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국 목사 (대흥장로교회)

지난주에 나눈 말씀 이사야43:21에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 앞에서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보시면 부르심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라고 말씀을 하면서 가장 큰 핵심은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부르신 목적이 하나님 찬양이고, 부르심에 합당한 삶은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본문을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찬송을 부르는 자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좀 더 엄밀하게 보시면 3절에 “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말씀합니다. 하나가 되라는 명령어가 아니라, 하나는 이미 되었고 그 하나된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고백은 “하나가 되게 하소서....”가 맞습니까? “ 하나가 된 것을 지키라”가 맞습니까?.
요한복음17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제 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지상 교회를 남겨두시면서 최후로 기도 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저희로 하나되게 하소서, 악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 요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 22절-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하나가 되게 하소서...” 교회와 성도와 제자들을 남겨놓으시면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최후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셨고,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고백하는 말은 “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바울파십니까? 예수파 이십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가 되었는가?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의 피로 새롭게 됨으로부터 우리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12:13-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예수님 때문에, 그 십자가의 피흘리심으로 이루신 축복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2:에 보면 너희가 전에는 이방인이요 본질상은 진노의 자식들이었다. 그런데 엡2:13 “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예수의 피가 우리를 구속하셨고, 그의 성결한 자녀가 되었다는 말씀대신에 쓰신 것은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5:17이하에서도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을 하나됨, 화목하게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입니다. 때때로 훌훌 다 털어버리고 혼자 멀리 떠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으십니까? 다 싫다는 것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나 하나만을 떼어놓고 보면 괜챦은 사람들입니다. 의리도 있고 고상하고 멋있고.... 그런데 이게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게 되면 고상한 모습은 다 없어지고, 자기의 못된 모습들이 다 들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자녀들도 혼자 살아가면 고상한 것 같은데 성격이 올바르지 못하기가 쉽습니다. 흥부의 집안처럼 형제가 우글거리는데서 자라게되면 정말 힘들어도 그 가운데 아름다운 성격을 형성해 갑니다.
혹, 교회 생활을 하다가 보면 뒷짐 지고 멀리서 바라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평가하고 보는 눈이 맞아요. 잘못된 모습들이 보입니다. 난 도저히 그런 사람들하고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떠납니다. 관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도 그 속에 집어넣으면 그 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 바둑 훈수 실력은 보통 3-4급 더 높습니다. 밖에서 보면 보이는데, 그 속에 들어가면 나도 엉뚱하게 실수합니다 )
선교지에서 수고하는 선교사님들에게 가장 큰 고민이 있다면, 재정 문제나, 현지인 문제나, 날씨나, 안전 문제가 아니라,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함께 일한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선교사가 둘 모이고 , 셋 모이면 고통스러워요. 내 맘 같지 않고 다 다르니까요.... 바울도 바나바와 그렇게 가까우면서도 서로 다투고 헤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교회와 성도들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억울하고 힘들어도 하나가 될 때에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하나님이 감탄하시는 기쁨은 “하나됨”이듯, 예수님은 지상 최후의 기도에서도 “하나됨”이 우선이었습니다.

1.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라

3절을 보면, 옥중에 있는 바울이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이 있습니다. “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가 하나가 된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막혀있는 모든 담을 무너뜨리시고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도 결코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상 22:2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 사무엘상 말씀에 보면 16장부터 다윗이 등장합니다. 이새의 말째아들 목동 다윗이 등장하여 하나님께서 훈련을 시키심으로 통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십니다. 그런데, 골리앗을 물리치고 난 후부터 사울왕은 “ 사울의 주인 자는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이 백성들의 노래에 분노하여 사무엘상 18장부터는 다윗을 죽이려고 애를 씁니다. 심지어는 자기의 딸을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애를 씁니다. 첫째딸 메랍을 줄테니 블레셋과 싸우라.. 그래서 나가서 싸우고 이기고 옵니다. 그 때에 메랍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냅니다. 그리고 미갈을 걸고 또 말합니다. “아무런 결혼 준비도 필요없고, 블레셋 사람의 껍질 100개를 원한다” 혼자 블레셋에 가서 죽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가서 당당 이기고 양피200개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사울왕이 다윗을 간접적으로 죽이려고 했고, 은근히 자기는 뜻이 그렇지 않은데 실수로 죽인것 처럼 하려다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본색을 드러내고 다윗을 죽이려고하는 것이 사무엘상 22장부터입니다. 그런데 그 첫 모습이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환난당한자, 빚진자,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 400명이 모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용사들이 주몽부대의 다물군 처럼 용맹하고 싸움 잘하고 일당백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합지졸들이고 다 한이 맺힌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하면서 다윗을 깎아 나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공동체의 모습이요, 교회의 모습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나 자신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은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자신의 약점을 발견하고 거기서 스스로 깨어지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완성되어 나간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우리의 모습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도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실 때에, 뒷짐지고 계시지 마십시오. 그들과 더불어 우리를 온전케 이루어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의 최고의 축복입니다. 요한복음1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원리도 “하나됨”이고, 풍성한 열매의 원리도 “하나됨”이고,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는 능력의 삶의 원리도 “하나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도 “저가 내 안에 , 내가 저 안에...” 일치와 하나됨입니다. “과실을 많이 맺는 것”도 하나됨입니다. 또 요15:7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능력, 살아있는 기도의 능력은 하나됨에 있습니다.
오늘날, 부흥하는 교회의 원리는 딱 하나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교회” 초대교회와 같이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하나가 된 것을 힘써 지키는 교회”입니다. 요즘, 미국에 부흥하는 교회들을 조사해보니까, 모두가 Community 라는 이름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연합교회”입니다. 이름에 community가 들어가서 부흥하는 교회가 아니라, “그만큼 하나됨”에 힘쓰는 교회가 성령님이 역사하는 교회임을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 하나님께서는 다투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하나되지 못한 마음으로 아무리 불러봐야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가 되지 못합니다. 토요일이면 혹 마음에 미움과 다툼이 없는가를 돌아보것이 아름다운 예배의 준비입니다
이미 우리는 성령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공동체에 들어가십시오. 여전도회, 남전도회, 구역, 제직, 모든 공동체에 들어가십시오. 그들이 모가난 400용사라 할지라도 성령님은 우리로 하나가 되게하시고 가운데 우리를 온전케 이루어가십니다.

2. 하나 됨의 구체적 실천 단어 4개 (겸손, 온유, 오래참음, 사랑)

성령의 하나 됨을 위하여 구체적인 단어를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한국에서 어떤 원로급 목사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 힘을 썼습니다. “불교, 힌두교, 유교, 이슬람교, 기독교 이것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정작 기독교 내에서 조차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를 보아도 이교도, 우상숭배자들과 하나가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헛된 노력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지상 평화”라는 목적이라도 어떤 종교도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 이외에 다른 신에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 십계명의 제일 첫 번째이며,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빼놓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한 하나님, 한 성령, 한 그리스도, 한 믿음, 한 세례 안에서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 성령운동입니다.
그 하나 됨을 위한 구체적인 동사를 2절에서 4개를 말씀합니다. “ 겸손, 온유, 오래참음, 사랑의 용납”입니다.
1)겸손 - 하나되기 위해서는 첫째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겸손의 반대말은 교만이고, 그 뜻은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인류가 죄악에 빠진 죄악의 시작이 바로 교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고하는 마음들입니다. 사단의 시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이사야 14:12-15절 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루시퍼가 타락한 것은 하나님과 같아지고 그 보좌에 앉으려는 교만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단의 특성은 교만입니다. 요한삼서3:9절에보면 “장로 요한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한 사람, 이사람을 조심하라... 이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입니다. 이사람의 특징은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는 축복을 누리시기 원하십니까? 모든 사람은 나보다 낫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멀리하시며 결코 용서하지 않습니다.
2)온유- 하나되기 위해서는 둘째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의 뜻은 유약한 자라는 뜻이 아니라, Power under control (통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원래의 뜻은 야생마가 길들여져서 주인의 말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감정이 쉽게 폭발해 버리고, 화를 내고, 통제가 안되고... 이러한 사람이 온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내가 화를 내고, 감정이 폭발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있는 행위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3) 오래 참고 - 하나되기 우해서는 셋째 오래 참아야 합니다. 믿음은 오래 참는 것으로 성취됩니다. 가정이 하나가 되려면 잘 참아야 합니다. 감정이 되는대로 일을 처리하고나면 평생 후회할 것 밖에 없어요. 요즘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 가정도 47%가 이혼합니다. 물론 맘에 안들었겠지요. 참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사람의 마음만큼 잘 변하는게 어디 있나요? 하루에도 열두번 바뀌는게 사람입니다. “내 남편은 절대로 바람 안 피우는지 알았어요... 그런 사람은 절대로 없어요...” 자랑할 것없어요. 열두번 바뀝니다. 반대로 세상에 저런 놈이 세상에 어디있을까? 인간쓰레기다... 그런 사람이 바뀌면 성자가 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맘에 안들어도 한번 참을 때마다 “ 화평케하는 직분을 감당하였구나...”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참는 것이 우리의 직책입니다.
4) 사랑으로 용납하라 - 용납한다는 말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잠언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이것이 사랑의 용납입니다. 덮어주세요. 허물을 가리워주세요. 미국이 존경하는 인물 가운데 한분인 카터 대통령이 이따금 부부싸움을 했답니다. 그 이유는 딱 한 가지, 시간지키는 것 때문에... 부인은 늘 어디를 가려면 늦었습니다. 고쳐집니까? 그래서, 얼마전에 카터가 아내에게 생일 카드를 보내면서 “ 여보 오늘까지 당신을 너무 괴롭혔는데, 지금부터는 시간 안 지켜도 됩니다. 오늘부터 자유하세요. 모든 것을 용서합니다..” 이게 생일 선물이었답니다. 아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었다고 합니다. 안고쳐져요. 그냥, 용납하세요. 하나가 그렇게 됩니다.



3. 한 소망 안에 하나가 됩니다.

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시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 우리는 함께 예배하면서 몸이 하나라는 것, 성령님도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시라는 것을 잘 압니다. 더욱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한 소망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한 소망일 때에 하나의 기도와 한 믿음의 찬양을 부를 수 있습니다. 동상이몽이라는 한자어가 있습니다. 그 뜻은 한 이불 밑에 누워있지만, 그 꿈은 전혀 다른 것을 말합니다. 가정에서도 부부가 행복하려면 소망이 하나이어야 합니다. 남편의 소망은 재물에 있고, 아내의 소망이 천국에 있다면 아무리 하나가 되려고해도 십자가입니다. 서로가 조금 안 맞을 수 있는 것은 한 목적으로 양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누가 봐도 참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와 말씀에 대단히 박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십의 이조를 드렸고, 길을 걷다가도 시간이 되면 두 손을 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과 저들과는 어울릴 수 없었습니다. 삶의 목적과 소망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비하면 예수님의 12제자는 너무도 부족하고 무식하고 허물많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저들과 하나가 되셨습니까? 목적과 비젼을 같이 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22장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는 이미 요단강 동편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명대로 요단강 서편에 와서 모든 정복의 전쟁을 마쳤고, 땅을 분배하는 일도 마쳤습니다. 그리고나서, 그들은 요단 동편으로 가기를 요청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축복의 땅은 실로가 있는 요단강 서편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기름진 땅 요단 동편에 풍성한 가축과 재물을 다 놓아두고 왔기 때문에 그들은 끝까지 가겠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가슴이 아프지만, 그들이 가고자 할 때에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용맹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그래도 교회를 떠나고자 할 때에, 붙잡다가 붙잡다가 그래도 나가면 “못됐네.... 잘 해봐라...” 이러지 말고, 목사부터 축복하고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한 하나님, 한 성령님, 한 믿음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잘 못입니다. 한 소망 안에서 서로의 작은 허물은 덮어줄 수 있어야 되요... 그 사람 때문에 나간다, 드간다 그러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도저히 떠나야 할 때에는 갑자기 없어지지 마시고, 목사도 가는 길을 축복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그렇게 떠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저도 그렇게 좀 속 넓은 목사가 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아무든, 갓, 르우벤, 므낫세 반지파가 요단 동편으로 떠나고자 할 때에 여호수아는 한가지를 부탁했습니다.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수22:5) 그들이 가자마자, 단을 쌓았습니다. 그 단은 “에드”(증거단)이었습니다. 후손들이 요단강을 좌우하고 혹시나 끊어질까봐 영원토록 기억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단강 서편의 이스라엘이 볼 때에는 “미츠베크”(제단/ 예루살렘에 와서 하나님께 단을 쌓는 것)를 따로 세우고, 구분하려고하는 것으로 알고 분노하며 전쟁을 일으킬 뻔합니다. 서로 자기 생각대로라면 서로가 괘씸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기위한 것인데, 저놈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 저 놈들이 우리랑 완전히 담을 쌓으려고 하는구나.... 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한 소망, 한 비젼을 알고 화해하고 서로 위로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뜻이 안 맞을 수 있어요. 그것 때문에 원수 맺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자입니다. 소망을 확인해 보세요. 그렇게 봉사하고 그런 일을 감당함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면, 서로 이해 하세요. 그리고, 서로 양보하세요. 이것이 교회의 하나된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된 교회”를 기뻐하시고, “하나된 성도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이제 하나가 됩시다... 이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한 마음이 됩시다. 그리고, 겸손,온유, 오래참음, 용납으로 하나됨을 지킵시다. 그래도 , 마음이 안 맞으면 한 비젼과 한 소망을 확인하고 하나가 됩시다. 2월은 친교의 달입니다. 우리 교회가 한마음,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