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호목사 (오륜교회)

최근 들어 사회 곳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웃 나라 일본도
5년 연속 3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끊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하루평균 36명이 자살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시간단 1.5명꼴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카드 빚에 시달리던 30대 주부가 자녀 3명과 함께 동반자살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살의 이유를 보면 어떤 학생은 성적 부진 때문에 어떤 청년은 인터넷 게임 중독 때문에 어떤 사람은 사업의 실패로 말미암는 생활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래서 상담 심리학자들은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폐쇄적인 인간이 되지 않도록 할수만 있으면 대화를 많이 하고 국가 차원의 사회안전망 확충이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맞습니다. 정말 대화가 필요합니다. 사회안전망 확충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면 우리 인간의 삶은 허무하고 공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 하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답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사실 아무리 열심히 살았어도 아무리 많은 가졌어도 공허하고 허무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존재하는가?를 알아야 인생을 가치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을 성도, 크리스천, 하나님의 사람, 혹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자를 말합니다. 바울은 11절에서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11절)
누가 그리스도인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죄에 대하여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입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했습니다만 과거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17절)
우리는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우리는 모두 죄의 종이었습니다. 본래라는 말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죄의 종이 되었음을 말합니다.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의 종이 된 것이 아니라 본래 죄의 종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죄의 종이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죄가 곧 우리의 주인이었다 말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까지 죄는 나의 주인으로서 마음껏 나를 지배하고 농락해 왔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라! 살인과 간음을 행하라! 네 마음이 원하는대로 행하라!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죄를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의 종 노릇을 하여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죄의 종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까?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이 말은 누군가가 나에게 전하여 준 복음을 마음으로 순종함으로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전하여 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믿음으로, 영접함으로 죄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를 믿으면 우리가 죄에서 해방됩니까?
첫째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모든 죄값을 대신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나의 옛 사람이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그와 함께 연합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죄와 죽음의 법 아래 놓여 있던 나의 옛 사람이 이미 죽었습니다. 나의 죄악된 성품과 기질이 죽은 것이 아니라 아담 안에 있어 아담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았던 그 옛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죄는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와 관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죽어 버린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을지라도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은 처벌할 수 없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관계가 끝이 나듯이 나의 옛 사람이 이미 죽었음으로 더 이상 죄가 나를 지배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이 보다 더 큰 기쁨과 감격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보다 큰 축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사람은 감사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7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죄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사람은 감사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감사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많은 아픔이 있어도 지고 가야 할 십자가 내 앞에 있어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이 있어도 죄에서 해방된 사실을 인하여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정말 여러분이 예수를 믿음으로 죄에서 해방된 사람이 되었다면 날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의식화된 삶을 살라

더 나아가 내 자신이 죄에서 대하여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인 것을 날마다 의식화하며 살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11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지어다”(11절)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여길지어다”라는 동사가 현재 명령형입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그렇게 간주하여 생각하며 의식하며 살라! 그런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로 간주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로 여기라”는 말은 주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실 때 나도 그와 함께 연합하여 부활의 생명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엇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날마다 나의 옛 사람은 죽었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새로운 존재인 것을 확신하며,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 나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나는 과거에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의의 종이다.’ 날마다 자신의 신분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날마다 이 사실을 선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옛 사람이 죽을 때 죄도 죽었다’라는 사실을 의식하며 사십시오. 죄의 유혹이 있고 죄의 충동이 밀려 올 때에도 그 죄를 향하여 이렇게 외치십시오. ‘죄야!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너는 나를 주관할 권한이 없다’ 외치십시오. 이렇게 날마다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사십시오.
이렇게 내 자신의 신분과 더 이상 나와 관계 할 수 없는 죄와 나와의 관계를 의식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이 죄와의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주님을 닮은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자 훈련이 뭡니까? 의식화훈련입니다. 지금은 많이 사그라졌습니다만 과거에 운동권 학생들을 보십시오. 마마보이처럼 자란 아이들도 대학에 들어가 운동권학생이 되고 나면 상상을 초월한 투사로 변신합니다. 머리에는 빨간 띠를 두르고 손에는 화염병과 쇠 파이프를 들고 거리 투쟁에 나서는 그런 운동권 학생들을 보십시오. 그런 담대함이 어디에서 생겼을까요? 그런 용기가 어디에서 생겼을까요? 매일 노동운동, 인권운동, 민주화운동등과 관련된 책자를 읽고 매일 어떻게 하면 탄압받는 노동자 농민들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니까 그런 투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식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의식화가 필요합니다. 날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 말과 행동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이 나의 말을 지배하고 행동을 지배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말을 낳고 말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그 습관이 인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 거지가 왕자로 입양되었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 거지는 자신의 신분이 이제는 거지가 아니고 왕자인 것을 날마다 의식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나는 거지가 아니고 왕자다!!... 나는 거지가 아니고 왕자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거지 근성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날마다 ‘나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다!!...
나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다!!‘라는 이런 하나님의 자녀된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을 의식하며 살지 않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음으로 죄와 단절된 사실은 의식하며 살지 않습니다. 예배하는 시간에는 의식하고 기도하는 시간에는 의식하지만 가르치는 일을 할 때에는 잊어버립니다. 공부할 때에는 잊어버립니다. 운전을 할 때에는 잊어버립니다. 장사를 할 때에는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여길 지어다”는 말은 항상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의식하며 간주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또 어떤 성도는 연약하여 넘어지기라도 하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된 자신의 신분마저 빼앗겨 버리고 깊은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것에 대하여 한 예를 들었는데 너무 동감이 가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떤 사람이 요즘 같이 ‘무더운 여름철 깊은 밤에 자칫 부주의해서 문을 잠그지 않고 잠을 잤는데 밤중에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도둑이 집문서 땅문서, 인감도장 등을 몽땅 털어서 나가려고 하니까 그 집 주인이 너무 낙담이 되어서 그 도둑에게 하는 말이 “우리 집에 있는 재산을 당신이 다 가져갔으니 난 어쩔 수 없소 이제부터 당신이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시오 내 아내도 마음대로 하시오 난 완전히 포기하겠소” 이렇게 말하는 주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무리 도둑에게 재산을 다 빼앗겼다 할지라도 가장으로서의 자리를 내 놓는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연약해서 내가 깨어 있지 못해서 어둠의 영이 내 안에서 나를 넘어지게 하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나의 특권까지 하나님의 자녀된 나의 신분까지 빼앗아 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조금 연약하여 넘어지면 죄책감에 시달리며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구원의 특권과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까지 포기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신분은 변하지 않습니다. 특권은 포기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누리며 사십시오. 의식하며 살아가십시오.

날마다 은혜 속에 살라

14절과 15절에 보면 “은혜 아래 있음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14절)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5절)
성경에 은혜라는 단어가 275회 나옵니다. 유사어인 은총이라는 말이 43회 나오고 자비라는 단어가 48회 나옵니다. 로마서에만 은혜라는 단어가 112회 나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은혜라는 말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면 은혜란 무엇입니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호의와 사랑을 말합니다.

죄에서 해방된 자는 이제 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죄의 법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죄의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이 말은 법이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통치 영역 아래 있음을 말합니다. 새로운 통치 영역이 바로 은혜입니다.
법 아래 있는 자는 오직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거기에는 자원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순종에는 아무런 감사도 감격도 없습니다. 그런데 죄에서 해방된 자는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습니다.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은 은혜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죄에서 해방된 자는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인생을 삽니다. 은혜 속에 인생을 산다는 것은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셨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수고합니다. 바울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은혜''라는 말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옵니다. 예수를 핍박하고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했던 자신이 사도가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은혜가 헛되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수고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하듯 합니다. 더 많이 수고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더욱 강합니다.
한번은 리빙스턴이 16년간 밀림에서 선교하다가 27번째 말라리아에 걸려 사선을 헤매다가 아직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연약한 몸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사자에게 물린 한쪽 어깨와 팔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고 썩은 나무토막 마냥 몸에 힘없이 달려 있는 나약한 모습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아프리카에 들어가 그곳에 있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일, 그 일을 위해서 나를 불러 주셨다는 것을 놓고 즐거워하지 아니한 날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서 많은 희생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도무지 갚을 수 없는 하나님께 진 큰 빚의 작은 부분을 갚았을 뿐인데, 이것을 어찌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장차 영광스러운 소망과 복된 상급을 약속 받고 이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희생이 되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한다라는 말과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절대로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특권이라고 말하십시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결코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자는 이렇게 감격 속에 인생을 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강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강한 자가 되라”(딤후2:1) 고 권면했습니다. 여러분 교통 사고를 당하며 전신 화상을 입었던 지선이를 아시지요. 화상으로 인하여 그 곱고 아름다운 얼굴을 잃어버렸지만 얼마나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얼마나 영향력있는 사람으로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가 순교도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은혜를 잊어버리고 사는 자들이 많습니다. 은혜를 모독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자기의 사랑하는 딸이 다섯 살 때 동네 친구들과 함께 노는 것을 보고 시장엘 갔습니다. 그런데 시장에서 오다 보니 자기 집 앞에 소방차들이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남의 일이려니 생각을 하고 집 가까이 와서 자기 집에 불이 난 것입니다. 어머니는 놀란 마음을 가지고 현장에 가서 보니 동네 아이들은 다 나왔는데 다섯 살 먹은 딸만 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소방대원들이 만류했지만 어머니는 딸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그 딸 아이를 안고 밖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딸 아이는 눈썹 하나 상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15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다섯 살 난 딸은 이제 20세가 되어 어엿한 여대생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어머니가 길 거리에서 자기 딸이 친구와 이야기하며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자기 딸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나아갔는데 그 딸은 화상을 입은 어머니의 모습이 친구에게 부끄러웠던지 어머니를 향하여 모른체 하며 빨리 사라지라는 눈짓을 보내었습니다. 그때 그 옆에 있던 친구가 ‘야 저 아줌마가 너를 부르는 것 같은데 너 아는 사람이니?’ 그때 딸 아이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니야 난 몰라 어서 가자’ 그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렇게 어머니의 은혜를 모르는 자식이 있듯이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며 아니 배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맙시다. 하나님의 은혜 속에 강한 자로 살아갑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첫째로, 죄가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12절)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자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우리의 옛 사람도 함께 죽었습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것은 나의 옛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지 죄가 나에 대하여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을 몸에는, 육체의 본성에는 온갖 죄악된 성품들이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는 죄악된 성품과 기질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몸의 사욕을 순종치 않는 것을 말합니다. 몸의 사욕은 우리 안에 있는 온갖 육체의 일들을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0)
우리 안에 있는 것들입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지만 여전히 죄는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죄는 내 안에서 왕 노릇을 할려고 합니다. 나를 주장할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가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할까요?
첫째는, 나의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는 이런 온갖 죄악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의 보혈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서1:7) 우리는 많은 경우 죄를 짓고 난 다음 보혈을 적용합니다. 그러나 예방이 더 중요하듯이 죄를 짓기 전에 이 보혈을 적용하여야 합니다. 날마다 십자가의 보혈을 심령의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십시오. 삶의 현장에 십자가의 보혈을 덮으십시오. 죄의 유혹이 있을 때마다 보혈의 능력을 힘입어 그 죄를 물리 치십시오. 그러면 신비한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의의 병기로 드리라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는 둘째로, 자신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합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13절)
“드리지 말고... 드리며... 드리라!”
여기서 "드린다"는 말은 "바친다" "헌신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몸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고 , 예배하는 일에 헌신하라! 그런 말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몸은 의의 병기로 쓰임을 받든지 의의 병기로 쓰임을 받습니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무기처럼 쓰임을 받는 병기처럼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여러분의 발이 쓰임을 받도록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일에 나의 손과 입과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왜 우리의 몸을 의의 병기도 드려야 합니까?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있습니다. 수고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면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드림이 있어야 합니다.
시간도 의의 병기로!!... 물질도 의의 병기로!!... 취미도 의의 병기로!!... 재능도 의의 병기로!! 직업도 의의 병기로 드리십시오.
모든 것을 다.. 의의 병기로!!... 주님께 드려야합니다.

최근 출판된 책 가운데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내일부터 열심히 공부해야지.. 내일부터 바로 살아야지.."
이렇게 항상 결심만 하지.. 바뀐 것은 하나도 없기에... 바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바보요.. 남이 보아도 바보입니다.
항상 결심만 하고 실천이 없으니 그렇습니다. 우린.. 그런 바보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 결심만 하지 말고 당신의 몸을 의의 병기로 드리십시오. 술잔을 들며 담배를 피우던 손이 이제는 성경을 펼치는 손이 되게 하십시오, 음란한 것만 보던 눈이 성경을 보며 주님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눈이 되게 하십시오. 세상의 노래만을 부르고 불의한 말만 하던 입술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복음을 전하는 입술이 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은 바쁘게 살아야 합니다.
여인들 중에서도 자녀를 다섯 이상 낳은 여인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쁜 사람은 정신병에 걸린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살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몸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어느 목사님이 친구를 전도했답니다.
오랜 기도끝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친구를 교회로 불렀답니다.
친구가 오기는 했는데 와이셔츠 주머니에 담뱃갑을 넣고 왔답니다.
그래도 와 준게 고마와서 되도록 앞자리에 앉히고
목사님은 뒤에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제발 은혜받게 해 달라구...
설교는 시작됐고 친구는 은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담뱃갑을 꺼내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손수건을 꺼내 훌쩍거리면서
아주 톡톡히 은혜를 체험하더랍니다.
예배는 끝났고 사람들은 다 돌아갔는데 그 친구는 일어날 생각을 안하더랍니다.
옆에 가서 왜 안가냐고 물었지요.
"내가 은혜를 받았는데 어떻게 그냥가냐"
"그럼 어쩔려구"
"은혜를 갚아야지..."
"어떻게 갚을 건데.....?"
"이 교회 목사님이 총 몇분이나 되냐?"
"전도사님까지 한 50분 된다(대형교회임)"
"다 모이시라구 해라"
"아니 다 모아서 뭐할려구?"
"은혜를 갚아야 할 거 아니가?"
"어떻게 갚을 건데 목사님들을 다 모으라고 해?"
"내 오늘 한잔 쏠게!........^^!"

슈테른베르크가 그린 유명한 예수님의 그림이 있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빌라도와 유
대인들 앞에서 조롱을 받으면서 서있는 예수의 모습입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이 사람을 보라』입니다. 그림 밑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하였다.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이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은 하버겔이 쓴 찬송가가 185장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
여러분 무엇을 드리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