례식을 준비해야 했을 것입니다.

챨스 우즈가 사고를 당하여 전신 화상을 입은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비 소홀로 인해 발생한 비행 사고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에서 챨스와 함께 아파하시고 우셨을 것입니다. 그가 모든 고통을 견디면서 삶의 의지를 불태운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의 불행을 사용하시어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하나님의 손에 내맡긴 챨스 때문에 그리고 챨스의 불행을 보고 그 불행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자 노력했던 그 의료진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드러났습니다.

여러분에게 불행이 있습니까? 하나님에게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지도 마시고, 하나님에게 벌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은 모릅니다. 그 불행 앞에서 혹시 여러분에게 고쳐야 할 것이 있는지를 돌아보시되, 그 불행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그분에게 맡기시기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불행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 순종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흔들리지 말고 걸어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불행을 통해 역사하시고, 그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4.

우리에게 일어나는 불행이 모두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는 말을 뒤집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어떤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이 주신 복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업을 해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까? 어렵게 공부해서 학위를 땄습니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시험에 합격했습니까? 승진을 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되었습니까? 그런 좋은 일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것을 두고 "뭔가 이유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복을 주셨구나!"라고 성급하게 단정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그런 복을 받지 못한 것을 하나님의 벌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면, 그런 복을 받은 것도 하나님이 복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내가 생각한대로 일이 잘 풀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내 편에 계신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일이 잘 될 때 정신을 차리고 조심해야 합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제가 근무하던 대학 근처의 어느 식당에서 홀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옆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던 사람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제가 들으려고 해서 들은 것이 아니라, 그분들이 너무 크게 말했고, 그분들이 앉은 자리와 제가 앉은 자리가 너무 가까웠고, 저는 홀로 점심을 먹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었습니다.

두 쌍의 중년 부부가 함께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예수 쟁이' 냄새가 진하게 풍겼습니다. 대화의 주된 내용이 교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동석한 분 중 한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고 자랑을 합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자랑스럽게 그 연유를 설명합니다.

아들이 신체 검사장에 가서 군의관에게,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답니다. 거짓말 인 것을 눈치챈 군의관이 그 아들을 별도의 방으로 데리고 가서 온갖 위협을 했는데, 아들은 죽어도 들리지 않는다고 고집했다는 겁니다. 마침내 군의관은 참지 못하고 폭행을 가했다고 합니다. 호되게 때리고 나서 다시 물어 보아도 여전히 들리지 않는다고 대답하자, 이 군의관은 제 풀에 지쳐서 한쪽에 가서 담배를 피우면서 뭔가 생각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아들 아이의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갑자기, "야, 너 고향이 여기 맞아?"라고 묻더랍니다. 거기가 어디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 아들이, "예, 아버님이 거기서 태어나셨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자, "이놈아, 너, 아버지 고향 덕 본 줄 알아! 고향 사람이니까 내가 봐 준다!"라고 말하더랍니다. 군의관이, 자기 고향과 그 아이의 아버지 고향이 같은 것을 보고 면제 판정을 내렸다는 겁니다.

저는 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떠드는 그분의 신앙과 양식을 의심했습니다. 마음이 답답해져 왔습니다. 그런데 더 큰 충격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 글쎄, 그 군의관이 나와 같은 고향이었던거야! 그래서 면제 받았어!"라고 말하자, 같이 점심을 먹던 분이 박수를 치면서 맞짱구를 치는데, "엄마나! 성령께서 역사하셨네! 할렐루야!"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야기를 하시던 그분은 "거럼! 거럼!"하고 응수합니다.

저는 그 순간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혹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듣고 있지 않나 둘러 보면서 얼마나 얼굴이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아들의 부정직한 행동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그 사람이나, 그 이야기를 듣고 성령께서 역사하셨다고 맞장구를 치는 사람이나, 다 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아들도 청년부 회장까지 지낸 믿음 좋은 청년이라니, 아마 군의관에게 맞으면서도 속으로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주여, 꼭 면제받게 해 주옵소서!"

여러분, 이 이야기를 어떻게 보십니까? 극단적인 이야기라고 치부하시겠습니까? 제가 지어낸 이야기처럼 들립니까?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제가 더 좋아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적든 크든, 이와 비슷한 일들이 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복을 이야기할 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때론 비상식적이고, 비윤리적인지 모릅니다. 잘 되면 모두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잘 되면 무조건 모두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을 속이면서 "제발 속아 넘어가게 도와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때, 오히려 더 긴장해야 합니다. 돈이 많이 벌립니까? 긴장해야 합니다. 혹시나 부정한 길을 가고 있지나 않은지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하고, 그로 인해 교만해지지나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높은 자리로 승진했습니까? 혹시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것은 아닌지 돌아 보아야 하고, 그 자리에 앉아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 만인이 알아주는 좋은 명예를 얻었습니까? 혹시나 내가 헛된 명예를 추구하는 허영심에 빠진 것은 아닌지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 10:12)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조심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것들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불행을 하나님께 드려 그것을 통해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시도록 하듯, 우리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을 하나님께 드려 그것을 통해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재산이 있으십니까? 명예가 있으십니까? 지위가 있고, 권력이 있으십니까? 학식이 있으십니까? 기술이 있으십니까?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알고 누리기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는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인지 아닌지, 지금으로서는 모릅니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께 내어 드려, 그것을 통해 그분의 뜻이 드러나게 할 때, 그것은 진실로 복이 될 것이고, 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불행이든 행이든, 재앙이든 축복이든,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그것 자체만 두고서는 벌이라고 단정할 수도, 복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아니,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맡겨 그분의 뜻이 드러날 때, 그 때에만 그것이 참으로 복이 됩니다. 아무리 큰 불행이라도 하나님께서 잡아 사용하시면 복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복이라 하더라도 내 손에 잡혀 내 뜻과 내 욕심대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재앙이 됩니다. 내가 복 받은 사람이냐 아니냐는 지금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의 나를 잡아 주시느냐, 내가 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들려 드리느냐에 있습니다. 나를 통해 모든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내 가진 것을 통해 얼마나 드러나느냐에 걸려 있습니다.

5.

오늘 우리는 청지기 주일로 지킵니다. 저는 지금 요한복음 본문을 따라가며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이렇게 오묘하게 역사하시어, 그 때 그 때 알맞는 말씀으로 인도해 주시는 것을 보고, 저는 신비한 희열에 젖습니다. 제가 억지로 짜 맞춘 것이 아닙니다. 주신 영감을 따라 오다 보니 이렇게 결론이 지어집니다.

'청지기'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의 물건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것을 하나님께 다시 돌려 드려 그분의 뜻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청지기 주일을 지키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재물의 봉헌과 섬김의 봉헌만을 작정하지만, 이 작정을 하면서 우리는 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도록 내 전부를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불행과 행복, 나의 아픔과 기쁨, 나의 상처와 영광, 내 가난과 재물, 내 무능력과 능력, 내 약함과 강함, 내 무지와 지식, 내 수치와 자랑, 내 질병과 건강, 내 추함과 아름다움, 내 젊음과 노쇠함-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잡으셔서 그분의 뜻을 드러내기시를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에만 우리는 복 받은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충만한 은총이 여러분에게 넘쳐 날로 날로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의 인생을 통해 드러나는 복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