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복목사 (서울제일교회)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는 말이 정말 맞다. 그동안 종교개혁기념주일 설교를 몇십년을 해왔으면서도 몰랐던 것을 이제야 배우게 됐으니 말이다.
여태까지는 타락한 천주교회에 항거하여 마틴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이 일으켰던 개혁운동으로 종교개혁을 설명해왔다.
천주교회가 면죄부(속죄부)를 판매하면서 그것을 사는 사람의 죄가 사해진다고 하던 것을 비롯해서, 잘못 가르치던 것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개혁자들이 주창(主唱)하던 것이 있었다.

오직 성경이다(Sola Scriptura). - 제도, 전통이 아니다(믿음).
오직 믿음이다(Sola Fide). - 선행이 아니다(구원).
오직 은혜이다(Sola Gratia). - 행위가 아니다(삶).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이 외치던 소위 “3대 오직”(3대 Sola)라고 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러한 것들이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종교개혁은 한마디로 “초대교회의 회복”이 되어야 한다.
처음 주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셨던 그 원래의 교회, 사도행전적 교회, 초대교회를 회복하는데 까지 이르르는 것, 그것이 궁극적인 종교개혁이요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이다. 그래서 생명이 약동하고 생명력이 흘러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조직체이지만 조직체 이상의 생명체이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자칫 잘못하여 형식화되기 쉽고 규격화되기 쉽다. 중세 천주교회가 제도화되고
그 예배가 의식화(儀式化)된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종교개혁은 형식화 규격화된 데서 복음을 풀어놓는 것이다. 제도화, 의식화되어 질식되어 가는 생명을 풀어놓아 자유케 하는 것이다.
이 자유는 방종(放縱)이 아닌 해방(解放)이요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 다니면서 숨이 막힌다거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답답하게 억눌려 산다면 무엇이 잘못된 것이다. 예수께서도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그러면 우리가 회복해야 할 그 처음교회는 어떠하였던가?

Ⅰ. 말씀이 살아 역사 했다.

그들은 정확하고 분명한 복음을 들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主)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령 충만, 초대교회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예수 그리스도께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면 생명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희미하면 생명도 희미해진다.
오늘날 현대교회들이 자꾸만 그리스도 아닌 다른 것들을 가르치고(마리아, 성자, 복자, 종교다원주의, 동성애 허용 등등) 다른 것들을 따라가려는 경향은
크게 주의해야 한다.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생명의 복음을 분명하게 선포했다. 그리고 성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말씀이 살아 역사 했던 것이다.

Ⅱ. 교제가 살아있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가장 큰 비극은 “고독”이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군중 속의 고독”이라고 고쳐 말하기도 했다. 고독, 외로움, 이것은 교제가 없는데서 온다.
자기의 속마음을 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없는데서 온다. 그저 형식적인 인사나 하고 지나가는 것으로는 이런 고독을 치유 받을 수 없다.
이런 문제가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속에도 있다고 하는 것이 현대교회의 문제이다.
그런데 원래 교회에는 교제가 살아있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 2:44-4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된 성도들 사이에 생명의 교류가 이뤄지는 교제가 살아있었던 것이다.
이런 교회가 회복되어야 한다.

Ⅲ. 예배가 살아있었다.

초대교회는 모이기를 힘썼다. 이는 곧 예배하기를 힘썼다는 말이다.
그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집에서도 떡을 떼었다. 애찬을 나눴다는 말이다.
그들의 예배에는 찬송이 넘쳤다. “하나님을 찬미하며”(행 2:47)라는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예배에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넘쳐났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행 2:43)라고 하신 말씀도 그때 그들의 예배가 성령 충만한 예배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모이기를 힘쓰는 예배, 찬송이 넘치는 예배, 성령 충만한 예배,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예배, 이런 예배를 회복하자.

Ⅳ. 사역이 살아있었다.

행사를 위한 행사, 어떤 프로그램을 위한 사업이 아닌 참 생명을 얻는 사역이 있었다. 교회가 존재하는 근본 목적인 “복음전도”(마 28:18-20, 막 16:15-20)를 위하여
초대교회는 열심히 모이고 열심히 기도했다.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행 2:42).
그리고 당연한 결과로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행 2:47)하셨다.
사역이 살아있었다. 허공을 치는 사역이 아니었다. 생명이 구원 얻고 양육되며 또 일꾼으로 세워지고 교회가 계속해서 부흥되는 교회가 바로 초대교회였다.
그들은 전도하기 위해 성령 충만을 구했고 성령 충만 받자 열심히 전도했다(행 4:29-31).
이런 교회로 회복되어야 한다.

루터, 칼빈, 쯔윙글리를 비롯한 개혁자들의 노고를 우리는 높이 평가한다. 오직 말씀이어야하고 오직 믿음이어야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주께서 처음 주신 그 초대교회, 사도행전적 교회를 회복하는데 징검다리가 되어야 한다.
참된 종교개혁은 바로 이 처음교회를 다시 오늘 우리시대에 회복하는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