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재목사 (우리들교회)

지난 2월 18일자 신문에 60년 전 백두산 천지에서 일제가 쇠말뚝을 박는 끔찍한 장면이 보도됐습니다. 한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서 한국의 중요한 산꼭대기마다 수천 개의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쇠말뚝이 여기 저기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사진이 된 것입니다.
사진에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일본군이 백두산 천지에 쇠말뚝을 박고 일본의 천조 대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에게 제사를 드리는 모습이 담겨있었습니다. 1943년 7월 23일부터 8월 7일까지 16일간 조선총독부 관계자들, 군인, 무속인 등 70여명의 일본인들이 백두산에 머물면서 그 제사를 주관했습니다. 그 때의 사진들이 1943년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백두산 등정]에 실려있었습니다.
중요한 산에 쇠말뚝을 박는다고 해서 민족의 정기를 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도 풍수지리설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직 대통령 중에는 묘자리가 안 좋다고 해서 묘자리를 옮긴 분도 있고, 또 대통령 후보의 정기를 끊겠다고 선산에 쇠말뚝을 박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쇠말뚝을 박고, 묘자리를 옮긴다고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쇠말뚝을 박아 사람을 약화시킨다는 것은, 우리 한국을 봐도 그렇고 헛수고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에덴 동산 이후로 사람을 변질시키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 수법은 오늘 본문 말씀에 있는 것처럼 인간이 몸의 행실을 따라 살게 하는 것입니다. 몸의 행실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정기를 끊어버립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벗어나게 함으로 인간의 정기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사단의 수법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기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만 가지신 고귀한 성품을 인간에게만 나누어주셨음에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지고, 아버지의 집을 떠난 가출 소년, 소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다시 아버지의 식탁에 와서 앉으라고 하십니다.
부모자식 관계를 회복하자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인간의 정기를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시는지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이 길이 우리에게 행복을 주고 기쁨을 주는 길이 될 것입니다.

첫째, 성령 안에 거하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11절 -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령을 두 번이나 "살리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100% 죄인이라고 했습니다. 그 죄인인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시고, 또 믿음으로 의롭다 하셨어도 아직도 구속되지 못한 육신이 있기에 끊임없는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고, 율법에서 자유케 하시고, 이제 8장에서는 사망에서 자유케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고통은 죽는 것입니다. 가장 무섭고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에도 가장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생명인 아기가 태어나면 가장 기쁘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위로가 안 될 정도로 슬픈 것입니다. 고통 지수를 볼 때 사별의 고통을 따라갈 것이 없다고 합니다.
제가 매일 기쁘게 말씀을 전하니까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가장 멸망받을 원수가 사망이라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1절 말씀을 보니까 살린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꼭 죽은 몸의 소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4장 17절 "죽은 자를 살리시며"하는 말씀에서 "살린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자녀를 낳을 수 있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성경에서 "살린다"라는 단어는 약하고 병든 몸에 정기가 넘치고, 활력이 회복되고, 상처가 회복되고,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쓰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힘이 세고 능력 좋은 가인은 동생을 살해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씨인 셋을 주셨는데 그 셋의 아들 에노스가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이 에노스의 뜻이 "약하고 병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힘센 가인은 에덴 동산을 떠나서 자기의 성을 쌓고 풍악을 울리며, 기계 문명을 창시하고, 음악의 조상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한 일이 축첩하고 살인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약하고 병든 에노스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약하고 병든 에노스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결국 예수님은 가인의 후예 중에서가 아니라 에노스의 후예 중에서 오셨습니다.
약하고 병들었습니까. 도무지 가능성이 없습니까.
그래도 불씨만 남아있으면 휘발유를 부으면 확 일어납니다. 그게 바로 성령이 살리신다는 뜻입니다. 내가 죽어갈 것 같아도, 내가 병들고 약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하나님은 그렇게 기뻐하십니다. 자기 힘으로 살고자 나간 가인은 완전히 유기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육신을 정기 있게 만드는 진정한 원천은 무엇이겠습니까. 육신의 삶의 힘의 원천은 음식이나 공기나 세포조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약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이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는 있지만 육신적 삶에 진정한 정기를 주는 원천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초자연적인 생기만이 육신의 삶에 정기를 줍니다.

이런 예를 성경에서 너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이 어떻게 머리털에 힘이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힘이 있게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조건, 외모를 주셨는데 그것으로 교만하다보니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서 성령이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힘을 못쓰고 놀림감이 됐습니다.
성령이 그렇게 죽어가는 우리를 살려주셨는데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12절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육신은 계속 말하듯이 중독과 집착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죽을 몸을 고쳐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죽어 가는 우리들, 병들고 약한 우리들을 고쳐주시고 나니까 하나님에게 빚진 자가 아니고 몸에 빚진 자, 육신에 빚진 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처녀 총각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가 남자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한 달을 살아도 좋다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랬는데 기적같이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결혼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살려주셨다고, 성령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을 하면서도 살다보니까 어느새 하나님 자리에 남편이 있게 됐습니다. 하나님에게 빚진 자임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 빚진 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생가니까 아이에게 빚진 자로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순애보의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착하다고 하고, 본인도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면서 가족에게서 잠시도 눈을 못 뗐습니다. 그렇게 가족.. 가족 하다보니까 가족을 기쁘게 해줄 돈이 없어서 돈에 빚진 자로 살았습니다. 평강이 무너집니다. 가족을 사랑하는데도 평강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살아가는데 왜 갈등이 있는가. 남들 보기에는 행복한데 나는 왜 갈등하는가. 하나님 자리에 남편을 올려놨기 때문입니다. 돈을 올려놨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한 평안을 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사는 인생이 됐습니다. 성령으로 살려주셨는데도 하나님을 향해서 지경이 넓어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빚진 자입니까.
빚을 갚아야 된다는 것은 얼마나 절박한 마음인지 모릅니다. 이 절박한 마음으로 빚을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렵고 힘든 이웃의 모습으로 우리 중에 나타나시는데 하나님께 빚진 자이기 때문에 이웃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육신에 빚진 자입니다.
무엇을 계속 생각하십니까. 하나님만 생각한다면 그 어떤 환경에서도 평강이 있어야 정상입니다.
육신에게 지지 않으려면 먼저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몸의 행실은 무엇이고 왜 죽여야 합니까.
13절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식욕과 성욕과 수면욕이 몸의 행실입니까? 이것을 죽여야 됩니까?
그래서 식욕을 죽이고, 성욕을 죽이고, 잠을 안 자야 됩니까?
아닙니다. 그것들은 생명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혹 생명과 몸의 행실을 혼동해서 지나친 금욕주의에 빠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죽여야할 몸의 행실은 있어야 하되 통제되지 않는 본능입니다.
인간은 짐승과 다르게 지음을 받았습니다. 짐승은 본능을 따라서 삽니다. 사람은 이성을 따라서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통제받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창의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다스리며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드신 세상을 관리하고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선과 악,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악과나무의 용도는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 맘대로 살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선이고 모르면 악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이 중요한 죄를 범할 때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몸의 행실입니다.
몸의 행실을 따라 살다가 결국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하고 싶다, 먹고 싶다''는 것이 몸의 행실을 따라 행함으로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죽을 일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자기는 재테크도 못해서 평생 돈이 없는가 생각하다가 서울에는 집만 사놓으면 올라간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분이 지방에 사는 분인데 서울이 아니라서 집값이 안 오른다고 생각하고 십 년이 넘게 살던 아파트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집을 줄여서 서울에 허름한 재개발 아파트를 샀습니다. 그런데 십 몇 년 동안 꼼짝도 안 하던 지방의 아파트 값이 그 분이 판 순간부터 올라가기 시작하고, 서울에 사놓은 아파트 값은 그 때부터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큐티 나눔에 회개하며 그런 글을 올렸습니다.
순간적으로 몸의 행실을 따라 살면서 눈만 뜨면 유혹이 되는 것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구원을 받고도 아직 육신이 구속이 안 되었기에 육신에 질 일이 날마다 찾아옵니다. 자신이 자존자인 줄 알고, 누구를 지배하는 줄 알고, 무엇을 좀 아는 줄 알다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느 청년이 부모가 열렬히 반대하는 결혼을 힘들게 하면서 승리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 가정의 노예가 되어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아내의 노예가 되고, 아이들의 노예가 되고, 돈의 노예가 됐습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서 자유를 외치며 가출을 했다가 방탕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유라는 이름만 있었지 실체는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아픔을 알지만 그 아픔의 원인을 모릅니다.
갈등 속에, 고민 속에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기 때문인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비바람이 치고 창수가 나기 전까지는 내가 반석 위에 집을 지었는지, 모래 위에 집을 지었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얼마나 깊이 병든 상태인지를 알아야 되는데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내적 치유에서 실제적으로 치유가 많이 됩니다.
내적 치유는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현대 심리학 연구에 논리적 근거를 두고 신앙상담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속에 없는 사람은 과거가 현재를 붙잡고 압박할 수 있지만, 성령이 내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과거의 상체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 인들이 과거에 발목을 붙잡혀서 하나님 나라의 영상이 희미한지 모릅니다.
과거에 상처받았던 일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현재의 모습과 연관시키면서 진단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상담을 들은 사람은 마치 새로운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내가 그래서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됐구나'' 합니다. 그리고 나는 원래 나쁜 사람이 아닌데 조상 때문이야, 부모 때문이야 하면서 자기는 비켜가고 안심하며 위로를 얻게 됩니다.
분명히 긍정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성격이 연관되었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현재가 고쳐집니까?
현재를 치유해야 되는데 날마다 과거를 치유한다고 하는 것이 과연 옳은 방향이겠습니까?
이론적으로는 타당한지 몰라도 그것이 지나치면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과거의 잘못과 상처를 떠올리게 되고, 그런 식으로 상처를 지나치게 떠올리면 해결은 더 어렵게 됩니다.
모든 책임을 과거로 돌리고 싶은 겁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당신 때문에 내가 먹었다''면서 누군가를 탓하는 것이 100% 죄인의 특징입니다.
현재의 행동과 증상을 과거의 상처나 기억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이론, 심리학자 프로이드의 정신결정론이 이론적으로 맞는 이론일지 몰라도 그 이론을 너무 좋아하면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이론을 따르기에는 우리의 현재, 오늘과 내일의 삶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현재(present)가 선물(present)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이 선물인 것을 모를 때 과거 때문에 미래가 빵점이고, 오늘도 빵점입니다.
그래서 앞날을 향해 힘차게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령충만을 원해야 합니다. 성령만이 살리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 나의 삶에 살리는 영이신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이 과거의 상처가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다는 걸 아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우리의 모든 조상의 저주는 그리스도의 피로, 오늘 성령 충만함으로 끊어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현재의 삶에 정기를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은혜로 현재를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자녀의 특징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입니다.

14~15절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지난 시간에 내가 예수 믿고 나서도 육신에 질 일이 너무 많아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렇게 자기를 인정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앞뒤가 안 맞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두 말씀이 다 맞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육신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한 말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죽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해서든지 딴 길로 갈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매를 때려서라도 데리고 가십니다.
매를 때리기 이전에 성령의 사람과 세상의 사람에게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마음은 아무리 육신의 쾌락을 원해도 대답은 ''아니오''로 나옵니다. 또 은혜가 있는 성경공부를 사모하고, 간증을 듣고 도전을 받게 하십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옳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하십니다. 내가 비록 죄를 짓는다고 해도 그게 옳지 않다는 걸 압니다. 그렇지 않다면 다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힘은 강력이라서 우리를 얼마나 세밀하게 간섭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를 이끌고 가십니다.
13절에 "몸의 행실을 죽이면"의 "죽이면"은 현재 동사이기 때문에 날마다 몸의 행실을 죽여야 됩니다. 어떻게 몸의 행실을 죽입니까. 어떻게 끊습니까. 그 중독된 것을 어떻게 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는 어떤 분입니까.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분입니까.
''아바마마''입니까. ''아버님''입니까. ''아빠''입니까.
세 가지 중에 어떤 것입니까.
아람어로 "아바"는 ''아빠''라는 뜻입니다.
가까운 아버지, 친밀한 아버지에 대한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아빠로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빠''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얼마나 친하십니까.
"부르짖는다"는 말은 아기가 너무 좋아서, 반갑고 급해서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서 내는 소리입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나를 위해 무엇이든 해줄 것 같은 아빠입니다.

헨리 블랙코비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 예수님은 비전을 내걸지 않으셨다. 대신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다.
세상의 리더십 전문가들은 예수님이 마치 산꼭대기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혼잣말하는 것처럼 그리곤 한다.
''어떻게 추종 세력을 모아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할까? 기성 종교인들을 설득해야 할까? 군중들에게 설교해야 할까? 거창한 기적들을 연달아 행해야 할까?
아니다. 열 두 명의 인생에 내 자신을 투자하자. 내가 떠난 뒤에 대신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을 철저히 훈련시키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투자하며 그 수가 배가될 것이다. 그렇게 내 나라를 전 세계로 확장되게 하자.'' -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을 너무나 오해한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의 핵심은 아버지와의 관계였습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갈 2:2)이라는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리더십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때가 차매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려고 목회 방법론을 배웠습니까. 목회를 성공적으로 하려고 어디를 쫓아다녔습니까. 처녀 몸에서 나신 예수님처럼 저도 수치를 많이 당하고, 수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 조롱받는 인생을 사시고 율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율법 아래 나셔야 했습니다. 저도 이 땅의 많은 사람의 고통을 품고 가기 위해서 제가 고통을 당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제가 에노스가 돼서 너무 병들고 약하기 때문에 주님을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녀도 공예배에서 기도하시는 장로님들이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기도하시는 것을 별로 못 들어봤습니다.
제가 교회를 하고 큐티 모임을 하게 된 것은 주님과의 친밀함 때문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의 리더십도 영적 리더십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인 되신 아버지와 친밀하지 않으면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버지를 아셨기 때문에 그 분의 목소리를 알고, 그 분의 뜻을 이해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셨기 때문에 학벌도 없고 목수의 아들이었지만, 사람들을 사랑하셨지만 사람들의 의견에 휩쓸려 사명에서 빗나가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제가 무슨 행정을 하겠습니까. 조직 사회에 있어봤습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많은 이들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날마다 육적인 일, 결정해야 될 일들 많습니다. 교회를 하면서도 결정해야 될 일이 많습니다. 저는 나이 50이 되도록 목회할 생각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아버지를 사랑하며 말씀을 보고, 그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받았을 때 여기까지 인도하셨습니다. 말씀대로 인도함받고 가는 게 제일 확실한 것이라는 걸 제가 날마다 간증합니다.

헨리 블랙커비는 말합니다.
- 예수님의 모본은 그분의 ''방법론''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아버지 뜻에 대한 그분의 절대적 순종에 있다.
영적 리더는 하나님이 자신의 리더임을 안다. 열쇠는 아버지가 계시하신 모든 뜻을 잘 간직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리더는 하나님 아버지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면서도 무서운 게 많으십니까.
아플까, 망할까, 떨어질까 무서우십니까. 어떤 분은 말이 씨가 된다고 떨어 진다의 ''떨''자도 싫다고 합니다. 기도를 해도 붙게 해달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두려우십니까.
아직 사망에서 자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고 싫어하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과 친하다면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친해서 하나님께서 돈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분노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무너져가고 있는 부부관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시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총선에 대해, 북한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직장 생활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에게는 알려주십니다.
순수하고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엄마 품속에서 무슨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너는 우리가 너를 위해 해준 모든 것에 감사해야한다''고 부르짖는 부모들은 심각할 정도로 사랑이 결핍된 사람들입니다.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자기 희생이 아닙니다. 사랑은 자기 확대입니다.
사랑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좋아서, 사랑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위축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랑의 목적이 항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육 간의 건강과 성장에 있습니다. 그 외의 어떤 것도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한테 이렇게 했으니까 당신도 이렇게 해야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록 그 사람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적으로 건강하고 자라 가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목사로서 저에게는 여러분이 육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사랑입니다.
목자가 목원에게 갖는 사랑도 그것입니다. 나한테 뭘 줘서가 아니라 목원들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녀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배우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나한테 뭘 주어야 사랑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자녀가, 배우자가 성경을 알고 읽어 가는 것을 보며 너무 기쁘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돈도 못 벌고, 공부도 못하고, 내가 열심히 키워줬는데 나의 사랑을 모독할거냐'' 이러는 건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에 성령님은 구체적으로 우리의 목장예배, 나눔, 중보기도, 간증을 통해서 끊임없이 인도하십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1년에 한 번 교양강좌를 듣기 힘든데 평생 듣지 못한 이야기들을 교회에 와서 듣습니다. 나의 죄됨을 날마다 쳐다보면서 인간답게 살게 하는 교회보다 위대한 곳은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모여서 또 다른 어려운 사람들을 향해서 나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16절 -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성령이 증거하십니다.
인간 배아 복제를 통해 난치병 치료에 쓰이는 줄기 세포를 만들어서 세계적 생명공학자로 우뚝 선 서울대 수의학과 황우석 교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기기도 너무 잘생기셨습니다. 거기에다가 세계적인 학자가 됐습니다. 그 분은 연구를 위해 수없이 해외를 다니면서도 제일 싼 좌석만 이용하고 50불 이하 모텔에만 묵는다고 합니다. 제일 싼 비행기를 이용하느라고 두 개 도시를 방문하는데 여덟 개의 도시를 거쳐서 간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이번 연구로 많은 새로운 기술이 개발돼서 국제특허출원이 이루어졌는데 거기에는 로얄티가 있어서 수입과 직결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황 교수는 로얄티의 60%를 서울대에 넘겼습니다. 나머지 40%도 이번 실험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연구진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줘서 황 교수의 지분은 ''0''이라고 합니다.
황 교수는 35평 아파트에 전세로 살고 있고, 연봉이 6천만원을 받으면서 하루같이 새벽 출근을 하면서 공휴일, 토요일, 일요일을 다 반납하고 실험에 매달립니다. 매년 ''광우병 안 걸리는 소'' 등 각종 연구 실험에 드는 비용이 약 20억인데 훨씬 더 지원 받을 수 있어도 ''풍요 속에 나태가 온다''는 삶의 철학 때문에 절대 더 이상은 안 받는다고 합니다.

이번 주에 또 어떤 기사가 났는가 하면 어떤 부산의 목사님이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삼성 장군 행세를 하며 사기를 쳤다고 합니다. 그것도 신도와 같이 짝을 이루어서 사기를 쳤습니다.
그런데 황우석 교수가 기독교 신자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독실한 불교 신자라고 합니다. 매월 새벽 네시 예불을 거른 적이 없다고 합니다.
황 교수의 연구는 불교의 윤회 사상이 철학적 배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믿거나 말거나 성경을 인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3장에 선악과를 먹은 인류에게 벌을 주실 때 생명나무를 화염검 든 천사들로 지키게 하셨고, 생명 나무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황 교수처럼 대단한 분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모르는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듭나는 것말고, 인간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육체가 영생하는 것을 금하셨다고 했습니다. (창3:22~24)
삶으로 완벽한 황 교수가 어떻게 100% 죄인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이 하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안 믿어지는 하나님을 내가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쉬는 날 없이 사역을 해왔는데 똑같이 휴일을 반납하고 살아도 천국 백성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을 어떤 분이 주셔서 읽었는데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에 남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저자가 천국과 지옥을 봤는데 너무 착하게 살다가 젊어서 돌아가신 저자의 엄마가 지옥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또 아버지도 너무 착한 분이었는데 지옥에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 집안 식구가 다 착하게 살았는데 다 지옥에 있었다는 겁니다.
천국은 확실히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가는 것입니다.
부부라고 갑니까. 부모 자식이라고 갑니까. 못 갑니다.
성령이 친히 영으로 더불어 증거 하시지 않으면 누구도 알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시지 않으면 이렇게 착하고, 완벽하고, 의로운 황 교수도 모르는 천국을 내가 알았다는 것 아닙니까. 왜 내가 알게 됐습니까. 나는 병들고 약한 에노스가 되어서 하나님밖에 부를 수가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한 지 모릅니다. 감사하십니까.

세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받는 사람입니다.

17절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그리스도인은 ''팔자''가 변해서 ''십자가'' 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모르고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알고 당합니다. 고난이 왔을 때 모르고 당하는 것과 알고 당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할 수 없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자원하여 받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고난이 오기 전에는 내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인지, 반석 위에 지은 사람인지 내 자신이 모릅니다. 창수가 나고 비바람이 몰아쳐 봐야 됩니다. 내가 얼마나 깊이 병든 사람인지는 창수가 나봐야 압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상속자이기 때문에 후계자 수업을 해야 합니다. 재벌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 아들을 고생시켜가면서 총수 아버지들이 안간힘을 씁니다. 세상에서도 일류가 되려면 이렇게 훈련을 시키는데 거기에 따라오는 것이 아픔입니다.
세상은 뭐가 뭔지도 모르고 일류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삼성그룹은 하청업체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훈련을 시킨다고 합니다. 물건을 잘 납품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중을 생각하고 엄청나게 투자를 하는 겁니다. 결국은 삼성이 유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하청 업체 사장들은 너무 좋아서 따라갑니다.
그것보다 더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상속자 훈련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따라오는 것이 아픔입니다. 아픔을 주시지 않으면 이 땅의 육신을 좇다가 멸망하고 맙니다. 암은 아픔이 없어서 진행이 될 때까지 모릅니다. 하지만 감기는 드는 순간부터 아프기에 치료가 되는 겁니다.
7장에서 내가 원치 않는 바 악은 행하고,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않는 100% 죄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이제 8장부터는 성령의 도움밖에는 살 길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교회는 정말 ''한 사연''하는 사람들이 모여있습니다.
그런 사연들을 내어놓으면서 서로 죄를 고하는 모습이야말로 천국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병 낫기 위하여 서로 죄를 고하라"(약5:16)고 했습니다. 서로 죄를 고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우리들교회 목장모임에서는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자기 죄를 고하고, 부도가 나도 자기 죄를 고하고, 병에 걸려도 자기 죄를 고하고, 누가 때려도 자기 죄를 고합니다. 자식이 가출을 해도 자기 죄를 고합니다.
그 힘든 가운데에서도 남편, 자식이 아닌 자가 죄를 고하니까 문제 가지고 왔다가 저절로 치유가 됩니다. 너무나도 감사하게 목장마다 천국의 모습입니다. 목장 모임에 가서 지체들의 고백을 들으면 내가 얼마나 병든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위선자고 때가 낀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저절로 진실해져서 치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난 가운데에서 주님의 해석과 더불어 같이 고난받는 모습이야말로 천국의 모습이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 목장 모임에 안 가시는 분들이 있다면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주일 예배 한 번 가지고는 우리의 일상 생활이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육신의 중독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서 도전을 받고,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은 지체들의 죄의 고백을 보면서 내 죄가 치료가 됩니다.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면 그리스도 부활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이며, 결국 우리는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정기가 있습니다. 성령 안에 거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몸의 행실을 죽입니다.
성령은 살리는 영입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아빠''로 부르는 친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성령이 증거하십니까.
내 옆의 모든 사람들을 성령이 증거해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고난도 기쁘게 받기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대단한 신분의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상속자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신분이 대단한 사람이고, 남을 살려야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잠시간의 고난을 기쁘게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함께 계셔야 이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실 때에만 육신을 죽일 수 있습니다.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