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희목사 (지구촌교회)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북녘 땅의 평양은 기생과 환락의 도성, ‘한국의 소돔’으로 불러졌습니다. 그런데 불과 15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07년에 평양은 거룩함으로 불타는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1903년부터 원산에서 불이 붙은 성령의 부흥운동이 계속 남진하면서 일본의 식민 통치 하에서 가난과 상처로 멍든 민족을 치유하고, 꿈을 회복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교회는 성령 충만한 부흥을 통하여 절망당한 사회에 소망을 주었습니다.
성령의 부흥운동이 민족과 나라의 재건운동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의 부흥이 오늘의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1907년에 일어난 그 부흥의 현장을 잠시 영상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가 뜨겁게 부흥할수록 사회는 모두가 감탄할 만큼 새롭게 달라졌습니다.
해리스 선교사가 한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수천 명이 글 읽기를 배우기 시작했고 술주정꾼, 도박꾼, 도적놈, 오입쟁이, 살인, 도박, 광신적 유학자들, 구태의연한 불교신도들, 수천 명의 잡신 숭배자들이 새 사람으로 바뀌었으니”세상이 맑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회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학교가 설립되고, 문맹 퇴치 운동이 일어나고, 병원이 설립되고, 금주 금연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무속과 우상숭배에서 해방되고, 일제 식민지 정책에 대항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가 부흥하는 길만이 민족을 살리고 사회를 새롭게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근대교회 부흥의 최고 선구자인 챨스 Finney는 교회의 부흥운동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불화와 증오, 그리고 악한 험담들이 오고 간다면, 그때가 바로 부흥을 사모해야 할 시기이다.
교회 안에 세속적인 풍조가 자리 잡아 가고 있다면 그때 역시 부흥이 필요한 시기이다.
교인들이 천하고 추잡한 죄악들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가 일어나 신앙의 부흥을 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어야 할 때이다.
요즘 우리나라의 상황을 직시해볼수록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의 뜨거운 부흥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더구나 요즘 정부가 앞장서서 성매매 근절 운동을 펼치고 있는 바람직한 상황에서 교회는 더욱 성결운동을 위한 부흥회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시대적 상황마다 그에 맞는 부흥회가 계속 이어집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의 위기상황마다 사회와 민심을 새롭게 변혁시키고 치유하는 부흥회가 거듭 일어났습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곳곳마다, 지역마다 성령의 뜨거운 부흥회를 통해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고침 받고, 잡신숭배가 척결되고, 귀신이 쫓겨나는 축복의 해프닝이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부흥(Revival)이라는 말 그대로 교회가 부흥할수록 사람들은 “삶의 활력을 회복합니다. 힘을 되찾습니다. 생기와 원기를 되찾습니다. 사회가 소생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부흥의 축복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
어느 신학자의 말대로, 부흥이란 “땅위에 임하는 하늘이요, 땅에서 체험하는 하늘입니다.”
부흥의 본질을 얼마나 멋있게 설명합니까?
이번 대각성 부흥축제를 통하여 우리 모두 땅에 임하는 하늘을 체험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금세기 미국교회의 영적 지도자 John Maxwell은 부흥의 현상 여섯 가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첫째, 사람들이 기도한다. 부흥하는 교회일수록 기도가 뜨겁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임재하신다. 하나님을 개별적으로 깊이 체험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셋째, 사람들이 회개한다. 진정한 부흥은 옛 생활의 죄를 정리하고 거룩함으로 나갑니다.
넷째, 하나님이 사람들을 새롭게 소생시키신다. 부흥회를 통해 활력과 열정을 되찾습니다.
다섯째,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도하며 사랑을 나눈다. 부흥하는 교회일수록 전도와 사랑이 뜨겁습니다.
여섯째, 하나님이 사람들을 훈련시키시고 능력을 주셔서 주변에 변화가 일어난다.
이번 부흥회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변화의 도약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현대교회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식(survival mentality)에서 새 역사의 지평을 이루어 가는 부흥의식(revival mentality)으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저 근근이 현상 유지하는 교회가 아니라, 새 시대, 새 역사를 주도하는 부흥의식을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한 번 더 호소합니다. 교회가 부흥해야 사회가 새로워지고, 나라가 번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어느 지역을 가든지 반드시 기회를 만들어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스토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고대 트로이 제국의 항구도시 드로아에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체류하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잠시 머물면서도 성령으로 뜨거운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특히 이번 부흥회의 특징은 두 개의 톱니바퀴가 잘 맞물렸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의 열정과 듣는 자의 열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영적 합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열정과 그 말씀을 듣는 자의 열망입니다.
우리 다같이 입술로 표현하십시다. 【주여, 제 가슴에 뜨거운 부흥을 주옵소서!】

1. 은혜를 열망하자.

오늘 본문을 보면 드로아교회 교인들은 은혜 받는 일에 열정적이었습니다.
첫째, 주일 예배에 열심히 모였습니다. 모두가 주일 예배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둘째, 밤에 다시 모였습니다. 그들은 한 번이라도 더 모여 은혜를 받고자 열망했습니다.
셋째, 많이 모였습니다. 비좁은 다락방에 최대한 모였습니다. 웅신할 틈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넷째, 밤을 지새우며 날이 새기까지 철야하며 은혜를 갈망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열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은 열심히 모이는 곳에 임하십니다.
교인들 모두가 함께 뜨겁게 기도하는 곳에 성령님은 진동하며 역사하십니다.
주님은 은혜를 사모하는 자를 만족케 하시며, 좋은 것을 주십니다.(시편 107:9)
그렇습니다.
은혜는 사모하고 갈망하는 만큼 받습니다. 은혜의 자리에 와 있기만 해도 함께 성령을 받습니다. 반대로 시험 드는 사람들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은혜를 못 받아서 그런 것입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스스로 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청년이 그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9절을 자세히 보십시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리를 잘못 잡았습니다. 창문에 걸터앉았습니다. 은혜를 열망하지 않고, 그냥 관망하는 태도로 앉았던 것입니다. 은혜 받는 방법 중 하나는 자리가 중요합니다. 뒷자리보다 앞이 좋습니다. 영적 전자파가 강하게 흐릅니다.
J. 록펠러가 축복받은 세 가지 비결 중 첫 번째가 예배당 앞자리에 앉아 은혜를 열망했습니다.
앉는 태도부터가 중요합니다. 은혜를 받고자 열망하는 마음으로 자세를 취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말씀이 가슴에 와 닿을 때마다 아멘으로 입을 열어야 합니다. 입을 여는 만큼 은혜를 채워주십니다.

그 청년이 또 하나 잘못한 것은 깊이 졸았던 것입니다. 현대번역에 보면 몹시 졸았습니다.
은혜 받는 일에 별 관심이 없어서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편하게 졸기로 포기했습니다.
물론 바울 사도님의 설교가 너무 길어서 졸음을 이기지 못하게 한 것도 문제가 있지요.(조크)

여하튼 은혜를 못 받으니 졸음이 계속 되었고, 결국 3층에서 떨어져 죽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스펄젼 목사님은 참 멋진 해석을 합니다.
“만일 오늘날 우리가 설교 시간에 졸다가 죽는다면, 우리를 되살려줄 사도들이 없다는 점을 명심하십시오.”

중요한 점은 은혜를 못 받을수록 스스로 도태되고 침체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대각성 부흥축제에서 우리 모두 다 동등한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청년의 이름은 유두고입니다. 이름의 뜻이 참 좋습니다. 행운, 다행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떨어져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더욱 다행인 것은 동네의 여러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능력을 간증하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 핵심은 이 한 가지입니다. 비록 졸더라도 은혜의 자리에만 있으면 주님이 축복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모두 은혜를 열망하는 뜨거운 가슴으로 이번 부흥축제에 참여하십시다. 하나님의 능력을 놀랍게 체험할 줄 믿습니다.

2. 말씀을 열망하자

우리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부흥회의 핵심은 말씀 강론에 있습니다. 재미있는 코미디언 초청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순수한 말씀 강해의 부흥회입니다.
영국의 훌륭한 목회자였던 M. Lloyd-jones 목사님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교회사에 있어서 쇠퇴기는 언제나 말씀의 선포가 약화되었던 시기였다.”
오늘날 현대교회가 귀담아 들어야할 경고입니다.
옛날 구약시대의 부흥회는 아주 단순했습니다. 율법 책을 낭독했을 뿐입니다.
요시야 왕이나 히스기야 왕의 민족 부흥회 특성이 그렇습니다.
또 에스라 선지자의 부흥회는 큰 나무 강대상을 만들어 놓고 연일연야 율법 책을 낭독하는 부흥회였습니다. 새벽부터, 곧 이른 아침부터 정오까지 하루 여섯 시간씩 말씀을 읽고 해석해주었습니다.
그야말로 Bible Conference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옛날에는 부흥 사경회라고 불렀습니다.
말씀 중심의 부흥회, 거기에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cum verbum) 역사합니다. 성령님 자신이 말씀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성 부흥회나, 스데반 집사의 예루살렘 광장 부흥회는 철저히 말씀 중심이 사경회였습니다. 또 베드로나 사도 바울의 부흥회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 스토리로 하는 말씀 중심 사경회였습니다.
거기에 큰 능력과 기적이 동반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대각성 부흥축제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가슴에 불방망이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은혜체험이 있기를 축원합시다.(예레미야 23:29)
부흥회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말씀이 가슴에 부딪치고, 새겨지고, 각인되고, 남아야합니다. 변화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감동으로 영성 향상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금세기 최고의 선교학 교수이며 전도와 제자훈련의 대가이신 R. Coleman은 이렇게 지적합니다.
교회는 많으나 영적 영향력이 부족하다.
목회자는 많으나 영혼의 활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기도원은 많으나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고갈되어 있다.
성가대와 성악가들은 많으나 감동이 없다.
성경은 많으나 변화가 없다.
지도자는 많으나 존경받지 못하고 있다.
말은 많으나 들을 것이 없다.
조직은 많으나 사회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교회마다 연례적인 부흥회는 많으나, 진정한 부흥은 없다.

어찌 된 일인가?
영혼이 메말라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모자라서 그렇다.

그러므로 부흥회의 본질은 말씀의 영적 능력을 다시 체험하는 것입니다.
오늘 드로아교회 교인들은 해질 무렵 저녁에 다시 모여서 해 뜨는 다음 날 아침까지 말씀으로 충만한 부흥회를 가졌습니다. 즉 sunset to sunrise 부흥회였습니다.
이번 우리 지구촌교회 부흥축제도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여 기도와 회개, 삶의 변화가 있기를 원합니다. 또 영적 생기와 열정의 회복이 뜨겁게 타오르기를 호소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로리 헬론드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의 두나미스가, 성령의 능력이 내 속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그 부흥이 우리의 심령에 필요하다.’
우리 다같이 부르짖읍시다. 【주여, 제 가슴에 뜨거운 부흥을 주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살고, 나라와 민족이 사는 비결은 영적 부흥에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기생과 환락의 도성, 한국의 소돔성 평양이 동방의 예루살렘이 된 것은 성령 충만한 부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부흥이 필요합니다.
성령의 두나미스가, 성령의 능력이 내 속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시는 그 부흥이 우리의 심령에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뜨거운 가슴의 부흥을 열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