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 목사  

1.

청소년 시절에 저는 새로운 달(month)이 시작되거나 새로운 해(year)가 시작될 때마다 새로운 결심(resolution)을 하고, 그 결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곤 했습니다. 때론 결심한 내용을 종이에 적어 책상 앞에 붙여놓기도 하고, 때로는 일기책에 적어 놓고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면, 결심은 더욱 비장(serious)해지고 결심한 내용은 많아졌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저 자신에게 일어나,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그런 일을 반복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번번히 새로움을 향한 노력에 실패하곤 했습니다. 작심삼일(作心三日, New resolution does not last for three days!)이라는 말처럼, 며칠 혹은 몇 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새로운 결심은 흐지부지되고, 다시금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실망하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해가 다시 다가오면, 또 다시 희망을 추스려 결심을 합니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결의 (determination)로써 다짐하지만, 또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옛날 습관(old habits)이 저를 다시 정복하곤 했습니다.

10대 후반에 이르러, 저는 저 나름대로의 이 의식(ritual)에 지쳤습니다. 그것이 아무 효용(effect)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저 자신의 약한 의지력(will-power)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해의 다짐'(new year resolution) 을 하지 않았습니다. 새 해가 다가온다 해도 흥분되지도 않았습니다. 새 해를 맞이하면서 사람들이 '새롭다'는 말을 할 때마다, 저는 속으로 "새롭긴 뭐가 새롭다는 말인가? 우리는 무한히(indefinitely) 지속되는(continue) 시간의 흐름의 한 지점에 서 있을 뿐이요, 무한히 반복되는 계절의 변화의 한 지점에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새로울 것이 없다. 불쌍한 사람들아, 흥분할 것 없다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로, 새로운 해가 왔다고 흥분하는 군중들을 피하여 홀로 지나다니곤 했습니다.

물론, 한 참 지난 후, 이 태도 역시 옳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만, 제가 가지고 있던 회의감(doubts)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share)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전도서(The Ecclesiastes)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훗날에 다시 있을 것이며, 이미 일어났던 일이 훗날에 다시 일어날 것이다. 이 세상에 새 것이란 없다. '보아라, 이것이 바로 새 것이다'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것, 우리보다 앞서 있던 것이다"(전도서 1:9-10). 이 냉철한 현실 인식(realization of reality)에 대해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실로, 이 땅에 새 것이란 아무 것도 없음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고린도후서 5장에서 바울 사도는 정반대(opposite)의 선언(declaration)을 합니다. 새 것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7절의 선언은 참으로 대담하게 들립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전도서의 선언과 얼마나 다릅니다. 전도서에서는 "새 것이란 없다. 지금 있는 모든 것은 다 옛날에 있던 것이다"라고 선언하는데, 바울 사도는 "옛 것은 다 사라지고 없다. 모든 것이 새롭다"라고 선언합니다. 얼른 보면, 서로 모순(conflicting)되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말씀의 차이를 보아야 합니다. 전도서의 말씀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인간적인 입장에서 냉철하게 관찰한 현실 인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분명히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새롭지 않습니다. 반면,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변화된 사람의 현실 인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인(natural human beings)으로서 세상을 바라볼 때는 그 무엇도 새로울 것 없었고, 모든 것이 권태로이 반복(boring repetition)될 뿐이라고 느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영으로 변화받고 나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1장은 믿음을 가지기 이전의 현실 인식을 담고 있다면, 고린도후서 5장은 믿음을 가진 이후의 현실 인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나서야, 저는 새로움의 가능성 (possibility of newness)을 다시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변화받지 않고는 제 아무리 스스로 노력한다 해도 새로울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진정한 새로움은 외적인 변화(outer change)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inner change)에서 오는 것이라는 진리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인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분의 영으로 변화받을 때 일어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내 스스로의 결단이 아무리 비장해도, 그것으로는 참된 새로움을 얻을 수도 없고, 그 새로움이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이 먼저 새로와진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이 내게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저 자신의 결단에 희망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더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에 희망을 둡니다. 저의 의지는 저를 변화시키는 데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저를 좀 더 오래, 좀 더 깊이, 좀 더 넓게, 좀 더 철저하게 다스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그 환경 안에 머물러 있도록 하는 데 제 의지는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저는 그분의 영에 의해 변화될 것이고, 변화되는 그만큼 세상은 제게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새롭게 본다는 말은 그 동안 육안(bodily eyes)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던 실체(reality)를 본다는 뜻입니다. 육안으로만 보는 세상의 모습은 실재의 일부일뿐입니다. 마음의 눈(eyes of heart) 혹은 영안(spiritual eyes)으로 보아야만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고, 그래야만 인생을 참되게 살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5절). 맹인되었던 그 사람은 배운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바리새파 사람들과 성경에 대해 혹은 신학에 대해 논쟁할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할만한 능력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체험한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칼이 목에 들어와도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 즉 수 십년 동안 보이지 않던 눈이 이제는 보인다는 사실 말씀입니다.

2.

오늘로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의 이야기에 대한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지루해(bored)하실까 싶어 오늘로 마치는 겁니다. 이 이야기는 무궁무진한 묵상의 씨앗(seeds of meditation)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더 설교할 수 있습니다. 오늘로 이 이야기에 대한 설교를 일단락 지으면서, 마지막으로 주목할 묵상의 씨앗은 '보는 것의 문제'(question of seeing)입니다. 39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요?"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있다"(41절)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진정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십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육신의 눈은 떠 있으나 영적인 눈이 먼 맹인들이었습니다.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있다"라는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너희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을 전부로 여기고, 너희가 생각하는 것을 진리라고 고집하니, 너희는 영적인 맹인(the spiritual blind) 인 셈이다. 진리를 보지 못하니 너희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반면, 맹인되었던 그 사람은 육신의 눈만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영적인 눈까지 떠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본다'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처럼 보는 것 가지고는 안됩니다. 맹인되었던 사람처럼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육안으로 보고, 이성적으로(with reason) 판단하는 것으로 다 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맹인되었던 사람은 육안으로 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주님께서 주신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진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헬라말에는 육안으로 보는 것과 마음으로 꿰뚫어 보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각각 다릅니다. 굳이 신앙적인 차원에서 보지 않더라도, 보는 방법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반하여, 우리 말에는 '본다'라는 하나의 단어 밖에 없지만, 이 말의 쓰임새(usage)를 보면, 그 단어에 두 가지의 다른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 태양을 보아라"라고 말할 때는 육안으로 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보라'는 말을 달리 사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음식 맛 좀 봐"라고 말할 때 혹은 "이 음악 좀 들어 봐"라고 말할 때가 그렇습니다. 이 때 '보라'는 말은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맛을 보고 그 맛이 어떤가 깊이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음악을 듣고 그 음악이 어떤 감동을 주는지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야, 이것 좀 봐 봐." 이 말은 보고 또 보라는 것이 아니라, 보고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육안으로 본 다음,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 조상님들도 보는 방법에는 두 종류가 있으며, 마음으로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한자(Chinese letter)의 경우, 두 종류의 보는 것에 대해 각각 다른 글자를 씁니다. '볼 견'(見, to see or to look) 자(字)는 보통 육안으로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반면, '볼 관'(觀, to perceive) 자(字)는 마음으로 보는 것을 가리킵니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관음'(觀音, to perceive the voice)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소리를 본다'는 뜻입니다. 소리를 들어야지 어떻게 봅니까? 들어 보라는 말입니다. 소리를 듣고 생각하면 소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안으로 보는 것으로 다 알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동서고금(east and west, past and present)을 통하여 확인된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본 것에 대해 생각하고 분석하고 판단하여 알아야 참되게 보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갸야 한다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비추어(shed light) 보아야만 제대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맹인되었던 사람도, 바리새인들도, 육안으로 본 것을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환히 볼 수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참된 모습이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변화되어 가는 것은 한 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자주, 얼마나 지속적으로, 얼마나 진실하게, 얼마나 겸허하게(humbly) 내어 놓고 은총을 비느냐에 따라, 점진적으로(steadily) 변화되어 갑니다. 그 변화의 정도에 따라 영적인 눈이 밝아집니다. 영적 생활을 게을리하면 영적 눈이 다시 어두워집니다. 영적 눈이 어두워지면 과거에 보던 것들이 모두 가짜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다시 영적 생활을 회복하여 영적 시력(spiritual sight)을 회복(recover)하면, 육안으로만 보던 것들이 얼마나 불완전했는지 알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실로 무엇을 진짜로 보고 사느냐에 의해 갈린다(differs)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첫째, 육안으로 보이는 것만이 진짜이며 그것만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 육안으로 보이는 것을 이성으로 검토하고 분석하고 질문해가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셋째, 육안으로 보고 이성으로 검토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동물적 차원(dimension of animal)에 사는 것이며, 둘째 사람은 인간적 차원(human dimension)에서 사는 것이고, 셋째 사람은 영적 차원(spiritual dimension) 혹은 신적 차원(divine dimension) 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 번째 차원에서 살아야만 가장 행복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를 때, 그분은 가장 먼저 우리의 영적 눈을 열어 주십니다. 그 영적 눈으로 그 동안 보지 못하던 차원들을 보게 되니, "모든 것이 새롭다!"라는 탄성(exclamation)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3.

이번 성탄절에 저는 잊을 수 없는, 아주 귀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성탄을 이틀 앞 둔 지난 금요일, 모처럼 아무 약속도 잡혀있지 않았습니다. 새벽 기도가 끝난 후, 오전 시간에 그 동안 밀린 일들을 처리했습니다. 점심 시간이 가까와 오면서, "오늘은 모처럼 일찍 집에 들어가 쉬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심 때 즈음하여 장로님 한 분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절친한 친구의 딸이 뇌사 상태(brain death)에 있어 곧 치료를 중단하고 보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그 아버지가 의료 장치(medical devices)를 제거하기 전에 목사에게서 기도라도 받고 싶어하니, 가 줄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사연을 듣고 보니, 28세 된 아주 총명하고 아름다운 아가씨가 8년 넘게 anorexia 즉 '거식증'으로 고생하다가, 하루 전에 갑자기 위급 상태에 빠지더니, 이제 뇌사 상태에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저는 전화를 받고, 딸 가진 아버지의 심정으로 무엇이든 돕고 싶었습니다.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가고 있는 아버지와 통화를 하고, 오후 2시에 병원에서 그분을 만났습니다.

병원으로 가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 아가씨가 비록 뇌사 상태에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내 말을 들을 것이다. 그것을 무의식이라고 부르든, 영혼이라고 부르든, 마음이라고 부르든, 인간의 망가진 의식(consciousness)보다 더 깊은 차원에,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고, 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어떤 기관(faculty)이 있음에 분명하다. 내가 믿는대로 인간이 영적 존재라면, 육신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의사소통(communication)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뇌사 상태에 빠져있는 환자에게 단순한 의식(mere ritual)을 치루러 가는 것이 아니다. 아직 살아있는 영혼과 대화를 하러 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저를 사용하시어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옵소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를 도구로 사용하소서."

의료진의 최종 점검(final exam)이 끝난 후, 저는 가족과 친지들을 모두 병실 안으로 불러들이고, 문을 닫게 한 다음, 함께 기도하기를 청했습니다. 그러기 직전에 간호사들이 그 아가씨의 얼굴을 깨끗이 닦아 주었습니다. 저는 눈을 감고 그 아가씨를 향해 말했습니다. "Heather, 나는 당신이 지금 제 말을 듣고 있음을 압니다. 당신은 너무 오래 고생했습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놓고 가십시오. 당신의 뒤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의지하십시오. 그분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당신을 하나님께 던지십시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믿고 맡기십시오." 그런 다음, 저는 그 아가씨의 이마에 손을 얹고 성호를 세 번 그으며,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받아 주시기를 빌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아버지와 언니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 (farewell)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이미 7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와 딸은 비통한 울음으로 작별 인사를 했습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만큼 애처로운 광경이었습니다. 한 참을 울고 나서, 저는 이제 그만 병실 밖으로 나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사람이 돌아서 나가는 동안, 저는 다시 그 아가씨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 때, 저는 그 아가씨의 오른쪽 눈이 약간 열리고 눈물이 가득 고여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놀라서 "보십시오, Heather가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언니의 울음소리 때문인지 아무도 듣지 못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모두 다 내 보내고, 의료진들이 들어와 의료 장비들을 제거하는 동안, 내내 그 아가씨를 지켜 보았습니다. 저와 함께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우리 교회 권사님께서 제게 다가와 "저 눈물을 닦아주면 안 될까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옆에 있던 티슈(tissue)로 그 귀한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모든 장비를 제거해 낸 그 아가씨의 얼굴은 처음과는 달리 아주 평안해(peaceful) 보였습니다. 저는 그곳에 서서 "Heather, 참 고마워요. 이렇게 응답해 주어서. 당신이 진정으로 제 말을 들었고, 아버지와 언니의 작별 인사를 들었군요. 마지막 순간에 당신은 하나님을 믿었군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제 말을 들어 주어서!"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서야 저는, 저 말고도 그 눈물을 목격한 분들이 몇 분 더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분들도 그 광경을 목격하고 신비감(mysterious feeling) 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아버지와 언니는 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와 언니가 모두 의사이신데, 두 분은 이 기적같은 일을 감격의 눈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아버지께서 오늘 1부 예배에 참여하셨습니다.

지난 화요일, 그 아가씨를 매장하는 예배(burial service)를 제가 인도했습니다. 그 아버지께서는 비통한 가운데서도, 교인도 아닌 당신의 일을 위해 힘써 준 것에 대해 저에게 감사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께 더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성탄절에 저는 잊을 수 없는, 아주 값진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한 가정의 슬픔에 동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힘이나마 되었다면, 그것만큼 성탄절을 보람있게 보내는 길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뿐 아니라, 그 슬픔의 한 복판에서 이처럼 신비로운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되돌아 보니, 성탄절 이틀 전에 아무 약속도 잡혀있지 않았던 것은 저의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가정을 만나 함께 하도록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날, 저는 우리 교회에 부임한 이후 처음으로 아무런 시간적인 제약 없이 한 사람과 오랫 동안 깊이 만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실로 예기치 않은 은총(unexpected blessing)이었습니다.

4.

저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냉철하게,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려고 힘썼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저는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제가 세상과 인간을 육안으로만 보고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제게 참된 실재를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뇌사 상태에 있는 사람의 영적 차원을 믿도록 은총을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만일 제가 육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고, 그곳에서 그냥 사무적으로(officially) 의식(ritual)을 집행하고 말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7절)라고 고백합니다. 그 앞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8). 이 말은 육안에 보이는 것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something beyond visible things)이 있음을 믿고 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보는 눈이 '영안'(靈眼, spiritual eye)입니다. 그 영안으로 보이는 것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며, 날로 새롭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백한 말, 즉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고후 4:16)는 말은 결코 헛소리가 아닙니다.

저는 그 동안의 신앙 생활과 목회 활동을 통해 인간이 영적 존재이며,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 이상의 실재가 있음을 조금씩 확인해 왔습니다. 그런 경험을 할 때마다 저의 영안은 더 밝아지고 세상은 더 달라 보입니다. 세상과 인간과 인생의 신비감에 압도됩니다. 그런 경험을 할 때마다, 저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게 됩니다. 마치 그 옛날 벧엘에서 야곱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God's presence)을 목격(witness)하고 "두렵도다 이곳이여!"라고 토로했던 것처럼, 저도 "두렵도다 인생이여!"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 두려움은 겁나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라, 신비감에 젖어들게 하는 경외심(sense of awe)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움의 원천(source of newness)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늘 아래 새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의지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킴으로 새로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새로운 일을 만들어낼 수 없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사로잡힐 때, 우리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이 변화되어 새로워질 때, 비로소 날로 날로 새로운 일들이 우리에게 보일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인생의 신비감에 사로잡힐 것이며, 이 신비감은 더 깊은 차원으로 우리의 신앙을 이끌어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새 해의 각오(new year resolution)가 있다면, 더욱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사귀는 것, 그리하여 더 깊이 변화받는 것, 그리하여 날마다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삶의 사는 것-이것뿐입니다. 이것도 우리의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의지와 노력이 또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노력을 보시고 은총을 부어주실 때, 우리는 더욱 변화될 것이며, 더욱 새롭게 될 것입니다.

이제, 새롭게 변화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담아 기도드릴 때, '새롭게 하소서'라는 찬양을 들으실 것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이 찬양을 들으시면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 새로운 세상을 살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로써 새 해를 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