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철량목사 (부천동광교회)

이 세상에서 큰 일을 했던 사람들은 자기 생애의 어느 시점에 확고한 사명을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인생의 발견 중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은 자기의 사명 발견입니다. 사람이 사명감을 가지면 사명감이 사람을 위대하게 만듭니다. 사명이라고 할 때 사(使)는 “심부름 사”자요 명(命)은 “목숨 명”자입니다. 하나님이 심부름을 시키려고 이 세상에 보내신 목숨이라는 말입니다. 심부름을 받고 태어난 목숨이 바로 나라는 자각입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만 자기 사명과 만날 때 얼마나 성실해지고 분발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살면서부터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사명은 그의 목표가 되고 사는 이유가 됩니다.
사람이 왜 사는 겁니까? 하루 세끼 잘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이 생의 목표라면 그 인생이 시시한 것 아닙니까? “나는 이것을 위해서 산다”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명적 존재였습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빌1:20) 이것이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사명자의 눈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는 사람은 눈물이 있습니다. 바울은 눈물의 사람입니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행한 것은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19절)라고 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겸손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자격증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들을 때 울었습니다. 울면서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실험실에서 눈물을 분석한 것을 보면 물이 90% 소금7% 단백질 2% 등입니다. 눈물을 화학적인 분석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기도는 탕자 어거스틴을 성자로 만들었습니다.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방탕했을 때 희망이 없는 그 자식을 가슴에 품고 눈물로 거듭나게 한 것입니다. 교회는 모니카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의 기도 사명자의 눈물이 어머니의 사명 교회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눈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액체입니다. 말로 설명하고 전달하려해도 안 되는 일이 눈물로는 통합니다. 눈물은 슬픔을 씻어내고 가로막힌 오해의 담장을 뚫어줍니다. 서로 다른 양극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눈물은 슬픔과 괴로움의 상징입니다. 31절을 보세요.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며 울었습니다. 눈물의 사도 눈물의 전도자였습니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3:18) 십자가의 사랑과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울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을 모르고 있는 그들, 믿어야할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울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땀과 눈물과 피로 세워졌습니다. 피로 세워진 교회를 키우는 것은 땀과 눈물입니다. 그 액체가 교회를 자라게 하는 영양분이라는 말입니다.
정신 병원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여성이 정신병자를 수용한 병실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처녀 한 사람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담당 의사가 처녀의 병세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방으로 인도하여 따라가 보니, 얼굴을 벽쪽으로 향한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광경은 너무나 불쌍하고 가련하였습니다. 의사가 함께 간 전도인에게 말을 걸어 보라고 했습니다. 전도 부인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하면서 그녀에게 다가갔습니다. 어깨에 손을 얹으며 눈물이 가득찬 눈으로 환자를 응시하다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전도자의 부드러운 음성과 흐르는 눈물이 정신 질환자의 마음을 열게 했습니다. 입을 꽉 닫고 말 한마디도 하지 않던 사람이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사랑과 동정에서 나오는 눈물의 힘이었습니다. 눈물은 위로하는 힘이 있습니다. 눈물로 씻어지지 않는 슬픔은 없습니다. 슬픈 자와 함께 우는 것이 최상의 위로입니다.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굳은 마음도 눈물로 녹여냅니다. 어떤 말보다도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에 가서 광부로, 간호사로 가 있던 동포를 끌어 않고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당시 우리 경제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차관을 얻어 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광부, 간호사를 담보로 돈을 빌려 왔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달라, 잘 살게 하겠다며 울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우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국가를 위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눈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지도자 말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것이 사명자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사도바울에게서 사명자의 눈물을 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눈물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해 가시는 주님은 울며 따라오는 여인들을 향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 눈물로 어머니의 사명을 감당하고, 눈물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사명자의 열심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는 사람은 열정가였습니다. 사명이 그런 열심을 갖게 합니다. 바울의 선교 현장에는 언제나 “유대인들의 간계”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에 앙심을 품고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훼방하고 공격했지만 그의 열심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의 열심은 태양과 같았습니다. 태양은 세 가지 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빛과 열과 힘입니다. 태양은 빛들의 왕입니다. 태양처럼 밝은 빛은 없습니다. 사명자의 얼굴은 태양처럼 밝고 빛납니다. 밝은 표정 밝은 생각 밝은 정신의 소유자입니다.
태양은 열정의 왕입니다. 태양처럼 뜨거운 것은 없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덩어리입니다. 지상의 만물은 태양열로 살아가고 열매를 맺습니다. 태양이 식으면 모든 것이 죽고 맙니다. 사명자가 교회를 살리고 민족을 살립니다. 사명자의 가슴에 꺼질 줄 모르는 열심히 불타고 있습니다. 햇빛의 뜨거움으로 여름 곡식이 자랍니다. 불이 뜨겁기 때문에 쌀이 밥이 됩니다. 뜨거운 심장, 뜨거운 마음, 뜨거운 사명감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뜨거운 것이 존재를 움직입니다. 뜨거운 말씀이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뜨거운 열의(熱意)를 열정이라고 합니다.
열심을 품고 외쳐보십시오.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하나님도 열심가 이십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긍휼을 베풀지라”(겔3 9:25)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처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위해 가고자 한다고 말합니다(22-23절).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는 것은 사명에게 자기 마음이 붙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예수님도 대단한 열심가이셨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살아있는 것은 움직입니다. 활동하고 일합니다. 우리 몸과 마음을 열심이 움직여야 합니다. 열심은 동력입니다. 열심 없이는 되는 일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16대 임금인 예후가 우상 숭배자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진멸하면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왕하 10:16)고 했습니다. 열심 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인류의 구원 사역도 여호와의 열심히 하신 일입니다(사9:7). 과거에는 열심히 교회를 핍박했던 그가 지금은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열심이 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열심기도로 성전을 완공하십시다. 우리의 열심 전도로 부흥운동을 일으키십시다.

사명자의 헌신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는 사람은 헌신합니다. 헌신이란 자기의 이해를 돌보지 않고 전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헌신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희생의 제물을 의미했습니다. 짐승을 잡아 드리는 것이 헌신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죽이는 것이 헌신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 자기를 온전히 드렸습니다.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소중한 자신을 주님의 소유로 드렸습니다. 바울은 힘에 지나도록 수고하였다고 했습니다. 있는 힘을 모두 쏟아 부었다는 말입니다. 기력이 하나도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 바울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위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 주님이 택하신 그릇이었습니다(행 9:15). 그가 해야 할 사명은 오직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하셨습니다. 내가 해야할 사명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슨 사명을 감당하겠느냐고 생각하지 마세요. 물리학자와 과학자들은 멀리 아프리카에서 나비가 날개 짓을 하는 하찮은 일이 알래스카의 대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행동하나가 인류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미11“29-30) 예수님의 짐은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사명은 힘들지 않습니다. 즐거울 뿐입니다. 헌신이 행복합니다. 사명자는 사명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노예처럼 살지 말고 사명자로 사십시다.
류관순 열사가 친구들과 기차를 타고 가면서 기차 소리가 어떻게 들리느냐?고 물었습니다. ‘칙칙폭폭’ 한다고 했습니다. 자기 귀에는 ‘대한독립 대한독립’이라고 들린다고 하더랍니다. 류관순 열사는 대한독립이 사명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몸을 바치고 있습니까? 몸바칠 일도 없고 몸바칠 대상도 없는 인생은 공허하고 허무합니다. 헌신의 대상을 만나야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롬 12:1) 교회를 위해 복음 전도를 위해 헌신하십시오. 반드시 건강한 삶이 되고 참된 행복이 따라 올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든지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왜 사느냐고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할 것입니까? 가치를 추구하는 하나님의 사명자에게 눈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열심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목숨을 걸고 덤비는 헌신이 나옵니다. 질 높은 헌신이 있는 곳에서 경쟁력이 나옵니다.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무서운 힘이 발생합니다. 사명감을 가지고 사명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