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근목사 (영안교회)

언어(말)
"말 한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라는 속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만큼 중요합니다. 실제로 말 한마디 때문에 상처가 되기도 하고 때론 평생을 마음 속에 담고 살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웃어른께, 친구에게, 자녀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그리스도인다운 언어를 사용하였으면 합니다. 하나님 주신 이 고귀한 입술로 온전한 언어생활을 함으로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유익을 끼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이에 바울이 손을 들어 변명하되,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너그러이 들으시기를 바라옵나이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우리 현대인들은 무엇보다도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TV 인기 프로그램만 봐도 그렇습니다. 요즘 TV 프로그램 중에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 토크쇼입니다. 여러분 토크쇼가 말하는 거예요. 밤중에 나와서 말하는 건데 이게 그렇게 인기가 있어요.
통계에 의하면 현대인들은 약 하루에 30번씩 대화를 하고 일생에 5분의 1을 말을 하는데 사용한다고 합니다. 굉장한 것이죠? 활동시간의 5분의 1을요. 남자인 경우에는 하루 2만 단어정도를 말하고 여자는 역시 여자라 1배반 정도 더 많은 3만 단어를 얘기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조금 있다가 예배 후에 휴게실에 가 보시면 제가 말씀드린 것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휴게실에 가보면 남자들은 주로 휴게실에 앉아서 커피를 마십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주로 커피를 주문해 놓고 입을 열고 있어요. 제가 예배 마치고 가끔 휴게실에 가 보는데 거기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들리는지 참새가 지저귀는 것 같아요. 그래도 우리 부산 사람들은 아직 목소리를 조금 톤을 낮춰야 되겠죠?

그러나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재미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우리의 이 말에는 막대한 영향력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몇 가지 영향력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먼저 말은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말이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 앞으로 10년 후의 여러분의 미래를 알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점쟁이에게 찾아가 볼 필요가 없습니다. 10년 후 여러분의 인생과 미래를 알기를 원하신다면 오늘 여러분의 언어를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늘 사용하는 말 가운데 불평의 언어를 내뱉습니까? 그렇다면 10년 후 여러분의 인생은 불평스러운 인생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굉장히 행복한 언어를 사용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10년 후에 반드시 행복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야고보 사도는 두 가지 예화를 우리에게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이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중요했으면- 두 가지 생생한 예화를 들었겠어요?

첫 번째 예화는 재갈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화죠? 여러분 경마장에 가보셨나요? 저는 경마장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 경마에 나가는 종마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TV에서 보고 생각했던 것과는 엄청나게 키가-길이가 아니고 높이가- 크더라구요. 제 키가 180Cm인데도 저보다 한참은 더 위예요. 저 말 위에 어떻게 올라탈 수 있을까? 저는 상상도 못하게 놀랐어요. 그런데 그 말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보통 1000Kg에서 1500Kg이나 된다고 해요. 종마, 잘 달리는 말들은 그렇게 크고 무거워요. 그리고 제가 백과사전에 찾아보았는데, 그럼 기수들의 보통 몸무게는 얼마인가? 세계적인 평균 몸무게는 42Kg입니다. 45Kg이 넘으면 훌륭한 기수가 될 자격이 없어요. 왜요? 몸이 가벼워야 되니까요. 자기 몸무게의 약 50배나 나가는 이 말들이, 이 자그마하고 가냘픈 42Kg의 몸무게를 가진 기수에게 꼼짝못합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그 말의 입에 재갈이 물려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의 입에 물린 그 작은 쇠붙이 하나가 그 큰 말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가 두 번째로 든 예화는 다름 아닌 배입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배는 얼마나 큽니까? 어떤 것은 수만 톤에 이르는 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작은 키 하나에 방향이 마음대로 좌우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깁니까? 우리의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인생의 운전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말에 따라 내 인생의 방향이 결정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아니하고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바꿀 뿐 아니라 때로 잘못 사용되면 내가 가진 모든 소유를 불태울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말 때문에 파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를 불에 들었습니다.

여러분, 얼마 전에 일어난 고성 산불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그 때, TV를 보고 굉장히 놀라기도 하면서 배운 것이 있어요. 대개 불이 한 5m정도만 길을 끊어 놓고 나무를 놓지 않으면 건너편으로 붙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데 그 당시 TV를 보니까 고성 산불에는 이 불이 강을 건넜어요. 약 100m가 넘는 강을 가로질러 이쪽 산에서 저쪽 산으로 붙는 것을 보게 되었어요. 저는 그 장면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불이 어떻게 그렇게 붙을 수 있을까 했는데, 바람이 세게 부니까 이쪽 산에 활활 타는 불이 그냥 날아가요. 날아가서 건너편 산에 딱 붙는 거예요. 강을 건넜어요. 연료의 크기의 백 수십 배를 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올 가을에는 송이버섯 값이 두 배는 오를 거라고 하죠? 송이버섯이 문제입니까?
여러분. 앞으로 그 산림을 다 복구하자면 30여 년에서 40년 아니 50년이 걸려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자연이 다 파괴되었어요. 수많은 짐승이 죽고, 사람들이 죽고, 가옥이 불탔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불의 출발점은 어디였어요? 성냥개비 하나였습니다. 담배꽁초 하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이러한 능력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십니다.

말에 이런 큰 영향력이 있으니까, 과거 우리의 선배들 가운데 중세의 어떤 사람들은 아예 말을 하지 않아야 되겠다고 해서 침묵의 훈련을 즐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날도 한사람이 프랑스에 있는 한 수도원을 찾아갔습니다. "내가 말실수를 많이 할까봐 내 혀를 훈련하기를 원합니다"라는 입문 원서를 썼어요. 그 수도원의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1년에 딱 두 마디의 말만 할 수 있는 거예요. 여러분, 얼마나 기가 막혀요. 1년 동안 침묵하다가 땡하고 1년이 되면 두 마디를 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3년을 훈련을 해야 됩니다. 이 사람이 열심히 도를 닦았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침묵했습니다. 사람을 봐도 말하지 않았어요. 입을 꽉 다물었어요. 그리고 1년이 다 되는 날, 사람들 앞에 나와서 딱 두 마디를 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이 "딱딱한 침대"라고 했어요. 수도원 생활이 굉장히 힘들었던가 봐요. 더 이상의 말은 허락이 되질 않으니 그렇게 하고 끝냈습니다. 또 한해가 지났습니다. 2년이 지난 후, 이 사람이 사람들 앞에서 "차가운 밥!" 이라고 했어요. 식은 밥을 주었던 모양이죠? 굉장히 힘들었는가 봐요. 이제 3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두 마디를 하고 내려가면 됩니다. 이 사람이 마지막 두 마디를 하는데, "다 끝났다!" 라고 말했어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렇게 말했겠어요? 그 말을 들은 수도원장이 떡 올라오더니 "방금 내려가신 분은 실격입니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까. 너무 놀랐어요. 아니 그렇게 1년 동안 두 마디 밖에 안 했는데 말의 훈련에 실격이라는 거예요. 원장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사람은 3년 동안 불평밖에 말한 게 없습니다." 말의 훈련이, 언어의 훈련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씀해 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용하는 이 언어에는 위대한 영향력이 있습니다. 말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뿐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를 때로 파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언어는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도대체 어떠한 말을 해야 한단 말입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언어의 특징 몇 가지를 소개해 주고 계십니다. 오늘 이 아침에 본문이 가르쳐 주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언어의 모습을 다 발견하고 돌아가는 우리 사랑하는 영안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한 내용들을 기록한 거예요. 여러분, 사도행전을 쭉 읽어보시면 사도행전 21장부터 오늘 이 26장까지 사도 바울은 적어도 여섯 번에 걸쳐 자기 자신을 변호하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체포된 후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재판 받기까지 사도 바울에게는 여섯 번 자기를 변호할 기회가 주어져서 사도 바울은 변호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마지막 변호가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언어를 알기 위해서 오늘 이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을 위해 변호한 언어의 내용을 살피는 것은 너무나도 합당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이 여섯 번의 변호를 통해 사도 바울은 과연 어떤 언어를 사용했던가요? 우리가 이 핵심 주제를 알기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언어의 모습이 사도 바울의 언어의 모습과 같이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1. 능동적인 언어

오늘 본문이 사도 바울의 변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첫 번째 언어의 모습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첫 번째 언어의 모습은 다름 아닌 능동적인 언어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말이 상대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예요.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자세히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에 따라 그 말이 얼마나 달라지던가요? 상관에게 하는 말과 자기 부하직원에게 하는 말이 틀립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말과 집안에서 하는 말이 틀립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람에 따라, 대상에 따라 말을 달리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타임지에 난 재미있는 만화 하나를 봤습니다. 사람들의 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려진 만화였어요. 하루는 한 뚱뚱한 중년 부인이 돼지 고기 반 근을 사기 위해 정육점에 들렀습니다. 그 정육점은 대단히 큰 정육점이었어요. 그래서 앞에서 손님을 맞는 점원이 있고, 고기를 썰어주는 점원이 따로 있었어요. 이 손님을 맞는 점원이 뚱뚱한 부인이 나타나자 이렇게 인사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오늘 참 아름다워 보이십니다." 굉장히 뚱뚱한데도 칭찬을 해 준 거예요. 과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어요. 이 점원이 "뭘 도와드릴까요?" 했더니 "돼지고기 반 근만 주세요." 그리고 미소를 싹 짓던 점원이 뒤돌아 서서 인상을 바꾸며 그 고기 써는 점원에게 다가가서, 그 여자가 뒤따라 온 줄도 모르고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야! 저 돼지가 지 살 반 근 달랜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귀퉁배기 한 쪽이 날아갔을 겁니다. 여러분, 극대화된 만화요, 평론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얘기는 우리의 세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 얼굴을 가지고 얘기하는지 모릅니다. 말이 능동적이지가 않습니다. 대상에 따라 말이 바뀝니다. 그런가 하면 환경에 따라 말이 바뀝니다. 내 사업이 잘 될 때 말이 다르고, 내 사업이 실패할 때 말이 틀립니다. 내 기분이 좀 좋을 때 말이 틀리고 내 기분이 나쁠 때 말이 틀립니다. 모든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환경의 지배를 받아 수동적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여기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제가 이 본문을 읽으며, 참으로 은혜를 받았던 것은 사도행전 21장부터 26장까지 사도 바울이 여섯 번이나 다른 대상자들에게 자기를 변호합니다. 그 대상자들은 판이하게 달랐어요. 어떤 때는 성난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는 말을 해야 했습니다. 어떨 때는 민중들 앞에서 말을 해야 했고, 어떤 경우엔 산헤드린 공회 앞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들 앞에서 말을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벨릭스 앞에서, 우리가 잘 아는 그나마 인격적인 베스도 앞에서 말을 해야 했고, 도덕적으로 형편없다고 지탄받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해야만 했습니다. 이 모든 다른 대상자들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사도 바울의 모습은 어떠한지 아십니까? 그가 사용한 언어는, 그의 변호는 한결같았다고 성경은 말씀해주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언어인가?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능동적인 언어이어야 한다는 걸 알고 계셔야 합니다. 대상과 환경에 상관없이, 내 마음속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기 때문에 한결같은 말씀을 쏟아놓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 사실을 3장에서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10,11절)

그 당시 이 야고보서를 받아 보던 많은 수신자들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했던 것 같아요. "너희들이 그 입으로 찬송을 하고, 그 입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형제를 저주하는도다. 어찌하여 샘물이 한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을 낼 수 있단 말이냐. 그것은 모순이다" 즉, 불가능하다라고 얘기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한결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달라져서는 안됩니다. 윗사람에게 하는 말과 아랫사람에게 하는 말이 동일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말과 집안에서 하는 말이 동일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와서 주님을 찬양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예배를 다 끝내고 "오늘 저녁엔 뭘 먹지?" 라는 내용으로 부인하고 의견 충돌을 일으키며 이를 가는 소리를 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누구라서 이러한 실수를 해보지 않았겠습니까? 저 역시 해보았습니다.

저는 사람에 따라 말을 달리 하는 것은 이제는 훈련이 된 것 같은데, 환경에 따라 말을 달리 하는 것이 아직도 절제되지 않습니다. 제가 화가 났을 때에도 한결같은 말을 해야 되는데 지난 2주전에, 우리 호진이를 야단을 치면서- 참 오랜만에 야단을 쳤는데- 제가 톤을 너무 높였어요. 그래서 광진이도 상처받고 집사람도 상처받고 저는 더 상처받았습니다. ''목사가 이럴 수가 있단 말이냐?''하며 내색은 안했지만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는지 몰라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우리 모두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예배 시간에 하나님 앞에 다짐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간구 하십시다. 우리의 남은 생애동안 우리의 말이 수동적인 언어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능동적인 언어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무엇이 그리스도인의 언어인가?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능동적인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내 환경 가운데 폭풍이 불거나 잔잔하거나 내 앞 길이 험난하거나 평탄하거나에 상관없이, 우리는 성령의 샘물을 가졌으니 당연히 단물만 내어야 하며, 능동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

두 번째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능동적인 언어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 이 말씀의 뜻이 뭘까요? 제가 좀 설명해 드리기를 원합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설명 가운데 성선설(性善說)이 맞을까요? 성악설(性惡說)이 맞을까요? 확실하지 않지만 성경에 의하면, 성악설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여러분 아이들을 키워보세요. 아이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좋은 말보다는 주로 나쁜 말을 더 잘 배워요. 좋은 말은 아무리 가르쳐도 잘 못 외우는데 나쁜 욕설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배워요. 그래서 그 아이들이 쓰는 언어를 가만히 보면,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쓰는 말, 집안에서의 언어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애들을 유심히 봅니다. 주일학교 오면 저 집안의 삶이 어떨까 생각하며 애를 지켜봐요. 그러면 금방 알 수가 있어요. 속일수가 없어요.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나쁜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나쁜 생각들을 그대로 쏟아낼 것인가 아니면 올바른 해석의 과정을 거쳐서 쏟아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나쁜 생각이 있어요. 문제는 그대로 낼 것이냐 해석해서 낼 것이냐 하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누구라서 마음에 상처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구라서 그 마음에 미움이 없겠습니까? 누구라서 그 마음에 섭섭함이 없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섭섭함이 있고 원망이 있고 미움이 있고 마음 안에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사람은 그 상처들을 올바로 해석한 다음에 말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마음에 있는 그 섭섭함과 미움을 그대로 쏟아내 버립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입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자신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예수님을 통해 해석한 다음에 얘기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안에 있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들을 그대로 얘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해석한 다음에 말하는 사람이에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정의예요.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얼마나 억울했겠어요? 2년을 넘게 아무 죄도 없이 감옥생활을 해 왔어요. 그런데 이제 아그립바 왕이 변명해 보라고 합니다. 저 같으면 어떻게 했겠어요. " 아하, 이제야 때가 왔구나! 이놈의 자식들! 아그립바 왕이여! 내가 무슨 죄가 있니껴." 그리고 그 사람들을 막 정죄하지 않았겠어요? 원망하지 않았겠어요? "당신이 왕으로 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재판을 질질 끈다 말이요?" 수많은 원망과 불평을 쏟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것이 뭔지 아십니까? 사도 바울의 이 여섯 번의 변명 가운데 그 어디에도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쁜 말로 사람들을 정죄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는 필터를 통해 해석한 다음에, 얘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과거가 해석되지 않은 자들의 언어의 특징이 뭔지 압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과거가 도저히 해석되어 본적이 없어요. 그런 사람들이 주로 내뱉는 언어의 특징은 다름 아닌 원망입니다. 잘 살펴보세요. 성경이 이것을 증명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그들을 이끌어 나왔어요. 그런데 그 과거의 은혜, 과거의 출애굽하고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를 내리시던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해석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내비칠 수 있는 것은 원망밖에 아무 것도 없었어요. 그래서 고린도 전서 10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왜 원망합니까? 예수님을 통해 내 과거를 한 번도 해석해 본적이 없으니까요. 예수님을 통해 내 현재를 해석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내뱉는 언어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불평입니다. 조금만 병이 들어도 불평합니다. 조금만 사업이 어려워도 불평합니다. 늘 입에 불평이 달려 있어요. 여러분, 예수 믿는 게 뭔지 아세요? 예수님을 통해 내 과거를 해석하고 나면 원망이 사라져요. 오히려 제가 지난번 말씀드린 대로 이런 말들이 마음에서 나옵니다. 입에서 "아하!", 예수 믿는 것은 "아하!"라구요. 깨닫는 것입니다. 무엇이 깨달아져요? 과거의 고통이 깨달아져요. "아하! 하나님이 그래서 내게 질병을 허락하셨구나! 하나님이 그래서 그 못된 상관을 나에게 주셨구나! 하나님이 그래서 그 시어머니를 통해 나를 연단 시켰구나! 아하! 하나님이 그래서 술주정뱅이 남편을 내게 주셨구나!" 아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과거가 해석된 자들에게는 감사만 있는 거예요. 찬양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달은 찬송가 작사 가운데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은 뭐라고 찬송했습니까?

내 인생 여정 끝내어 강 건너 언덕 이를 때
하늘 문 향해 말하리 예수 인도하셨네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 하셨네

하늘 문을 향해 크게 내가 외치겠다는 거예요. 뭘 외쳐요. 예수님이 인도 하셨다구요.
우리 3절 가사를 다 같이 한번 불러볼까요?

내 밟은 발걸음마다 주 예수 보살피시사
승리의 개가 부르며 주를 찬송하리라
매일 발걸음마다 예수 인도하시네
나의 무거운 죄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 예수 인도 하셨네

여러분 누가 이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내 인생 마지막날에 "나의 모든 무거운 죄짐을 다 벗어 놓고 주님 내 발걸음마다 돌아보니 당신이 인도하셨습니다" 라는 고백은, 예수로 말미암아 내 인생이 해석되고 내 과거가 해석된 자만이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고백인줄 믿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언어가 이러했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원망과 불평의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년이나 가둬 놓다니요. 아무 죄도 정하지 않고, 2년이나 감옥살이를 시키다니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 앞에서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변호를 보십시오. 그의 놀라운 변호가 여기에 나오는데, 몇 가지 자세하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 중요한 순간 자신의 결백을 알리기에도 모자랐던 이 시간에, 사도 바울은 자기의 결백을 위해 항변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수로 인해 자기의 인생 해석을 합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읽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좀 읽기를 원합니다. 9절부터 12절까지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 과거 자신의 삶을 이렇게 해석해 줍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 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과거를 해석하고 나니까 원망이 없어졌어요. 자랑이 없어졌어요. 과거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자기가 너무나 잘난 줄 알았습니다. 자기가 제일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나고 나서 자신의 과거를 보니 다 내 탓인 거예요. 부모님 탓이 아니었어요. 내 잘못이었어요. 남편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었어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얘기합니다. 아그립바 왕 앞에서 "아그립바 왕이여! 내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올바른 해석을 하고 보니까 내가 이렇게 어리석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는 거기에서 멈추지 아니하고 13절부터 18절까지 예수님 만난 현재를 얘기해 줍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를 만난 이후의 삶을 아그립바 왕에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이렇게 해석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인생이 해석되어져야 돼요. 우리 그리스도인의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있는 부정적인 과거, 내 마음에 과거에 받던 서러움, 손해 이 모든 것을 그대로 쏟아놓는 언어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석된 언어라야 할 줄 믿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언어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아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언어의 모습입니다. 아무리 고생을 했고,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서러움을 주었다고 해도 그에게 그대로 그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해석된 다음에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러한 언어생활을 할 때, 우리의 가정에 행복이 찾아옵니다. 우리의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로소 치료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저는 얼마전 한 성도의 간증을 들었어요. 누구라고 제가 얘기할 순 없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굉장한 갈등을 겪었던 사람이에요. 이유가 뭔지는 잘 몰라요. 그저 너무너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똑같이 교회를 다니고,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어머니와 등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저쪽 교회 나가고, 본인은 우리 교회를 나오고 있었어요. 갈라져서 교회를 나갔어요. 이제 그 어머니가 병들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 교회 나와서 2, 3년 지나며 말씀을 듣는 가운데, 자신의 그 과거가 다시 해석되기 시작했어요. 이전에는 어머니로 인해서 자기가 고생한 줄 알았고, 어머니로 인해서 좀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못간 줄 알았던 그 원망스러웠던 그 과거가 다시 해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병상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어머니! 이제 어머니가 곧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마음에 풀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도 울고 자신도 울고...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석된 언어를 내뱉는 자의 모습입니다. 용서가 있어야 돼요. 용서를 구해야 돼요. 괜찮다고 용납할 줄 알아야 돼요. 긍정적인 말이 그 입에서 나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언어는 어떤 언어인가? 능동적인 언어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여야 합니다.

3. 선교적인 언어

세 번째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것은 다름 아닌 선교적인 언어입니다. 29절을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로 해석된 언어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얘기해 주고, 부활까지 다 얘기해 버리고 나자, 그 당시 유대 나라를 다스리던 로마 총독 베스도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24절을 보세요.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미친 걸로 치부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우리보고 미쳤다고 할 때가 있어요. 그때 사도 바울이 눈을 돌려 아그립바 왕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베스도는 몰라서 그렇다 치고, 아그립바 왕이여 당신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제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제 말을 곧이 들어 주십시오." 라고 얘기하자 아그립바 왕이 대답한 말이 뭡니까? 28절입니다.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그때 사도 바울이 한 말이 "말이 적으나 많으나 내가 오늘 이 결박한 것 외에는 오늘 나를 둘러 싼 이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합니다."입니다. 여러분, 이 여섯 번의 사도 바울의 변호를 살펴보십시오. 그는 이 중요한 순간에 자기의 무죄를 변명하지 않고, 자기를 위해 증언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음을 어떻게 전할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금만 오해를 받아도 그것을 풀려고 애를 씁니다. 전화통을 붙잡고 한 시간이건 두 시간이건 자신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수많은 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질문을 해 보셨나요? 지난 한 주간 동안 하루에 2만 단어씩 총 14만 단어 가운데, 여러분이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는 과연 몇 단어나 되시나요?

저는 어느 날 이런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우리가 이 땅에서 사용한 이 영향력 있는 언어에 대해서 반드시 심판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공상만 하고 돈을 받는 과학자들이 있어요. 미국에선 놀리면서 공상과학자라고 하죠. 그런데 봉급이 굉장히 많아요. 그 사람들이 하는 일은 과학자는 과학잔데 말 같지도 않은 것을 상상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그냥 책으로 써서 주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공상과학자들의 공상이 거의 대부분이 이루어졌어요.
여러분, 수 백년 전에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누가 생각했겠어요? 처음에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새를 흉내내 가지고 여기다가(어깨) 날개를 달아서 언덕 위에 가서 이렇게 날려고 하다가 그대로 떨어져서 면상을 다 갈았어요. 그런데 결국 우리는 날았어요.

요사이 과학자들이 뭘 공상하는지 아세요? 사람들이 평생동안 했던 말을 다 녹음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과학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요. 왜 가능한지 아세요? 여러분, 우리가 라디오 방송을 어떻게 들어요. 극동방송에서 아나운서가 말을 합니다. 그러면 그 말을 전파로 바꾸어요. 그러면 그 말이 전파가 되어서 공중을 휘이~ 날아다니다가 수신기를 98.1Mhz에 딱 맞추면 그 98.1에 맞는 주파수는 라디오를 통해서 싹 끌려와요. 그래서 제 설교가 나가는 것이에요.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수십 억의 인구가 있지만, 사람의 목소리만큼 다양한 게 없다고 해요. 그래서 범죄수사에도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가 목소리를 통해 범인을 잡아내는 것이에요. 어떻게 잡아내는가? 한 사람도 똑같은 주파수를 가진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주파수가 다 달라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을 하면 이 말이 영원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여러분은 느끼지 못할지 몰라도 공중에 전파로 되어서 어딘가에 남아 있다고 하는 거예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수신기를 개발하는 거예요. 제 목소리의 주파수에 맞는 수신기를 개발을 하기만 하면, 이 공중에 남아 있던 모든 말들이 그 녹음기로 쏴악 들어오는 거예요. 제가 태어나서 응아하고 울 때부터 마지막 죽으면서 뱉은 말까지 모두다요.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훗날 그 어느 날 우리가 일생동안 내뱉은 언어가 다 여기에 진열되어 있다고 하면, 과연 그 중에서 "주님! 내가 당신의 복음을 위해 이런 말들을 행했습니다." 하고 주님 앞에 과감하게 내어놓을 떳떳하게 내어놓을 언어가 몇 퍼센트나 되겠는가?

여러분 어떻습니까? 말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한사람의 인생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가서 증인이 되라!" 주님이 우리에게 마지막 남기신 말씀은 다름 아닌 ''증인이 되라''는 거예요.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삶으로 전도하는 것을 많이 강조합니다만, 삶으로 전도한다고 하는 것이 입으로 전도하는 것을 결코 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말로도 전도해야 합니다. 말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만약사도 바울의 말을 여기에 다 진열해 놓는다고 하면 아무래도 80% 이상이 선교와 전도의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언어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이 말씀이 우리의 가슴에 심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나의 말은 능동적인 언어이었던가?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석되어진 언어였는가? 나의 말은 지금도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인 언어인가? 이 질문이 우리 가슴 깊이 남아 있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기도하십시다.
그 옛날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이런 기도를 주님 앞에 드렸습니다. "주여!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나의 마음의 묵상이 당신 앞에 열납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오늘 사도 바울과 같이 사도행전 26장에 나타난 이 바울의 언어와 같이 우리의 말을 바꾸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