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 목사 (와싱톤 한인교회)

1.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관한 지 지난주 설교에 대해, 몇몇 분들이 e-mail로 반응을 해 오셨습니다. 한 편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심도있고 다양한 반응을 접해 보기는 처음입니다. 개인적인 고백을 전해오신 분도 계셨고, 설교를 통해 받은 은혜를 나누신 분도 계셨습니다. 어떤 분은 제 설교를 들은 이후, 이 이야기를 계속 곱씹는 동안 얻은 몇 가지 생각을 제게 보내 오셨습니다. 그분은 "혹시 도움이 될지 몰라 생각을 써 보냅니다"라고 하셨지만, 그분의 생각은 제게만 아니라 말씀의 의미에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분의 생각을 여러분과 나누면서 말씀을 시작하려 합니다.
그분은, 돌을 들어 여인을 치려 했다가,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서 가버린 군중들이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를 생각해 보았답니다. 그랬더니, 적어도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들었답니다. 이하에서 나누는 내용은 그분이 보내온 편지 내용을 제가 약간 수정하거나 덧붙인 것입니다.
첫째는 "법은 법이지"라는 식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눌려 그 현장에서 발길을 돌렸지만, 마음 속에서는 여전히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 하지만 법은 법이잖아? 만일 우리가 이 더러운 여자를 처벌하지 않고 풀어준다면, 도대체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배우란 말이야?" 이 사람들은 이번에는 할 수 없이 물러섰지만,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나는 다르지" 식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 여자에게 먼저 돌을 던질 마음은 없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먼저 던졌다면, 나도 따라서 던졌을거야. 예수님의 말씀이 맞기는 해. 아무도 완전한 사람은 없잖아? 우리 모두가 죄인인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내가 지은 죄와 간음죄는 다르지 않나? 내가 죄인인 것은 맞지만, 그 여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은 부당하지 않나?" 이 사람들도 역시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에 눌려 그 현장에서 물러나왔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많이 있었습니다.
셋째는 진정한 참회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아마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맞아, 나도 죄인인데, 내가 무슨 주제로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사람아, 너나 잘하세요!" 이 사람들은 앞으로 더욱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 것을 다짐하고 일상 생활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문제가 말끔히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또 다른, 매우 어려운 질문에 봉착했을 것입니다. "참회한 자로서 나는 매일 매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거룩하게 살기로 한 결심을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나? 어떻게 하면, 이 죄 많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나?"
이 글을 주신 분은 당신이 세 번째 그룹에 속해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남겼습니다. "만일 오늘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분들이 예수님 곁에 남아 참회하고 사랑을 실천하기로 결심했다면, 그 결심이 일상 생활에서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의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차별성을 보일 수 있을까요?"
저는, 설교자가 자칫 놓치기 쉬운 차원의 질문을 제기해 주셨다는 점에서 그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죄 많은 이 세상, '죄 권하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떻게 하루 하루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주일 하루만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것인가?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즉 내 가정에서, 내 직장에서, 쇼핑 몰에서, 도로에서, 법정에서, 우리는 어떻게 진정으로 참회한 자로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2.

이 글을 읽고 묵상하는 가운데, "그렇다면 이 날 이후에 이 여자는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의문이 제게 생겼습니다. 실상, 이 여인은 예수님의 은총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앞으로 하루 하루, 예수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살아가야 하는 책임을 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그 여인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그 다음의 말씀 즉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은 그 여인에게 큰 부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유약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찌보면 예수님께서 전혀 실현 불가능한 말씀을 주시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일까? 아무래도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어지는 말씀, 오늘 읽어드린 12절부터 30절의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은 '죄'에 대해 몇 가지 말씀을 주십니다. 21절을 보면, "나는 가고,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23-24절에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곧 나'임을 너희가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죄에 대한 몇 가지의 사실을 암시하십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죄 가운데 살고 있다는 현실을 분명히 지적하십니다. 21절에서 예수님은 단수형의 '죄'라는 단어를 사용하셨고, 24절에서는 복수형을 사용하셨습니다. 단수형의 '죄'는 죄의 근원 즉 죄의 뿌리를 가리키고, 복수형의 '죄들'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행하게 되는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말하자면, '간음'은 '죄들' 중 하나입니다. 간음의 죄 즉 혼외정사의 죄는 우리 인간 존재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근원적인 죄의 뿌리에서 발생하는 증상입니다.
그렇다면, 근원적인 죄, 단수형의 죄, 모든 죄들의 뿌리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모든 인간이 범죄자다"라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있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죽음의 세력이 활동합니다. 사랑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나 있기에, 우리에게 미움의 세력이 활동합니다. 진리의 근원인 하나님을 떠나 있기에, 우리에게 비진리의 세력이 활동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 한, '죄들' 즉 여러 가지의 허물과 잘못에 빠지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허리케인으로 인해 나무가 뿌리째 뽑혔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흐르면서 잎이 시들고, 열매가 시들고, 가지가 굳어지고, 껍질이 벗겨지고, 벌레들이 줄기를 갉아먹습니다. 이 나무의 문제는 뿌리가 생명의 근원인 대지로부터 분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모든 문제들이 결국 거기서 발생합니다. 그 나무를 다시 대지에 심어 놓으면, 서서히 잎에 생기가 돌고, 가지와 껍질이 연해지고, 해충이 떠나고, 나중에는 꽃도 피고 열매도 열릴 것입니다. 때로는, 땅에 심겨진 후, 잎이 모두 떨어져버리고 가지가 모두 죽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습니다. 죽은 가지들을 과감히 쳐내고 잘 돌보아 주면, 머지 않아 새 가지를 내고 잎을 내고 꽃을 피웁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주지시키십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죄들'을 범하고 살아갑니다. 혼외정사의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거짓말을 하는 것도, 남을 속이는 것도,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도, 내 욕심을 위해 악착같이 싸우는 것도, 모두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된 까닭입니다. 근원적인 죄가 해결되지 않고는 이 죄들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선하고 의롭게 살기 위해 이런 저런 노력을 해 보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뿌리 뽑힌 나무를 그대로 두고 잎이 시들지 않게 하려는 노력처럼, 별로 희망이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죄 가운데서 살다가 죄 가운데서 죽을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다가 하나님 없이 죽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3.

죄에 대해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두 번째 사실은 24절에 있는 "'내가 곧 나'임을 너희가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라는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제시하십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곧 나'임을 너희가 믿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로부터 벗어나 생명을 얻을 것이다.
'내가 곧 나'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사용하신 이름입니다. 자기 자신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내가 곧 나'라는 말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고 역사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16절에 보면,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고, 19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고, 29절에서는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내가 곧 나'임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에게 돌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통해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 막고 그분의 손길을 뿌리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의 대지에 굳게 뿌리를 박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죄들' 가운데 살지만, '죄'로부터는 해방되게 됩니다. 마치 뿌리 뽑혔다가 다시 토양에 심긴 나무가 한 동안, 때로는 몇년 동안, 잎이 마르고 가지가 굳어버리는 증상을 겪지만, 생명을 회복하여 결국 그 증상을 극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 때때로 '죄들' 중 일부를 범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근원적인 죄로부터 치료되었기 때문에 결국 거룩한 삶으로 성숙해 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의 현장에서 붙잡혀 온 여자에게,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이 당신을 통해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뵙고 그분에게 돌아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매일 매일 하나님과 사귐을 지속하면서 근원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받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 죄의 뿌리를 그대로 둔다면, 그 여자가 혼외정사라는 잘못을 다시 저지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또 다른 종류의 죄를 범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 여인은 결국 '죄' 가운데 살아 '죄들' 가운데 죽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그분과 함께 살아가게 된다면, 그 여인은 혹시 '죄들' 가운데 살지라도 '죄'로부터 해방되어 거룩한 삶으로 성장해 갈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그 여인이 예수님과 헤어진 다음에 어떻게 살아갔을지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목격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건만,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어 자신을 돌보고 계심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그 여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그 여자는 가장 잔인한 형벌로부터 자신을 구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족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고,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자신이 범한 잘못은 약혼자에게 한 잘못이기 이전에 하나님께 한 잘못임을 깨닫고,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다윗이 사랑하는 부하의 아내를 강제로 취하고 나서 제 정신을 차렸을 때,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시 51:4)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에 상처를 드린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 여자는 약혼자를 찾아갔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약혼자는 이미 소문을 들어 그 여자의 소행을 알고 있었고, 분노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여자는 자신을 사랑했던 그 남자에게 맞아죽을 각오를 하고 찾아갔을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자신을 용서해 줄 것과 자신과의 약혼을 파기해 줄 것을 빌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끼친 모든 손해를 최선을 다해 갚겠노라고 약속했을 것입니다. 양가의 부모님들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벌을 달게 받겠노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아마도 이 한 번의 잘못으로 인해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한다면 그렇게 살겠노라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하루 하루를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그분이 주시는 능력으로써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준 사랑을 이웃에게 실천하면서 살아갔을 것입니다. '간음을 해서 파혼당한 여인'이라는 딱지를 달고 그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여인으로서 홀로 살아가면서 성적인 유혹을 뿌리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혼자 사는 여자라고 쉽게 여기고 남자들이 보내오는 부정한 눈길을 견디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그리고 아주 작은 일이지만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회복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다시 옛날의 삶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유혹이 강하고 어려울수록 그 여자는 더욱 더 하나님과 깊은 사귐에 들어가기 위해 힘썼을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을지도 모르지만, 독신으로 살았든 결혼을 했든, 그 여인의 삶의 태도는 동일했을 것입니다.


4.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회개'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회개는 하나님께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큰 잘못을 해 놓고 나서, 하나님께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하는 잘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그것을 '회개의 세 가지 R'(Three Rs of Repentance) 이라고 합니다. 하나는 '뉘우침'(Remorse)입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과 진정한 인정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요소는 '보상'(Restitution)입니다. 뉘우침은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이고, 보상은 자신이 해를 끼친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정직하게 질 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 요소는 '갱신'(Reformation)입니다. 동일한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자신을 고치는 일입니다. 갱신은 우리의 자구적인 노력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도와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회개의 기도를 드리면서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시고 내 속을 견고한 심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십시오"(시 51:10)라고 청합니다. 그렇게 갱신되지 않고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일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의 R 가운데 첫 번째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뉘우침'(Remorse)은 회개의 시작은 될 지언정, 회개의 전부는 아닙니다.
다시금, 제게 글을 주신 그분이 제게 남긴 마지막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진정으로 참회한 사람은 일상 생활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저는 이 질문을 매우 귀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신앙 생활은 주일에만, 예배당 안에만, 예배 드리거나 기도회를 할 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루 하루의 생활 가운데 우리의 신앙이 그 빛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참회한 사람이라면 그 참회가 일상 생활에서 열매 맺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 자기에게 몰려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눅 3:7-8)고 요청했습니다. '회개에 알맞는 열매'란 일상 생활에서 진정으로 참회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볼까요? 배우자 아닌 다른 이성에게 끌릴 때, 진정으로 참회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인성을 해치고 정서를 해치는 잡지나 영상을 보고 싶은 충동 앞에서, 진정으로 참회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누구에겐가 분노가 치밀어 올라 복수하고 싶을 때, 진정으로 참회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조금만 눈 감고 양심을 외면하면 적지 않은 수입을 얻을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참회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꽉 막혀있는 길에서 갑자기 내 앞을 급하게 파고 드는 차를 향해서, 진정으로 참회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이러한 선택에 마주서게 됩니다. 이런 선택의 순간에 우리의 참회가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생명과 사랑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뿌리 뽑혀 있던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금 하나님의 정원에 심겨지셨습니까? 그렇다면, 다 함께 감사하십시다. 뿌리 뽑혔다가 다시 심겨진 나무처럼, 우리 삶에는 아직 죄의 열매들이 보기 흉하게 달려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살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진리가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을 변화시키고 계십니다. 보기 흉하고 보이기 부끄러운 죄의 열매들을 보고 실망하지 마시고, 여러분 내면에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이미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여러분 안에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 모두, 서로를 도와, 하나님 아버지에게 더 가까이, 더 자주 나아가십시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속에 강력하게 역사하도록 하십시다.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그 생명이 열매맺도록 하십시다. 그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믿음은 위험의 순간에 위기를 모면하게 하는 힘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루 하루 주님의 길을 걸어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주님은 죽음의 위협 아래 있던 그 여인을 구해 주시고는,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똑 같은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죄 가운데 살지만, 죄로부터 벗어나 거룩함에 이르도록 힘쓰라고 하십니다.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주일에 예배당에서만 노력하지 말고, 매일 그리고 매 순간, 어디를 가나, 무슨 일을 하나,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 힘쓰라고 권고하십니다. 권고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함께 하시고 힘을 주십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는 불쌍한 인생이 아니라, 죄 많은 세상에서 죄 가운데 살지만 죄로부터 해방되어 거룩함을 향해 함께 자라가는 고귀한 인생이 되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가 바랄 참된 복은 이것 외에 달리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복을 여러분 모두에게 허락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